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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파이들이 만드는 트럼프·김정은 담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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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효식 기자 중앙일보 사회부장
정효식 워싱턴 특파원

정효식 워싱턴 특파원

마이크 폼페이오 미국 중앙정보국(CIA) 국장이 북한 비핵화 협상의 전면에 등장했다. 서훈 국가정보원장, 김영철 북한 통일전선부장과 3국 정보기관 비밀 채널을 통해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과 김정은 노동당 위원장의 5월 핵 담판을 성사시킨 건 물론 준비도 주도하고 있다. 스파이 수장들이 외교관들을 뒷전으로 밀어내고 국제 협상에 직접 나선 건 보기 드문 일이다.

폼페이오 국장은 트럼프 대통령이 김정은의 정상회담 제의를 수락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북한 해외 정보기관 정찰총국 등과 비공식 채널을 구축해 비핵화 의사 등 진의를 확인해 보고했다. 그는 지난주 해임된 렉스 틸러슨을 대신해 국무장관에 지명된 뒤에도 여전히 CIA의 막후 채널을 활용해 북한과 정상회담 준비를 위해 접촉하고 있다고 한다. 미국 언론들은 이를 두고 “폼페이오 국장은 비밀 채널을 통해 이뤄지는 ‘조용한’ 외교 유형을 좋아한다”고 했다. 상원 인준을 통과할 때까진 현직 CIA 국장 신분이어서 국무부와 유엔 북한대표부 간 기존 ‘뉴욕 채널’이 아니라 정보 채널이 정상회담을 주도할 수밖에 없는 처지다.

한국도 크게 사정이 다르진 않다. 김정은은 평창올림픽 개막식 때 3차 남북 정상회담을 제안했다. 그리고 폐막식 특사로 참석한 김영철 통전부장과 북·미 정상회담이란 밑그림을 그린 게 서훈 국정원장이다. 폼페이오·서훈·김영철 세 사람은 최고 권력의 신임을 받는 측근이란 공통점이 있다. 미 육사, 탱크부대장 출신인 폼페이오는 북 정권교체론, 군사옵션을 공개적으로 발언하며 트럼프 강경 정책과 주파수를 맞춘 건 물론 "러시아 대선 개입 공모는 없었다"며 정치적 방패 역할까지 한 충성파다. 서훈 원장은 2000년 1차 남북 정상회담 실무 협상에 참여했고 2007년 2차 남북 정상회담은 국정원 3차장으로 준비팀의 일원이었다. 김영철은 천안함 폭침, 연평도 포격의 배후인 정찰총국장을 8년 지낸 김정은의 군부 최측근이자 1991년 남북 기본합의서 체결부터 27년 대남 협상에 참여했다.

왼쪽부터 폼페이오, 서훈, 김영철. [연합뉴스]

왼쪽부터 폼페이오, 서훈, 김영철. [연합뉴스]

워싱턴의 전직 고위 외교관은 “우리는 결국 양쪽의 한국인들이 만든 판에 끌려가는 입장이 아니냐”고 말했다. 그러다 보니 워싱턴과 서울 양쪽에서 ‘외교관 소외론’이 나오는 건 당연한 결과다. 강경화 외교부 장관도 18일 방영된 미국 CBS 방송과 인터뷰에서 “외교관들이 정상회담 준비 과정에서 배제됐지 않느냐”는 질문을 받았다. 강 장관은 “이번처럼 중대한 일을 만들 때는 최고지도자의 정치적 의지가 요구되기 때문에 신중을 기해야 한다”며 “외교와 정보 분야의 협력은 물론 모든 자산을 총동원해야 한다”고 답했다.

폼페이오 국장은 트럼프 대통령의 정상회담 수락 직후 방송에 나와 “CIA가 관여했던 과거 실패한 협상의 역사에 대해 읽었다”며 “나는 그 같은 실패를 반복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그러곤 이틀 뒤 새 국무장관에 지명됐다. 트럼프 대통령으로선 지난 25년 ‘끔찍한’ 북핵협상을 떠올리게 하는 탐색 대화나 실무 협상 같은 외교관의 제안보다는 폼페이오의 핵 담판 조언이 자기 생각에 딱 들어맞았을 터다. 한국과 미국, 북한 각자 내부 사정이야 어찌 됐든 효율적인 목적 달성을 최우선으로 하는 정보기관들 손에 한반도 운명의 성패가 맡겨졌다. 이들 세 스파이 기관의 수장이 딱 한 번의 담판 성공으로 어두운 비밀 공작의 과거사를 깨끗이 만회하길 바랄 뿐이다.

정효식 워싱턴 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