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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년 전 회견장으로 짚어본 종전 선언의 함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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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김수정
김수정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김수정 정치국제담당

김수정 정치국제담당

“우물가에서 숭늉 찾는 격”(2월 17일 김여정을 만난 뒤), “유리그릇 다루듯 하라 ”(3월 9일 청와대 참모진에게).

노무현, 남북 정상회담 앞서 부시에게 종전 선언 요구 #한국의 ‘선언 먼저’에 미국은 북핵 폐기 종착점으로 인식

문재인 대통령이 남북 정상회담을 놓고 한 말들이다. 5월 북·미 정상회담이 결정된 뒤에도 지속된 이런 신중모드가 전환됐다. 21일 남북 정상회담 준비위를 찾은 문 대통령은 “남북, 북·미 정상회담은 그 자체로 세계사적인 일” “남·북·미 3국 정상 간 합의로 이루려는 분명한 목표, 비전이 있다. 담대하게 준비하라”고 했다. 북·미 정상이 북한 비핵화와 북·미 간 수교 같은 포괄적 합의를 해낸다면 판문점에서의 ‘6·25 종전(終戰) 선언’까지 추진하겠다는 뜻으로 해석됐다. 청와대는 “그럴 여지도 있다”며 부인하지 않았다.

시계를 돌려 2007년 9월 7일 호주 시드니. 노무현 대통령과 조지 W 부시 미 대통령이 아시아태평양경제공동체(APEC) 행사를 계기로 회담한 뒤 나란히 기자회견장에 섰다. 노무현·김정일 남북정상회담(10·4)을 목전에 둔 시점이었다.

부시=“북한이 핵무기 프로그램을 폐기하면 한반도에서 새 안보협정을 체결할 수 있다.”

노무현=“한반도 평화체제 내지 종전선언 말씀을 빠뜨린 것 같은데, 김정일 위원장이나 우리 국민들이 듣고 싶어하니까 명확히 말씀해달라.”

부시=“한국전 종식 평화협정에 사인하고 안 하고는 김정일에게 달렸다고 얘기한 거다.”

노무현=“더 명확하게 할 수 있다면.”

부시=(말을 자르며) “더 명확하게는 할 수 없다. 감사합니다(끝냅시다).”

당시 워싱턴포스트 등 미 언론들이 “모호하고, 예의 바른, 의례적인 정상외교와 달랐다”며 전한 장면이다. 청와대는 통역상 문제가 있었다고 해명했지만 노 대통령의 종전 선언 애착을 드러낸, 북핵 폐기와 종전 선언의 선후 관계를 둘러싼 한·미 간 입장차를 드러낸 대표적인 장면으로 남았다. 이어 열린 10·4정상회담에서 남북은 ‘정전체제 종식과 항구적 평화체제 구현에 노력하고 3자 또는 4자 정상이 한반도 지역에서 종전을 선언하는 문제를 추진하는데 협력한다’고 담았다.

이후 사라진 ‘종전 선언’ 화두를 문 대통령이 남북, 북·미 정상회담을 앞두고 꺼낸 셈이다. 청와대 관계자는 “트럼프 대통령과 아직 공감대를 이룬 건 아니다”고 했다. 2007년 시드니 기자회견을 떠올린 이유다. 그때 노 대통령은 왜 부시 대통령의 ‘종전 선언’ 언급을 재촉했을까.

이에 대해선 한·미 실무선에서 이견이 좁혀지지 않았음에도 ‘합의됐다’는 보고를 노 대통령이 받았다는 얘기와, 한·미 간 조율은 됐는데 막상 시간이 모자라 양 정상이 소화하지 못했다는 주장이 상존한다. 노무현 정부가 ‘종전 선언’을 오랜 시간 준비하고, 이를 부시 행정부에 요구한 것은 사실이다. 고위 외교 소식통은 “당시 미국의 기본 입장은 부정적이었다. 미국은 북핵 폐기의 종착점으로 종전 선언과 평화협정체결을 보는 반면, 한국은 상징적 차원에서 선언부터 하고 그 동력으로 핵 폐기를 이뤄간다는 접근법이었다”고 전했다. 워싱턴 소식통은 “‘현실’과 ‘선언’의 일치를 추구하는 건 트럼프 행정부도 그대로일 것”이라고 했다. 11년 전 식으로 접근했다가 북핵 해결은 물론 한·미관계만 꼬일 수 있다는 우려다.

4월말 남·북정상회담, 5월 북·미정상회담 등 굵직한 외교 이벤트가 줄줄이 기다리고 있다. 한반도 정세는 물론 동북아 안보지형의 변화가 올 수도 있다. 하지만 예의 신중한 자세로 가다듬어야 할 때다. 핵미사일 ‘위업’을 달성한 김정은의 판돈은 어느 때보다 높을 것이기에 더욱 그렇다.

북한의 핵 폐기 의지부터 두드려봐야 한다. 북한이 획기적인 대미 제안을 할 수도 있지만, 정의용 국가안보실장이 전한 김정은의 ‘비핵화 의지’는 레코드판과 같다. 2005년 6월 김정일이 노 대통령의 특사로 방북한 정동영 의원에게 전한 ‘비핵화 의지’와 똑같다. 그래놓고 김정일은 이듬해 9월 1차 핵실험을 했다.

김수정 정치국제담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