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김진국이 만난 사람] 공익인권법인 '공감' 소라미 변호사/ 아동 인권 공분은 많이 하는데, 변화로 이어지지 않아요

중앙선데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576호 10면

장애인, 폭력 피해 여성, 이주민과 난민, 아동, 노숙자, 성 소수자, 청소노동자, 아파트 경비원…. 모두 우리 이웃이다. 우리 옆에서 같이 살아간다. 그렇지만, 힘이 없는 소수자들이다. 편견과 차별에 시달리고, 기댈 곳이 없다. 이들에게 힘이 되어 주는 사람들이 있다.
공익인권법재단 ‘공감’이다. 공익변호사라는 개념이 없던 2004년 처음 만들어져 사회적 소수자와 약자들에게 무료로 변론해왔다. 소라미(44)변호사는 사법연수생 시절이던 2003년 공감을 만드는 일에 참여해 18년째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공감은 소외된 분들에게 무료로 법률지원을 한다, 이런 생각으로 시작했어요. 그래서 처음 만났던 분들이 이주민, 결혼이민자, 장애인, 난민… 그게 점점 소수자와 사회적 약자와 관련된 이슈로 늘어났고. 개별적인 사건을 하다 보면 결국 제도에 대한 고민으로 연결되면서 법을 바꾸거나, 만드는 활동으로 연결이 되어 왔습니다.”

 소라미 변호사는 ’공감은 소외된 분들에게 무료로 법률지원을 하려고 시작했다“면서 ’점점 소수자와 사회적 약자와 관련된 이슈로 늘어났고, 법을 바꾸는 활동으로 연결됐다“고 말했다. 최승식 기자

소라미 변호사는 ’공감은 소외된 분들에게 무료로 법률지원을 하려고 시작했다“면서 ’점점 소수자와 사회적 약자와 관련된 이슈로 늘어났고, 법을 바꾸는 활동으로 연결됐다“고 말했다. 최승식 기자

창덕궁 서쪽 돌담 바로 옆 원서공원을 내려다보는 북촌창우극장 3층. 20일 찾아간 공감 사무실은 전망이 좋은 것을 제외하면 너무 열악하다. 변호사들 자리는 작은 책상에 몸을 돌릴 여유도 없는 의자가 전부다. 가슴 높이로 담을 쌓아놓은 책꽂이에는 책과 서류가 터질 듯이 꽂혀있다. 자원봉사자들은 아예 회의용 탁자 하나에 둘러앉았다. 통로는 한 사람이 겨우 비집고 지나갈 정도다. 소 변호사는 근처에 짓고 있는 노무현 센터가 완공돼 “회의실이라도 빌려 쓸 수 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얼마 전 한 인터뷰에서 이제 후배에게 물려 줄 때도 됐다고 말했던데.

“공감을 시작할 때는 처음이었지만 이제 이런 일을 해보겠다고 꿈을 꾸는 후배들은 많아졌어요. 그런데 후원으로 운영하다 보니까 매년 신입 변호사를 채용할 형편은 안 되고…. 그래서 어떻게 하면 순환 구조를 만들 수 있을까 고민하는 거죠. 시작할 때의 그런 열정과 헌신이 살아 있는지 스스로 평가도 하고…. 그런데 공감에서 일하는 것이 너무 재미있어서 다른 것을 하기는 쉽지 않을 것 같아요. 제가 뭐 갑자기 돈 버는 변호사를 할 것도 아니고, 조직에 들어갈 것도 아니고….”

소라미 변호사는 ’‘아이가 사망했다’고 하면 공분하고, 국회랑 정부도 대책을 내놓는데, 공분으로 끝난다“면서 ’공분을 제대로 된 변화와 제도 개선으로 이어가는 게 중요하다“고 말했다. 최승식 기자

소라미 변호사는 ’‘아이가 사망했다’고 하면 공분하고, 국회랑 정부도 대책을 내놓는데, 공분으로 끝난다“면서 ’공분을 제대로 된 변화와 제도 개선으로 이어가는 게 중요하다“고 말했다. 최승식 기자

