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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8세 매그넘 작가 "사진에 집착한 50년, 난 지금도 가슴이 뛴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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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보타 히로지, 불교 성지 황금바위, 짜익티요, 미얀마, 1978, 다이-트랜스퍼, 14 9/16x21 3/4 inch. 금박을 입힌 바위 앞에서 수도승들이 기도를 하고 있다. 이 사진을 찍은 것을 계기로 구보타 히로지는 흑백 사진에 대한 고집에서 벗어나 컬러 사진을 적극 찍기 시작했다고 한다. [사진 학고재갤러리]

구보타 히로지, 불교 성지 황금바위, 짜익티요, 미얀마, 1978, 다이-트랜스퍼, 14 9/16x21 3/4 inch. 금박을 입힌 바위 앞에서 수도승들이 기도를 하고 있다. 이 사진을 찍은 것을 계기로 구보타 히로지는 흑백 사진에 대한 고집에서 벗어나 컬러 사진을 적극 찍기 시작했다고 한다. [사진 학고재갤러리]

색바랜 청바지에 운동화, 진회색 스웨터 위에 걸친 검정 조끼. 검은색의 낡은 카메라 가방을 메고 그는 전시장에 서 있었다. 금방이라도 카메라를 꺼내어 셔터를 누를 만반의 준비가 된  차림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그는 곧 가방에서 작은 후지 카메라를 꺼내어 전시를 취재하러 온 기자들을 찍기 시작했다. 그리고 소년처럼 해맑은 표정으로 웃으며 유창한 영어로 인사를 건넸다. "제가 구보타 히로지입니다."  그가 바로 서울 소격동 학고재갤러리에서 열리고 있는 사진전 '구보타 히로지, 아시아를 사랑한 매그넘 작가'의 주인공이었다.

학고재, 구보타 히로지 회고전 # 50여 년 활동 보여주는 총 109점 #

 구보타 히로지, 카드놀이, 광저우, 광둥, 중국 Card playing, Guangzhou, Guangdong, CHINA, 1983.

구보타 히로지, 카드놀이, 광저우, 광둥, 중국 Card playing, Guangzhou, Guangdong, CHINA, 1983.

구보타 히로지는 세계적 사진가 그룹인 '매그넘'(Magnum)의 대표적인 사진작가 중 한 사람이자 일본 유일의 매그넘 작가이다. 학고재 본관과 신관에 걸쳐 열리는 이번 전시는 한국에서 열리는 그의 첫 개인전이다. 다큐멘터리 사진작가 히로지의 작품 활동 50년을 아우르는 자리로, 그의 작품 총 109점을 한자리에서 보여준다.

1988년, 2008년 단체전을 통해 그의 작품이 국내에 전시된 적은 있지만,  그의 방대한 작품 세계 전반을 이같은 규모로 풀어놓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1960년대부터 최근까지 세계 각지를 누비며 촬영한 사진을  '초기 작업' '세계여행' '컬러의 세계' '중국' '한국&북한' '미국&일본' 등 6개의 주제로 나눠 소개한다.

그가 20대부터 "호기심에 홀리고" "사진에 미쳐" 고국인 일본을 떠나 유목민처럼 지구촌을 돌아다니며 포착한 다채로운 문화권 풍경이 갤러리 곳곳을 채우고 있다.

구보타 히로지, 히피, 캘리포니아 남부, 미국, 1971, 플래티넘 프린트. 14x20cm. 구보타 히로지는 60년대 중반부터 70년대 중반까지 미국과 일본의 사회적, 문화적 주제를 집중해 다뤘다. [사진 학고재갤러리]

구보타 히로지, 히피, 캘리포니아 남부, 미국, 1971, 플래티넘 프린트. 14x20cm. 구보타 히로지는 60년대 중반부터 70년대 중반까지 미국과 일본의 사회적, 문화적 주제를 집중해 다뤘다. [사진 학고재갤러리]

"사진은 내 생애의 가장 큰 집착"

"제게 사진이라는 것은 하나의 집착(obsession)이었습니다. 매일 셔터를 눌러야 안심이 되었으니까요. 사진을 찍지 않으면 내 몸이 쓸모없는 쓰레기 덩어리처럼 느껴질 정도예요. 그런 제가 정상이 아니라 해도 할 말이 없습니다. 그래서 '집착'이랄 수밖에요. " 그는 이렇게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했다.

