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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이 갈구하는 건 돈 몇 푼이 아니라 꿈이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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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정경민
정경민 기자 중앙일보
정경민 편집국 경제담당

정경민 편집국 경제담당

대기업에 다니던 정모씨는 지난해 회사를 그만뒀다. 업무로 접했던 블록체인 기술에 푹 빠져 아예 후배 3명과 스타트업을 차렸다. 주변에선 한사코 말렸다. 부모님이 펄펄 뛴 건 물론이다. 월급은커녕 퇴직금과 그동안 모은 저축까지 회사에 탈탈 털어 넣었다. 출퇴근 시간? 없다. 밤샘도 밥 먹듯 한다. 그런데 그는 요즘 “행복하다”고 한다. 꿈이 생겼기 때문이라고 했다.

한시적 임금보전으론 실업 못 줄여 #스타트업 붐 성공 핀란드서 배우라

정부가 2008년 이후 22번째 청년 일자리 대책을 내놨다. 2차 베이비붐 세대(1968~74년생)의 자녀인 에코 세대(91~96년생)가 구직시장에 몰고 올 쓰나미를 대비해서다. 정부가 청년 실업 대란을 미리 감지하고 선제 대응을 하고 나선 건 다행한 일이다.

그러나 처방은 이번에도 재탕이다. 앞으로 4년 동안 정부가 매년 1인당 1035만원씩 보조금을 줄 테니 중소기업에 취직하라는 거다. 청년 실업 대란도 막고 중소기업 구인난도 풀자는 계산이다. 한데 청년들이 중소기업을 꺼리는 이유가 연봉 때문일까. 공장만 빼곡히 들어선 공단에 한번 가보라. 영화 한 편 보려고 해도 서울로 나가야 하고 변변한 카페 하나 없다. 거기서 평생 박봉에 허덕이며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면 숨이 턱 막힐 수밖에 없다.

그나마 1035만원 보조금도 한시적이다. 4년 열심히 일했는데 5년 차에 연봉이 1000만원 깎인다면 계속 회사 다니고 싶겠나. 먼저 중소기업에 취직해 이번 대책서 소외된 기존 직원의 박탈감은 또 어쩔 건가.

한국 정부가 4년짜리 세금 당근으로 일자리를 18만 개 이상 만든다면 노벨 경제학상 감이다. 2008년 이후 역대 정권마다 비슷한 정책을 쏟아냈지만 청년 실업이란 난제를 풀지 못했다.

왜 그럴까. 청년이 갈구하는 건 돈 몇 푼이 아니라 꿈이기 때문이다. 미래에 대한 희망만 있다면 당장은 쥐꼬리 연봉도 참을 수 있다. 칼퇴근 못 해도 상관없다. 부모님이 도시락 싸 들고 말려도 못 이긴다.

그렇다면 청년들이 마음껏 꿈을 펼칠 수 있는 멍석을 깔아주는 게 정부가 해야 할 일이다. 그런데 일자리를 만들겠다는 정부가 청년의 기를 살려주기는커녕 산통을 깨는 데 앞장서고 있으니 청년 실업률이 떨어질 턱이 없다.

2004년 벤처기업 인포피아(현 오상헬스케어)는 LG전자와 손잡고 세계 최초로 ‘당뇨폰’을 개발했다. 당뇨 환자가 어디서든 손가락 끝에서 피를 뽑아 휴대폰으로 전송하면 의사가 원격 진료할 수 있는 기능을 탑재했다. 세계 원격의료 시장에 돌풍을 몰고 올 것이란 호평이 쏟아졌다. 그러나 혈당 측정 기능을 가진 휴대폰은 통신기기가 아니라 의료기기로 허가를 받아야 한다는 한국 정부의 뒷다리 잡기에 당뇨폰 기술은 14년째 먼지만 뒤집어 쓰고 있다.

4차 산업혁명을 대표하는 신기술로 인정받고 있는 블록체인과 암호화폐도 마찬가지다. 한국 정부는 암호화폐를 여전히 다단계 사기쯤으로 치부한다. 그러나 일본에선 암호화폐를 받는 점포가 26만 곳이 넘는다. 노무라증권은 암호화폐 관련 산업 덕에 올해 일본의 국내총생산(GDP)이 0.3%포인트 높아질 것으로 전망했다. 암호화폐 공개(ICO)의 성지가 된 인구 12만명의 스위스 시골마을 추크엔 세계 각국에서 몰려온 3만2000개의 기업이 북적댄다.

곳곳에 숨은 규제와 부처 간 밥그릇 싸움에 기존 이해관계 집단의 방해로 수많은 청년의 꿈이 싹도 틔워보지 못한 채 시들고 있다. 오죽하면 세계적 스타트업 100개 가운데 한국에서 창업했더라면 사업을 시작도 못 했을 곳이 57개에 달했을 거란 조사가 나왔을까.

핀란드는 2012년 ‘노키아 쇼크’로 인한 실업 대란으로 4년 내리 마이너스 성장을 했다. 그러나 노키아 출신 기술자들이 창업할 수 있도록 정부가 필사적으로 도운 결과 스타트업 붐이 일면서 되살아났다. 23번째 청년 일자리 대책을 고민 중인 한국 정부가 새겨야 할 타산지석이다.

정경민 편집국 경제담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