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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에 미쳤다, 세상을 누볐다, 모든 게 드라마였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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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다큐멘터리 사진작가 구보타 히로지(78)는 1970년대 후반부터 미얀마와 북한을 수십 차례 방문했으며, 중국 45개 지방을 1000일간 일주하며 사진을 찍었다. 작품 활동 초기에 흑백 사진을 고집했으나 1978년 미얀마에서 ‘불교 성지 황금바위, 짜익티요(사진)’를 찍은 후부터 컬러 작업을 왕성하게 시도했다. [사진 학고재갤러리]

다큐멘터리 사진작가 구보타 히로지(78)는 1970년대 후반부터 미얀마와 북한을 수십 차례 방문했으며, 중국 45개 지방을 1000일간 일주하며 사진을 찍었다. 작품 활동 초기에 흑백 사진을 고집했으나 1978년 미얀마에서 ‘불교 성지 황금바위, 짜익티요(사진)’를 찍은 후부터 컬러 작업을 왕성하게 시도했다. [사진 학고재갤러리]

색바랜 청바지에 운동화, 진회색 스웨터 위에 걸친 검정 조끼. 검은색의 낡은 카메라 가방을 메고 그는 전시장에 서 있었다. 금방이라도 카메라를 꺼내어 셔터를 누를 만반의 준비가 된 차림이었다. 전시장을 찾은 관람객인가 했는데, 소년 같은 표정으로 웃으며 유창한 영어로 인사를 건넸다. “제가 구보타 히로지입니다.” 그가 바로 서울 소격동 학고재갤러리에서 열리고 있는 사진전 ‘구보타 히로지, 아시아를 사랑한 매그넘 작가’의 주인공이었다.

78세 일본 작가 구보타 히로지 #미 흑인민권운동, 사이공 함락 등 #지구촌 역사현장과 함께한 50여년 #대표작 109점 모은 한국 첫 개인전 #1970~90년대 북한 풍경도 담아

구보타 히로지는 세계적 사진가 그룹인 ‘매그넘’(Magnum)의 대표적인 사진작가 중 한 사람이다. 학고재 본관과 신관에 걸쳐 열리는 이번 전시는 한국에서 열리는 그의 첫 개인전이다. 다큐멘터리 사진작가 히로지의 작품 활동 50년을 아우르는 자리로, 그의 작품 총 109점을 한자리에서 보여준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북한에서 찍은 ‘압록강 상류’(1987). [사진 학고재갤러리]

북한에서 찍은 ‘압록강 상류’(1987). [사진 학고재갤러리]

1988년, 2008년 단체전을 통해 그의 작품이 국내에 전시된 적은 있지만, 그의 방대한 작품 세계 전반을 이 같은 규모로 풀어놓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1960년대부터 최근까지 세계 각지를 누비며 촬영한 사진을 ‘초기 작업’ ‘세계여행’ ‘컬러의 세계’ ‘중국’ ‘한국&북한’ ‘미국&일본’ 등 6개의 주제로 나눠 소개한다. 그가 “호기심에 홀리고” “사진에 미쳐” 고국 일본을 떠나 유목민처럼 지구촌을 돌아다니며 포착한 다채로운 문화권 풍경이 갤러리 곳곳을 채우고 있다.

구보타 히로지

구보타 히로지

◆사진, 그것은 집착이었다=“제게 사진이라는 것은 하나의 집착(obsession)이었습니다. 매일 셔터를 눌러야 안심이 되었어요. 사진을 찍지 않으면 내 몸이 쓸모없는 쓰레기 덩이처럼 느껴질 정도예요. 그런 제가 정상이 아니라 해도 할 말이 없습니다.”

1939년 일본 도쿄 생인 히로지씨는 와세다대 정치학과 출신. “부모님은 내가 대기업 사원이 되기를 바랐다. 나도 그게 효도인 줄 알고 자랐다”고 했다. 그러나 “대학 졸업 전인 61년 일본에 촬영하러 온 매그넘 작가 하마야 히로시(1915~1999)를 만나며 인생의 방향이 바뀌었다”고 했다. 당시 히로시의 촬영을 도왔던 그는, 히로시를 통해 또 엘리엇 어윗(90) 등 매그넘 사진작가들을 만나며 미국 유학을 결심한 것이다.

