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민경원의 심스틸러] 무심한 듯 포근한 듯 ‘어른 남자’의 매력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19면

SBS 월화드라마 ‘키스 먼저 할까요’ 주연 감우성

SBS 월화드라마 ‘키스 먼저 할까요’ 주연 감우성

“문이 열리네요. 등산객이 들어오죠. 첫눈에 난 날 샜다는 걸 알았죠.”

드라마 ‘키스 먼저 …’ 주연 감우성 #20대부터 나이에 맞는 멜로 맡아 #자신보다 상대배우 빛나게 만들어

SBS 월화드라마 ‘키스 먼저 할까요’에서 손무한(감우성 분)을 처음 만난 안순진(김선아 분)이 마음속으로 부르는 노랫말이다. 유리상자의 ‘사랑해도 될까요’를 개사한 노랫말은 “처음인걸요. 분명한 느낌. 그대 폭탄 맞아요. 삼재가 오려나 봐요. 그대에게 난 빅엿을 줄게요”까지 이어진다.

그도 그럴 것이 세상살이 겪을 만큼 겪어봤다고 자부하는 돌싱남녀가 선을 보는 자리에서 머리부터 발끝까지 등산객 차림으로 무장한 아재가 나타나다니 어찌 당혹스럽지 않겠는가. 등산스틱까지 들고 저벅저벅 호텔 로비로 걸어들어온 남자는 장갑도 벗지 않은 채 악수를 청한다. 안 오려던 것을 ‘안순진’한 이름 때문에 나왔다고 하니 그 진의가 의심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키스 먼저 할까요’. [사진 SBS]

‘키스 먼저 할까요’. [사진 SBS]

이쯤 되면 꼴 보기 싫어야 마땅할진대 감우성(48·사진)은 그렇지가 않다. 비록 앞에서는 무뚝뚝하고 별다른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속을 알 수 없는 아저씨지만 뒤에서 보면 한없이 다정하고 따뜻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극 중 김선아와 관계에서도 그랬다. 비록 김선아는 기억하지 못했지만 감우성은 처음 만났을 때도, 두 번째, 세 번째 만났을 때도 울고 있었던 그를 자신만의 방식으로 위로했다.

‘리얼 어른 멜로’를 표방한 이 작품에 대한 반응은 뜨겁다. 중년을 넘어 삶의 마지막 순간을 향해 달려가는 와중에도 찾아온 사랑을 받아들이는 이들의 모습이 시청자들의 마음을 울린 것이다. 뜨겁게 껴안진 않아도 “그 사람은 전과자가 아닌 피해자”라고 과거를 감싸고, 시한부 선고가 가로막아도 “내일 후회하더라도 오늘이라도 행복하면 좋겠다”고 말하는 게 쉬운 일인가. 사랑의 단짠맛을 넘어 쓴맛 정도는 삼켜봤어야 가능한 일이다.

‘연애시대’. [사진 SBS]

‘연애시대’. [사진 SBS]

사실 감우성은 늘 ‘츤데레’였다. 영화 ‘왕의 남자’(2005)의 광대나 드라마 ‘근초고왕’(2010)의 근엄한 왕처럼 사극에서도 활약했지만, 그보다는 ‘결혼은 미친 짓이다’(2002)나 ‘연애시대’(2006)에서처럼 묵묵히 자리를 지키며 기다리는 동시대 순애보의 주인공이 더 어울렸다. 등장할 때마다 여심을 훔치는 살인미소는 아니지만 볼수록 의지하고 자꾸만 더 만나고 싶은 느낌이랄까. 자신이 스스로 빛나기보다는 남을 빛나게 만드는 것 역시 그의 매력이다.

