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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둘 지워지고 있는 낡은 전화번호 수첩 속 이름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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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오래] 김길태의 91세 왕언니의 레슨(5)

낡은수첩. [사진 김길태]

낡은수첩. [사진 김길태]

내게는 까맣고 낡은 작은 수첩이 하나 있다. 50년 아니 그보다 더 오래된 수첩이다. 수첩에는 친구, 친척, 친지를 이어주는 전화번호가 적혀있다. 이제는 그것이 별 쓸모가 없게 되었다.

수첩에 적혀있는 사람들이 하나, 둘 내 곁을 떠나가고 몇 명 남지 않았다. 정든 사람의 이름을 하나, 하나, 줄을 그어 지워가기 시작한 것이 언제였는지…. 수첩을 보면 옛 추억과 보고 싶은 친구가 생각나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사람의 삶은 고통이요, 공(空)이라 했다.

먼저 간 사람 이름, 수첩에서 줄 그어 지워 

엄마 뱃속에서 생명이 자라 태아가 되고, 이 세상에 태어나 아이가 되고, 어른이 되고, 마침내 늙어 없어지니 공이 맞는 것 같다. 하지만 무한한 에너지를 갖고 마음속에 사랑을 품은 이 육체는 현실에 엄연히 존재하는 유다. 유를 부정하는 무는 없으니 ‘공은 무엇일까?’ 생각해본다.

우리는 젊음을 체험하고 변화무쌍한 삶을 살아온 사람이다. 젊었을 때 공을 논하면서 ‘인생은 공에서 시작해 공에서 끝난다’는 부정적인 허무주의에 빠져 산다면 그들의 삶은 비참한 모습일 것이다. 젊음은 활기찬 에너지를 갖고 있으므로 가치가 있는 것이다. 욕심이 있고, 노력이 있고, 미래가 있는 그 속에서 발전이 있는 것이 생이 아닐까.

클림트의 1916년작 '삶과 죽음'. 이렇듯 삶과 죽음은 공존한다. [중앙포토]

클림트의 1916년작 '삶과 죽음'. 이렇듯 삶과 죽음은 공존한다. [중앙포토]

참 고마운 것은 신이 사람을 이 세상에 보낼 때 욕심, 강렬한 투쟁심과 노력하는 힘을 마음속에 사랑과 같이 심어서 보낸 점이다. 사람이기에 새로운 것에 도전하고, 꿈을 이루기를 희망하고, 노력하고, 사랑하고, 미워하고, 질투하면서 죽음을 향해 가고 있는 것도 모르고 앞으로,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 그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나도 젊을 때가 있었다. 희망에 부풀어 많은 꿈을 꾸고, 토론하고, 하늘을 보고 미래를 꿈꾸고, 탄식하고…. 또 꿈을 이루려고 노력하고, 이루었을 때 즐거워하고, 많은 것을 얻고, 또 잃고, 후회하면서 삶에 대한 깊은 생각 없이 그냥 그렇게 살아왔다. 젊음이 거기에 있었으니까.

지금 생각해보면 그 시절 인생이 무엇이니, 공이 무엇이니 하며 심각하게 고민했다면 내 삶에 즐거움이, 후회가, 웃음이, 눈물이 있었겠는가. 그때가 좋았던 것 같다.

지금 유의 세계에서 공의 철학적 마음의 세계를 내다보는 나이가 되어 수첩을 보니 ‘이것이 공이로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이 많은 친구가 어디로 갔을까? 이 지구 위에서는 볼 수가 없으니 유에서 무로 변한 것이다. 삶과 죽음이 하나이니 공은 무엇이겠는가 생각할 때 공은 이론도 없고 깊이 생각할 필요도 없는 삶, 그 자체인 것 같다.

김길태 산부인과 의사 heesunp1@gmail.com

비트코인의 탄생과 정체를 파헤치는 세계 최초의 소설. 금~일 주말동안 매일 1회분 중앙일보 더,오래에서 연재합니다. 웹소설 비트코인 사이트 (http:www.joongang.co.kr/issueSeries/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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