북한에서 찍은 ‘평양’(1978). [사진 학고재갤러리]

북한에서 찍은 ‘평양’(1978). [사진 학고재갤러리]

“저는 그 전에 미술이나 사진을 배운 적이 없었어요. 암실에 들어가 본 적도 없었고요. 그런데도 매그넘 작가들을 만난 이후로 사진을 찍고 싶다는 열망에 사로잡혔죠.” 62년 미국으로 건너가 새벽 4시부터 밤 11시까지 닥치는 대로 일한 그는 3년 뒤인 65년 매그넘 작가가 되었다.

‘만달레이 언덕 앞 소년과 소녀’(미안먀, 1978). [사진 학고재갤러리]

‘만달레이 언덕 앞 소년과 소녀’(미안먀, 1978). [사진 학고재갤러리]

◆지구촌을 떠돈 역사의 기록자=미국 생활을 시작한 60년대부터 70년대 중반 이전까지 그는 주로 미국과 일본을 찍는 데 집중했다. 63년 8월 28일 워싱턴에서 마틴 루터 킹 목사가 “나는 꿈이 있습니다(I have a dream)”로 시작하는 연설을 직접 들었다. 그는 한 외신과의 인터뷰에서 “킹 목사가 연설을 시작했을 때 온몸에 전율이 왔다. 본능적으로 내가 중요한 역사의 현장에 있다는 것을 알았다”고 말했다.

75년 베트남 사이공 함락을 다룬 사진을 찍은 이후 그는 시선을 한국과 중국, 미얀마, 인도네시아, 티베트 등 아시아 국가로 돌렸다. 중국은 문화대혁명 이후 1970년대 후반부터 80년대 중반까지 45개가 넘는 중국 지방을 찾아다니는 데 쏟아부은 날도 약 1000일이 넘는다. 78년 북한을 처음 방문한 이래 지금까지 북한을 찾은 것도 수십차례. 이번 전시에서는 백두산, 금강산, 설악산 등 남북의 명산 풍경과 2007년 서울 한강 주변의 항공 사진, 1970~1990년대 북한 사진들도 함께 볼 수 있다.

‘카드놀이’ (중국, 1983). [사진 학고재갤러리]

‘카드놀이’ (중국, 1983). [사진 학고재갤러리]

◆“모든 사람이 드라마를 품고 있다”=그는 “모든 사람은 각자 자신의 위대한 드라마를 갖고 있다. 사람들은 그것을 스스로 의식하지 못하거나 표현할 방법이 없을 뿐”이라고 했다. 평범한 사람들의 그런 드라마를 발견해 일순간에 렌즈에 담는 것, 그것이 자기 일이라는 것이다.

“내 나이가 곧 만 79세”라고 밝힌 그는 “세상은 여전히 흥미로운 것으로 넘치고, 아름다운 것은 어디에나 있다”고 했다. “부모님이 원하던 대로 대기업에 입사했다면 아마도 저는 아주 오래전에 은퇴하고 말았겠죠? 하지만 저는 지금도 현역이에요.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이 그랬어요. 사진작가는 셔터 누를 힘만 있으면 일할 수 있다고….” 카메라를 손에 쥔 그가 해맑게 웃었다.

학고재갤러리와 (주)유로포토·매그넘한국에이전트가 공동 기획한 이번 전시는 4월 22일까지 계속된다.

◆매그넘(Magnum)

1947년 로버트 카파,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 등이 ‘세상을 있는 그대로 기록한다’는 기치를 내걸고 창립한 사진가 그룹. 정식 명칭은 매그넘 포토스(Magnum Photos)이다. 회원은 정회원·준회원·후보회원 등으로 구분되며, 70여 명이 활동하고 있다. 일본인 정회원으로는 구보타 히로지가 유일하며, 한국인 정회원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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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주 기자 jule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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