그는 “공감 같은 조직이 한국 사회 전체로 보면 더 필요한 것 같다”고 말했다.
“2007년 미국 공익법률지원단체 탐방을 갔습니다. 이민이면 이민, 노숙자면 노숙자, 아동이면 아동, 영역별로 다 분화가 되어 있었어요. 그리고 한 단체에 변호사 20명, 사회복지사 20명, 지원인력 10명, 이런 식으로 규모도 크고. 그래서 저희가 너무 놀라고 왔어요. 이게 어떻게 가능하지? 기본적으로 기부문화가 많이 다른 것 같아요. 그때 그런 꿈을 꾸기는 했어요. ‘우리도 언젠가 저렇게 할 수 있을 때가 올 것이다.’ 그런데 운영에 급급하다 보니 이런 꿈을 더 키우지 못하겠더라고요. 하하. 저는 개인적으로는 아동 인권만 전담하는 단체를 만들면 좋겠다, 이런 생각을 하고 있어요. 매년 끔찍한 사건이 일어나는데 예산에 반영이 안 돼요. 아동구호단체는 있는데 각을 세우면 정부도 기업도 안 좋아하니까 아름다운 설정들만 하시더라고요.”

공익 인권 변호 꿈꾸는 변호사 늘어 #공감 같은 단체 우리 사회 더 필요해 #미국은 영역별 분화하고, 규모도 커 #적극적 기부 문화가 공익 활동 키워 #수임료 없이 기부금으로 운영하나 #정부·기업과도 부딪쳐 모금 어려워

사건 의뢰는 어떻게 합니까.

“온라인 홈페이지로 직접 신청하는 방법이 있고요. 함께 활동하는 단체들이 의뢰되는 경우가 많아요. 지적 장애인이 노동착취를 당하면 그분을 지원하는 장애인 인권단체들이 현장에 먼저 가실 것 아니에요? 그분들이 법률지원이 필요하다고 연락하죠.”

공익변호사는 법률가이면서 사회활동가 같아요.

“네, 그래요. 전통적인 변호사들이 하는 일만 하게 되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어떤 부분은 현장 인권단체와 함께하는 것이 중요하거든요. 그분들이 의뢰인이기도 하고, 신뢰도 유지해야 하고…. 그렇지만 결국은 저희가 똑같은 활동가처럼 하기보다 전문성을 갖고 움직이기를 원하시더라고요.”

소라미 변호사가 2006년 국제결혼에 대한 인신매매적인 과장 광고에 대해 항의 집회를 주도하고 있다. [공감 제공]

소라미 변호사가 2006년 국제결혼에 대한 인신매매적인 과장 광고에 대해 항의 집회를 주도하고 있다. [공감 제공]

소 변호사는 이주여성과 아동 문제를 담당하고 있다. 지난 14일 광주고법이 필리핀 국적의 처제(20)를 성폭행한 형부 전 모(39) 씨에게 징역 7년 형을 선고했다. 소 변호사가 항소심부터 지원해 1심 무죄 판단을 뒤집었다.
전 씨와 피해자의 언니는 먼저 혼인신고를 하고 동거하고 있었다. 지난해 2월 결혼하기 위해 피해자 가족을 한국으로 초청했다. 결혼 나흘 전 전 씨는 아내가 옛 직장동료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도록 호텔 방을 잡아준 뒤 혼자 집으로 돌아와 그날 밤 처제를 성폭행했다. 1심에서는 물리력을 행사하지 않았고, 피해자가 거부하지 않았다는 전 씨 주장을 받아들여 무죄를 선고했다.

무엇이 잘못됐나요.

“피해자에게 불리한 정황이 몇 가지가 있었어요. 사건 다음날 처제가 형부 차를 타고, 결혼 답례품을 찾으러 가고, 갔다 오는 길에 카페에 들러서 커피를 사고, 사진을 찍고…. 가해자 쪽에서는 강제로 이루어진 강간이라고 하면 피해자가 이렇게 했겠느냐고 주장했어요. 이것을 재판부가 그대로 받아들여 준 겁니다.”

어떻게 뒤집었습니까.

“1심에서 간과한 여러 가지를 지적했습니다. 피해자가 관계 중에 계속 울고 있었고, 전 씨가 몸으로 누르고, 양손으로 피해자를 제압한 것은 폭행·협박에 해당한다는 의견을 제시했습니다. 언니의 결혼 생활이 파탄 날 수 있다는 두려움이 컸다는 점을 지적했습니다. 답례품 찾으러 간 것도 자발적인 게 아니라, 언니가 일하러 나가야 한다며 부탁한 거였어요.”

이주노동자는 소통이 안 돼 어려움을 겪는 일이 많겠네요.

