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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딧불이 하나가 백두산 밝힐 수 없지만 …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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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5호 32면

중앙일보와 교보문고가 최근 출간된 신간 중 세 권의 책을 ‘마이 베스트’로 선정했습니다. 콘텐트 완성도와 사회적 영향력, 판매 부수 등을 두루 고려해 뽑은 ‘이달의 추천 도서’입니다. 중앙일보 출판팀과 교보문고 북마스터·MD 23명이 선정 작업에 참여했습니다.

남아 있는 시간을 위하여

남아 있는 시간을 위하여

남아 있는 시간을 위하여
김형석 지음
김영사

99세 철학자 김형석의 노년 설명서 #무한우주 속에서 곧 소멸될 우리들 #그럼에도 사랑하는 이가 있어 행복 #붉게 지는 서산의 태양도 장엄하다

“나는 오십 대 중반까지는 주어진 일 때문에 세월이나 시간에 대해 자기반성은 갖지 못했다 (…) 오십 대 중반을 넘기면서부터는 앞으로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를 묻기 시작했다. 건강 문제는 어떻게 대처해야 하며 앞으로 얼마나 더 지금과 같이 일할 수 있을까를 예측해보기 시작했다 (…) 그러다가 육십오 세가 되었다.”

인생 100세 시대임을 실존(實存)으로써 증명해 보이는 철학자 김형석(연세대 명예교수) 선생의 최근 산문집이다. 선생은 인용한 구절의 65세에서 서른네 해를 더 살고 있다. 선생을 우리의 살아있는 미래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선생보다 오래 산 사람을 꼽는 건 어렵지 않겠지만 현재의 의학 수준으로 도달하기 어려운 희귀한 인생의 시간대를, 그 시간들의 내면과 통찰을 선생만큼 적극적으로 알렸던 경우는 없었던 것 같다. 글로, 대중 강연으로 말이다.

1920년 평안남도 운산 출생. 일본 조치(上智)대 유학. 탈북과 피난. 85년 연세대 철학과 정년 퇴임. 선생의 연륜과 시각에서 바라보는 인생은 어떤 것일까. 의미는 무얼까. 어떻게 살아야 한다는 걸까.

올해 99세인 연세대 철학과 김형석 명예교수. 글쓰고 강연하며 누구보다 건강한 삶을 살고 있다. [중앙포토]

올해 99세인 연세대 철학과 김형석 명예교수. 글쓰고 강연하며 누구보다 건강한 삶을 살고 있다. [중앙포토]

뭔가 달통한 대답이 나올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우선 선생의 현실 인식은 가차 없다. “무한의 우주 속에 할딱이는 육체, 끝없는 시간 위의 한순간을 차지하고 있는 내 생명, 가없는 암흑을 상대로 곧 소멸되어버릴 한 찰나의 가느다란 불티 같은 내 의식”(129쪽). 이런 구차함이 인간의 실체라는 것이다. 그런 인간이 우주의 무한 암흑을 밝혀보려 한들, 백두산 모퉁이를 나는 반딧불이 한 마리가 산 전체를 밝혀보겠다는 것만큼이나 어처구니없는 일이라는 얘기다. 더구나 선생의 시간은 하루로 치면 서산의 태양 빛 장엄한 해 질 녘, 이제 남은 건 세월이 아니라 시간 단위라는 느낌이 자연스러운 때다.

그런데도 누군가 그래서 힘드냐고 묻는다면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어 행복합니다”라고 답하겠다고 선생은 다짐한다. 선(善)을 추구하는 의지, 사랑과 아름다움을 염원하는 마음으로 남아 있는 시간 동안 행복을 찾아 누리려는 신념과 용기를 가져야 한다고 강조한다. 선생 자신은 물론 언젠가 선생의 시간에 이르게 될 인생 후배들을 위한 메시지다. 소멸의 공포와 인생 긍정 사이의 커다란 낙폭을, 세상의 이치와 종교에 대한 생각, 아끼는 이들을 잃은 상실감에 대한 글들로 채운다.

선생은 동갑내기 ‘철학 삼총사’ 안병욱(2013년 작고)·김태길(2009년 작고) 교수와 함께 1960~70년대 베스트셀러 작가로 사랑받았다. 철학 교수들의 뼈 있는 에세이가 잘 팔리던, 지금은 찾아볼 수 없는 진풍경이다. 산문집의 4부 격인 ‘조금, 오래된 이야기들’ 안에 실린 옛글들이 여전히 재미있다. 그중 ‘오이김치와 변증론’이 압권이다. 실존주의 철학자 키르케고르, 독일 관념론의 대가 헤겔, 자본론으로 인류 역사의 물꼬를 바꾼 마르크스의 변증법을 철학 교수답게 깔끔하게 비교한 다음 한국인의 어쩔 수 없는 김치 사랑을 대비시켰다. 고담준론도 식사 후에, 철학도 김치 철학 같은 주체성 있는 철학이 필요하다고 글을 맺는다. ‘양복 이야기’에서는 의과대학 연극부원들이 18세기가 배경인 작품의 무대 의상으로 자신의 양복을 빌려갔다는 일화를 소개한다. 선생이 그만큼 시대에 뒤떨어진 양복을 입고 다녔다는 얘기다.

모범답안처럼 반듯한 주장도 많지만, 사람들이 잘 알지 못하던 시간대를 날마다 새롭게 전하는 노학자의 노년 사용설명서다.

신준봉 기자 infor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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