1939년 도쿄의 유복한 가정에서 차남으로 자란 히로지씨는 와세다대 정치학과 출신.  "부모님은 내가 대기업 사원이 되기를 바랐다. 나도 그렇게 되는 게 효도인 줄 알고 자랐다"는 그는  "그러나 대학 졸업 전인 61년 일본에 촬영론 매그넘 작가 하마야 히로시(1915~1999)를 만나며 내 인생의 방향이 바뀌었다"고 말했다. 당시 학생운동을 촬영하던 히로시의 조수 역할을 했던 그는, 히로시를 통해 또 다른 매그넘 작가 엘리엇 어윗 등을 만나며 미국 유학을 결심한다.

구보타 히로지, 뉴욕, 미국 New York City, U.S.A., 1992, 다이-트랜스퍼. [사진 학고재갤러리]

구보타 히로지, 뉴욕, 미국 New York City, U.S.A., 1992, 다이-트랜스퍼. [사진 학고재갤러리]

"저는 그 전에 미술을 배운 적도, 사진을 배운 적도 없었어요. 암실에 들어가 본 적도 없었고요. 그런데도 나도 사진을 찍고 싶다는 열망에 사로잡혔죠."  62년 미국으로 건너간 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닥치는 대로 다 했다. 새벽 4시부터 밤 11시까지 일했다"는 그는  3년 뒤인 65년 매그넘 작가가 되었다. "내가 재능 있는지, 없는지 알 수도 없었고, 내가 직접 확인할 수도 없었다. 사진을 찍고 싶었고, 찍는 게 좋아서 했을 뿐이었다."

지구촌을 떠돈 역사의 기록자

60년대와 70년대 중반 이전까지 그는 주로 미국과 일본을 찍는 데 집중했다.  60년대 마틴 루터 킹 목사가 이끄는 흑인민권 운동의 현장을 찍었고, 캘리포니아 남부에서 히피들을 직접 만났다. 75년엔 매그넘 의뢰로 베트남 사이공 함락을 다룬 사진을 찍은 이후 그는 시선을 한국과 중국, 미얀마, 인도네시아, 티베트 등 아시아 국가로 돌렸다.

중국 문화대혁명 이후 1970년대 후반부터 80년대 중반까지 45개가 넘는 중국 지방을 일주하며 위구르족, 몽골족, 후이족 등을 촬영했다. 당시 사회 풍경과 일상생활을 있는 그대로 35mm 렌즈 안에 담백하게 건져 올린 작업은 의미 있는 역사의 기록으로 주목받고 있다.

구보타 히로지, 백두산, 북한, 1987, 피그먼트 프린트, 57 1/16x18 3/4 inch.

구보타 히로지, 백두산, 북한, 1987, 피그먼트 프린트, 57 1/16x18 3/4 inch.

그가 한국을 처음 찾은 것은 66년, 북한을 처음 방문한 것은 78년의 일이다. 사진을 찍기 위해 북한의 엄격한 규율을 잘 지킨 그는 북한 정부의 신뢰를 얻어 북한 전역을 돌아다니며 북한 사회의 모습을 다양하게 기록했다.
이번 전시에서는 백두산, 금강산, 설악산 등 남북의 명산 풍경과 2007년 서울 한강 주변의 항공 사진, 1970~1990년대 북한 사진들도 함께 볼 수 있다.