“맞아요. 항소심 재판 때는 필리핀 분 증인을 많이 신청했는데, 통역이 너무 안 되는 거예요. 그래서 재판을 중단하고, 다시 기일을 잡았습니다. ‘폭행 협박이 있었어요?’ 이렇게 물어보면 ‘아니요’라고 해요. 그런데 ‘양손을 잡아서 눌렀어요?’ 하면 그건 또 ‘그렇다’고 하고…. 중요한 법리적 쟁점이 통역 때문에 자꾸 왜곡돼서….”

작년에 농업 이주노동자들의 주거 실태조사보고서를 내셨는데, 그분들도 언어 장벽 때문에 웬만하면 참고 넘어가지 않습니까.

“네, 뭔가를 말했을 때, 이익을 얻기보다 불이익을 받을 가능성이 크고, 보호가 안 되니 이야기하기 어렵습니다.”

소라미 변호사는 ’공감은 소외된 분들에게 무료로 법률지원을 하려고 시작했다“면서 ’점점 소수자와 사회적 약자와 관련된 이슈로 늘어났고, 법을 바꾸는 활동으로 연결됐다“고 말했다. 최승식 기자

소라미 변호사는 ’공감은 소외된 분들에게 무료로 법률지원을 하려고 시작했다“면서 ’점점 소수자와 사회적 약자와 관련된 이슈로 늘어났고, 법을 바꾸는 활동으로 연결됐다“고 말했다. 최승식 기자

소 변호사는 이화여대 영문과 92학번이다. 졸업 후 고려대 법대에 편입하고, 사법시험 43회에 합격했다. 2007년 ‘진짜 자랑스러운 이화인상’을 받았다. 학생회가 이명박 전 대통령의 부인 김윤옥 씨를 자랑스러운 이화인으로 뽑은 데 반발한 이벤트였다. 일부 재학생과 졸업생을 대상으로 온·오프 투표한 결과 소 변호사가 72.8%의 압도적 표를 얻었다.
“정말 공분을 많이들 하세요. ‘아이가 사망했다’ 이러면 공분하고, 국회랑 정부도 대책을 내놓고 하는데, 공분으로 끝나는 거예요. ‘관련 법을 개정하자’,‘예산을 반영해 달라’고 하면 안 되는 거죠. 공분이 제대로 된 변화와 제도 개선으로 이어질 수 있도록 관심을 계속 갖는 것이 중요하다 싶어요. 후원도 많이 해주면 좋겠어요. 법과 제도를 바꾸는 활동은 모금활동이 어렵더라고요.”

공익인권법재단 공감의 구성원들. 왼쪽부터 황필규·장서연·소라미·김수영·윤지영·염형국·김지림·박영아 변호사, 성혜경(퇴직)·안주영·신옥미 간사, 차혜령 변호사.

공익인권법재단 공감의 구성원들. 왼쪽부터 황필규·장서연·소라미·김수영·윤지영·염형국·김지림·박영아 변호사, 성혜경(퇴직)·안주영·신옥미 간사, 차혜령 변호사.

‘공감’은 박원순 서울시장 아이디어다. 사시 43회인 소라미ㆍ염형국(45) 변호사가 연수원 시절 박 시장이 강연했다. 공익 변호가 블루오션이라고 강조했다.

염 변호사가 참여연대로 사무처장이던 박 시장을 찾아갔다. 시민단체에서 상근으로 일하고 싶다고 했다. 그때 박 시장은 자신이 상임이사였던 아름다운재단에 공익활동만 전담하는 변호사팀을 만들자고 했다. 염 변호사가 같이할 동료를 구했다. 소라미 변호사는 “염 변호사가 올린 공지가 너무 좋아 함께했다”고 말했다. ‘낮은 곳에 임하는 용기로 소외된 희망을 되살린다.’

동기 3명이 2004년 ‘공익변호사그룹 공감’을 만들었다. 국내 최초의 전업적, 비영리 공익변호사단체다. 수임료 걱정 없이 찾아올 수 있는 친구 같은, 만만한 변호사를 지향했다. 2012년에는 아름다운재단에서 독립해 ‘공익인권법재단 공감’으로 발전했다. 이제 변호사 9명, 간사 3명이다. 공감 소속 변호사들은 별도의 개인 변호사 사무실을 운영하거나 로펌에 소속되지 않고, 공익활동에만 전념한다. 비용은 모두 기부금. 홈페이지(www.kpil.org)를 통한 소액 다수 개인 기부가 그중 68%다. 늘 적자다. 부족한 건 후원의 밤 행사로 보충한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