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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신기술 도입도 노조 허락 필요 … 영국, 경영간섭 불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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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위기의 한국 자동차 산업 <하> 

“영국인들은 과도한 복지로 공장 생산성이 하락하면 망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이미 경험했다.”

한·영 자동차 기업 단협 비교 #영국, 노조활동 사측 승인 받아야 #근로 시간에는 노조 행사 금지 #한국, 인력 배치도 노조와 협의 #파업 땐 다른 공장에 생산 못 맡겨 #“독소 단협 조항 즉시 개선해야”

영국 워릭셔주(州) 워릭에서 웨스트미들랜즈주 코번트리로 이동하는 택시에서 기사 토니 리지웨이(57)는 이렇게 말했다. 영국 자동차 산업의 중심지였던 미들랜드 출신인 그는 할아버지부터 자녀까지 3대가 자동차 공장에서 일했거나 일하고 있다.

리지웨이는 “어릴 땐 동네 사람들이 대부분 자동차 컨베이어 벨트에서 일했다”고 추억했다. 하지만 영국 자동차 산업이 침체기를 겪으면서 포드자동차 대그넘공장에서 일하던 친구들이 대거 실직했다. 반대로 수년 전에는 아들 친구들이 우르르 재규어랜드로버 헤일우드공장에 취업하는 모습도 봤다. 그는 “이런 부침을 겪으면서 파업이 능사가 아니란 걸 알았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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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 영국 경제는 국제통화기금(IMF)의 금융 지원을 받아야 하는 수준으로 추락했었다. 그런데도 당시 강성 노동조합은 더 많은 복지를 요구하며 줄기차게 파업했다. 이른바 ‘영국병(British Disease)’이다.

한국이 지금 겪는 문제를 이미 40여 년 전 경험했던 영국은 그간 협력적 노사관계를 구축하기 위해 제도를 개편했다. 이 중 하나가 단체협약이다. 실제로 현대차·한국GM 등 한국 기업과 복스홀자동차 등 영국 기업의 단체협약 문구를 비교하면 상당한 차이를 발견할 수 있다.

[김주원 기자 zoom@joongang.co.kr]

[김주원 기자 zoom@joongang.co.kr]

예컨대 노조활동의 방식을 규정한 조항에서 두 나라 단체협상은 큰 차이가 있다. 현대차 단체협상 2장 8조는 노조가 수련회·선거·행사 등 조합 활동을 할 때 사측에 ‘통보’만 하면 된다고 규정한다. 반면 복스홀 단체협상은 조합 활동을 하려면 사측에 미리 ‘승인’받아야 한다고 규정한다.

조합 활동 범위와 관련한 규정도 다르다. 영국에선 근로 시간 중 노조 활동을 원칙적으로 금지하고, 승인하더라도 무임금이 원칙이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노사가 동의하면 노조 활동을 하면 일한 사람과 똑같이 월급을 받는다.

경영 간섭을 보장한 조항도 한국 단협에서만 볼 수 있다. 한국GM 단협 4장 30조는 ‘노조원 전출입 시 노조·노조원과 협의’를 규정했고, 전환배치를 하더라도 노조와 협의해야 한다고 규정했다. 현대차 단협 5장 41조도 전환배치할 때 노조의 심의·의결권까지 보장했다. 지난해 현대차가 소형 스포츠유틸리티차량(SUV) 코나를 출시했을 때 사측이 노조 동의를 얻지 못해 공장 가동이 멈춰선 배경이다. 반면 영국 단협의 경우 노조의 권한을 인정하는 구문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한국에서 해마다 문제가 되는 불법 파업의 원흉도 단협의 독소조항이었다. 현대차 단협 13장 128조는 파업 시 신규·대체 근무를 금지하고 다른 공장에 생산을 맡겨서도 안 된다고 규정한다. 신기계·신기술을 도입하거나 신차종을 개발하고 작업공정을 개선할 때도 노조 심의·의결이 필요하다(단협 41조). 현대자동차가 사소한 기계 하나를 도입할 때조차 노조 허락을 받는 이유다. 영국 단협에서는 이런 내용을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박지순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영국이 선진적인 단체협상으로 산업 경쟁력을 강화한 반면, 한국은 노조 동의 없이는 투자는커녕 인력 배치도 어려운 상황”이라며 “노조 운영비 지원 강제 조항이나 고용 세습 등 불법적인 단체협상 조항을 즉시 개선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웨스트민스터·코번트리(영국)=문희철 기자, 서울=김도년·성지원 기자 reporte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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