덕분에 조건을 보고 다른 남자와 결혼한 은희(엄정화 분)를 계속 만나는 시간강사 준영(‘결혼은 미친 짓이다’)이나 한 번 부부로 만나 살다가 헤어진 은호(손예진 분)와 친구처럼 지내는 서점 직원 동진(‘연애시대’) 모두 관계의 정면보다는 측면, 후면이 부각되는 인물이었다. 사랑에 빠지는 순간의 설렘은 없지만, 관계를 유지 혹은 전환해 나가는 새로운 관점을 보여주는. 유독 이 작품들의 여운이 긴 것 역시 그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인지 감우성의 필모그래피에도 여백이 많다. 그와 함께 호흡을 맞췄던 엄정화나 손예진이 영화와 드라마를 종횡무진하며 빽빽하게 이력을 쌓아가는 동안 그는 평균 4년에 한 번꼴로 새 작품으로 돌아왔다. 인위적으로 캐릭터를 만들거나 빠져나오는 대신 자연치유의 시간을 갖는 셈이다. 쉬는 동안 체득한 그의 삶이 다시 연기의 토대가 되니 억지스럽지가 않다. 이제는 조금씩 희끗희끗해진 머리나 앉고 설 때마다 삐거덕대는 무릎을 숨기는 대신 캐릭터의 일부로 풀어낸다.

‘키스 먼저 할까요’ 명대사

끝나지 않는 미련이 두렵다면

“버릴 수 있을 때 버려야 살 수 있어요.
안그럼 내일도 오늘처럼
고통스러울 거예요”

잠이 오지 않는 밤이 두렵다면

“가끔 나하고 자러 우리 집에
올 생각이 있는지 궁금해요”

갑자기 닥친 죽음이 두렵다면

“때가 되면, 때가 오면 누구나 떠나.
꽃이 피고 지는 것처럼.”

‘키스 먼저 할까요’ 제작발표회에서 “배우분들이 같은 세대다 보니 서로 공감하고 같이 어울릴 수 있을 것 같았다”는 말처럼 중년이 된 그에게는 중년 멜로를 하는 일이 매우 자연스러운 일인 셈이다. 20대에는 트렌디 드라마 ‘예감’을 하고, 30대에는 결혼과 이혼을 고민했던 것처럼 40대 후반이 되어서는 독거 중년의 삶을 곱씹어보는 것이다. 손정현 PD 역시 “감우성씨를 수소문해보니 자연인처럼 살고 있더라. 멜로를 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라고 꾀었다”고 했다.

감칠맛 나는 대사와 매력적인 캐릭터에 반해 연결의 긴밀성이 떨어지는 것은 아쉬운 부분이다. 감우성과 김선아는 각각 발군의 멜로와 코믹 연기를 선보이고 있지만 스토리 전개에 있어서는 자꾸만 스텝이 엉긴다. 감우성이 고매하게 책을 읽어주는 신 바로 뒤에 김선아가 참지 못하고 방귀를 뀌는 장면이 등장하는 식의 전개가 몰입을 방해하는 탓이다. “오염 물질이 감지됐다”는 알람이 나오는 공기청정기의 PPL 여부는 차치하고서라도 감정선이 한번 끊어지면 다시 잇기 힘들다. ‘연애시대’를 기대하는 시청자에게는 감동이, ‘내 이름은 김삼순’을 기대하는 시청자에게는 위트가 아쉬울 수밖에.

드라마평론가로 활동하고 있는 충남대 윤석진 교수는 “상황에 맞춰서 캐릭터가 살아나야 하는데 이야기가 분절되면 이를 메우기 위한 배우의 개인기밖에 보이지 않게 된다”고 말했다. 부디 ‘키스 먼저 할까요’가 배우와 대사, 이야기가 모두 남는 드라마가 되길 바란다. 삶의 새로운 생애주기를 맞이할 때마다 다시 찾아보게 되는 이야기가 우리에게는 보다 많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좀처럼 다뤄지지 않는 어른 멜로라면 더더욱.

◆민경원의 심(心)스틸러

주연 이상으로 빛나는 조연을 일컫는 신스틸러(scene stealer)를 넘어 대중의 마음을 훔치는 문화인들의 매력을 조명합니다.

민경원 기자 storymin@joongang.co.kr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