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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전영기의 시시각각

국무총리는 국회에서 뽑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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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전영기
전영기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전영기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전영기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문재인 대통령이 정부에서 만든 개헌안을 발의하겠다는데 이는 안 될 말이다. 6월 13일에 치를 지방선거 때 개헌 국민투표도 함께 해야 하는 일정표상 어쩔 수 없다는 게 청와대의 주요 논리다. 헌법은 국가의 탄생, 그 자체와 동일시될 정도로 신성하고 귀중하다. 대통령의 공약 사안이라는 이유로, 혹은 수백억원의 예산을 절약한다는 명분으로 하기 싫은 숙제 해치우듯 지방선거에 묻어서 처리할 사안이 아니다. 굳이 경중을 따지자면 지방선거보다 개헌이 훨씬 중요하다. 꼬리로 몸통을 흔드는 격이다.

대통령 중임제 개헌 때 함께 넣어야 #청와대, 정부 개헌안 발의 취소하라

무엇보다 문 대통령이 정부 개헌안을 마련해 달라고 책임을 맡긴 정해구 성공회대 교수가 영 미덥지 않다. 그는 1997년 『해방 전후사의 인식4』란 책에서 “해방의 시점에서 요구되는 혁명의 내용은 반제반봉건 민주주의 혁명이라고 할 수 있다. 소련군이 진주한 북한에서 반제반봉건 민주주의 혁명은 소련군에 힘입어 순조롭게 진행됐고, 미군이 점령한 남한에서는 미군정의 정책에 의해 혁명이 좌절됐다”고 썼다. 정해구의 글을 보면서 그가 ‘대한민국은 태어나선 안 될 나라’라는 생각을 갖고 있는 듯하다고 느낀 사람이 한둘이 아닐 것이다. 반제반봉건 민주주의 혁명이 순조롭게 진행됐다는 북한이, 인민은 체내 기생충과 굶주림에 시달리고 인류 역사상 유례를 찾기 힘든 인권 유린에다 전체주의 공포정치가 횡행하며 핵무기 몇 개 외엔 세상에 자랑할 게 없는 괴상한 동네가 된 데 대해 정해구가 말하는 혁명이 이런 건지 물어보고 싶다.

무엇보다 체제 실패로 소련이 붕괴한 지 6년이 지난 시점에서도 여전히 반제반봉건 혁명이라는 소련식 공산주의 이론을 잣대로 한국과 북한을 비교, 평가한 행태는 학자로서 지적 게으름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떨치기 어렵다. 문 대통령은 한반도 대격변 시대를 헤쳐가는 일에만 집중·전념했으면 한다. 청와대는 지방선거 전략 아니냐는 소모적인 논란만 키우고 실제 얻을 것이 적은 정부 개헌안 발의를 취소하기 바란다. 헌법 정신으로 보나 민주주의의 기본 원리로 보나 역사의 교훈으로 보나 개헌은 대통령의 일이 아니다. 그것은 국회의 몫이다.

앞으로 국회가 개헌안을 작성할 때 손봐야 할 가장 중요한 대목은 제왕적 대통령제의 문제다. 이 문제를 빼놓고 하는 개헌 논의는 무의미하다. 그런 차원에서 대통령의 제왕성을 해소하기 위해서라며 집권 세력이 내놓은 ‘대통령 4년 중임제’는 검토할 만하다고 본다. 현행 5년 단임제는 대통령의 임기 중 실적에 대해 국민의 직접 평가, 즉 재신임 투표를 원천적으로 배제하고 있다. 심판받을 걱정 없는 청와대가 ‘제멋대로 통치’의 유혹에 빠질 수밖에 없다. 1987년 헌법 이래 역대 대통령들이 거의 예외 없이 비참한 최후를 맞은 이유도 단임제에서 비롯된 면이 있다. 그런데 이것만으로는 부족하고 불안하다. 대통령 임기가 5년에서 사실상 8년으로 장기집권 구조로 굳어지면 제왕성이 오히려 강화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유한국당·바른미래당·민주평화당·정의당 야 4당의 공통분모인 ‘국무총리의 국회 선출제’를 가미할 필요가 있다. 총리를 국회에서 뽑게 되면 지금처럼 대통령이 총리를 가볍게 여기고 국무회의를 껍데기로 생각하며 주요 국가 결정을 국법에도 없는 청와대 참모회의에서 결정하는 이상한 일은 벌어지지 않을 것이다. 대통령은 국민이 뽑고 총리는 국회가 선출하는 제도는 여러 선진국이 채택해 잘 돌아가고 있다. 혼란과 시행착오가 없진 않을 것이다. 하지만 촛불혁명으로 세계적인 수준의 민주주의 운영 능력을 보여준 한국인이 받아들이지 못할 이유가 없다.

전영기 중앙일보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