구보타 히로지, 만달레이 언덕 앞 소년과 소녀, 미안먀, 1978, 다이-트랜스퍼, 21 15/16x14 3/4 inch. 다이-트랜스퍼 기법으로 프린트한 사진은 자연스러운 색채를 구현해낸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이름을 알 수 없는 아이들의 모습이 찍힌 이 사진은 "모든 사람에겐 각자의 위대한 드라마가 있다"는 작가의 말을 떠오르게 한다.

구보타 히로지, 만달레이 언덕 앞 소년과 소녀, 미안먀, 1978, 다이-트랜스퍼, 21 15/16x14 3/4 inch. 다이-트랜스퍼 기법으로 프린트한 사진은 자연스러운 색채를 구현해낸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이름을 알 수 없는 아이들의 모습이 찍힌 이 사진은 "모든 사람에겐 각자의 위대한 드라마가 있다"는 작가의 말을 떠오르게 한다.

"모든 사람이 드라마를 품고 있다"

"모든 사람은 각자 자신의 드라마를 갖고 있어요. 사람들은 그것을 스스로 의식하지 못하거나 표현할 방법이 없을 뿐입니다. 평범한 사람들의 그런 드라마를 일순간에 렌즈에 담는 것, 그게 사진작가가 하는 일이죠." 이렇게 말하는 그는 "그래서 난  '셀럽'(celebrity·유명인사)을 찍는 일에 흥미가 없다"고 말했다.

이번 전시에서는 흑백을 고집하던 그가 컬러 사진으로 찍기 시작한  변화도 엿볼 수 있다. 미얀마의 황금바위 앞에서 기도하는 승려를 촬영한 '불교 성지 황금바위, 짜익티요, 미얀마'(1978)다. 이 사진을 포함해 70년대 후반 '다이-트랜스퍼' (dye-transfer)기술로 프린트한 그의 사진도 볼 수 있다. 색채 사진을 인화할 때 염료를 전염지 위에 순차적으로 겹쳐 인화를 마무리하는 기법이다. 보통 다이-트랜스퍼는 3색으로 이뤄지지만 8색으로 프린트하기 위해 엘리엇 어윗의 소개로 독일 함부르크의 장인 니노 몬데(Nino Mohnde)를 열세 번이나 찾아갔다고 했다. 그에 따르면 다이 트랜스퍼는 화려하기보다는 자연스러운 색을 구현하는데 탁월하다는 것. 중립적인 시선을 유지하면서도 표현에서는 회화적이면서도, 작가의 개입이 절대 과해 보이지 않는 그의 사진의 특징을 엿볼 수 있다.

'구보타 히로지, 아시아를 사랑한 매그넘 작가' 전시가 열리는 서울 소격동 학고재 갤러리의 구보타 히로지(78). 그는 "지난 50년 동안 나를 가슴 뛰게 한 호기심이 나를 여기까지 이끌었다"고 말했다. [사진 학고재갤러리]

'구보타 히로지, 아시아를 사랑한 매그넘 작가' 전시가 열리는 서울 소격동 학고재 갤러리의 구보타 히로지(78). 그는 "지난 50년 동안 나를 가슴 뛰게 한 호기심이 나를 여기까지 이끌었다"고 말했다. [사진 학고재갤러리]

 나를 이끈 것은 호기심 

 그는 인터뷰 말미에 "내 나이가 올해 만으로 78세, 곧 79세가 된다"고 강조했다. 그런데도 "세상은 여전히 흥미로운 것으로 넘치고, 아름다운 것은 어디에나 있다"고 했다. 그를 가슴 뛰게 하는 것들이다.  "부모님이 원하던 대로 대기업 직원이 됐다면 내가 아주 오래전에 은퇴하지 않았겠냐"고 반문하는 그는 "지금도 나는 하고 싶은 일이 많다. 지난 50년간 내가 그토록 하고 싶은 일을 즐기면서 한 것, 그게 내 인생 최고의 사치였다고 생각한다"며 웃었다.

학고재와 (주)유로포토/매그넘한국에이전트가 함께 여는 이번 전시는 4월 22일까지 계속된다.

이은주 기자 jule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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