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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취재일기

‘태움 금지’ 배지에 담긴 뜻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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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홍상지 기자 중앙일보 기자
홍상지 사회부 기자

홍상지 사회부 기자

13일 오후 신촌 세브란스병원 복도를 바삐 움직이는 간호사들의 왼쪽 가슴에는 둥근 배지가 달려 있었다. 배지마다 ‘반말 금지’ ‘태움 금지’ ‘귀한 자식’ 등의 문구가 적혀 있었다. 세브란스병원 노동조합이 간호사들에게 배포한 ‘태움 반대’ 배지였다.

‘반말 금지’ 배지를 단 6년 차 간호사 한모(27)씨는 “일이 바빠 신경이 예민할 때는 동료들 사이에서 오가는 말도 날카로워질 수 있다. 그럴 때마다 ‘쌤, 반말하면 안 되는데~’라며 배지를 내밀면 금세 분위기가 바뀐다”고 들려줬다. 노조는 지금까지 약 1200개의 배지를 병원 구내식당 앞에서 간호사들에게 나눠줬다.

‘태움’은 영혼이 재가 되도록 태운다는 데서 나온 은어다. 선배 간호사의 신규 간호사 교육 과정에서 벌어지는 간호사 집단 내 괴롭힘을 뜻한다. 이 ‘악습’은 지난달 15일 숨진 고 박선욱 서울아산병원 간호사 사건 이후 더 논란이 됐다. 유족과 지인들은 박 간호사의 죽음이 직장 내 ‘태움’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지난 3일 서울 도심에서는 태움 문화 개선 촉구 집회까지 열렸다.

서울 신촌 세브란스병원 노동조합이 제작해 간호사들에게 배포한 태움 방지 배지. [김정연 기자]

서울 신촌 세브란스병원 노동조합이 제작해 간호사들에게 배포한 태움 방지 배지. [김정연 기자]

이런 상황에서 세브란스병원 간호사들의 태움 반대 배지가 주는 울림은 작지 않다. 간호사들 스스로 반성하고 행동에 나선 게 이번이 사실상 처음이라서다. 태움은 일부 나쁜 간호사들의 일탈 행위만은 아니다. 살인적인 업무 강도와 누적된 피로, 긴장감, 권위적인 위계질서에 파묻혀 ‘나 때는 더 심했으니까’ ‘원래 그랬으니까’라며 알고도 묵인해 온 관습이었다.

배지의 문구는 ‘반말 금지’ ‘인격모독 금지’ 순으로 인기라고 한다. 인간관계의 기본을 지키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의미로 읽힌다. ‘동료 직원들을 존중하자’는 당연한 얘기가 왜 많은 이의 희생이 있고 나서야 들리기 시작한 것일까.

간호학도들이 실습 나가기 전 맹세하는 나이팅게일 선서에는 ‘나는 인간의 생명에 해로운 일은 어떤 상황에서도 하지 않겠다’라는 구절이 있다. 그럼에도 ‘태움’은 여전히 병원 어디선가 벌어지고 있다. 지난달 대한간호협회의 ‘간호사 인권침해 실태조사’ 결과에 따르면 간호사의 69.5%가 근로기준법 위반에 따른 ‘인권침해를 당했다’고 답했다. 태움 피해를 경험했다고 답한 이들도 40.9%에 달했다. 간호사 집단의 내부 성찰을 보여준 태움 반대 배지가 전국의 병원으로 확대되고, 이들의 열악한 근무 환경을 개선하는 대책 마련으로까지 이어지길 바란다. 태움 문화 자체가 불태워져야 한다.

홍상지 사회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