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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최상연의 시시각각

말을 아낄 때가 아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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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최상연
최상연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최상연 논설위원

최상연 논설위원

한국 정치는 요술 주머니다. 이슈가 만들어질 땐 시비가 분명한데도 정치판으로만 가면 뭐가 뭔지 흐릿해진다. 모든 현안에 예외가 없다. 패를 갈라 서로 삿대질하는 외길이다. 남는 건 진영 논리와 막말의 난장판이다. 정치가 애당초 그런 건지도 모를 일이긴 하다. 독일 정치학자 카를 슈미트는 “도덕은 선악, 예술은 미추, 경제는 손익 구별이 목표이듯이 정치적인 것의 본질은 적과 동지의 구별”이라고 했다. 적이 사라지면 또 다른 적을 만들어 내는 과정을 정치로 봤다. 미투 운동이 지금 그 길로 접어들었다.

정치보복 주장만으론 설득력 약해 #보수미래 헤아리는 메시지 나와야

공교롭게도 지금까지 미투 운동은 진보 진영 인사들에게 집중됐다. 차기 대선 유력 주자이던 안희정 전 충남지사까지 퇴장시켰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미투마저 네 편, 내 편으로 갈라 음모론이라면 딱하고 서글픈 일이다. 문재인 정부와 진보 지지자들을 분열시키려는 의도가 있다는 게 김어준씨 주장인데, 그렇다면 성추행 내지 성폭행 가해자로 지목된 인사들은 정치 공작의 희생양이란 뜻이다. 물론 김씨가 정말로 그렇게 믿는다고 생각하진 않지만.

그래도 ‘역시 김어준스럽다’고 웃고 넘어갈 일만도 아니다. 김씨를 비판했던 여당 의원은 같은 진영 내에서 ‘돌림빵’을 당했다. 청와대 홈페이지에서 이 문제로 갑론을박이 이어지더니 여권 지지자들 사이에선 ‘6월 지방선거를 위한 치밀한 음모’란 공작설이 확산되고 있다. 결론적으론 보수 탓이란 건데 어이가 없긴 하다. 특정 세력이 개입하면 없던 일을 만들어 내거나 일어난 일에도 제동을 걸 수 있다고들 믿는 모양이다.

딱하고 안타까운 건 이명박 전 대통령이 비슷한 느낌을 만든다는 것이다. 검찰청 포토라인에 선 그는 “하고 싶은 얘기가 많지만 말을 아끼겠다”고 했다. 하고 싶은 얘기란 ‘노무현 전 대통령의 죽음에 대한 정치 보복’이란 주장일 거다. 적과 동지가 분명해 낯 가리는 거론 결코 남에게 뒤떨어지지 않는다는 평가를 받는 친노, 친문이다. 오로지 그 배타성 때문에 적폐로 몰렸다는 얘기였을 것이다.

그런 측면이 없다고 하는 건 거짓말이다. 이 전 대통령에 대한 수사는 혐의가 나온 뒤 시작된 게 아니다. 먼저 표적으로 삼고 반년 넘게 탈탈 털어댔다. 자원 외교나 4대 강 사업은 박근혜 정권 때도 여러 차례 감사원 감사와 수사가 있었다. 국정원과 기무사의 정치 댓글 사건도 똑같은 검찰이 의욕을 갖고 덤볐지만 그에게 뚜렷이 책임을 물을 만한 게 없었다. 그래도 국세청 세무조사→주변 털기→망신주기로 가더니 확대됐다. 문명국가라면 일반인에게도 이래선 안 된다. 그 정도 털면 누구라도 걸린다.

문제는 이 와중에 ‘정치 보복’ 주장만으론 넘어갈 수 없는 혐의가 꽤 추가됐다는 거다. 이 전 대통령은 무엇이 왜 사실이 아닌 건지 떳떳하게 해명해야 한다. 그래야 의심이 사라진다. 정치 보복만 외치는 건 김어준이 미투를 바라보는 방식이다. ‘우리도 노무현 정권 시절 일들을 알 만큼 안다’고 흘리는 건 협박이다. 안다면 털어놓는 게 당당한 길이다. 더구나 이 전 대통령은 일반 피의자가 아니라 전직 대통령이다. 한국 정치의 품위가 걸려 있다. 지지자의 자존심도 있다.

10년 전 노무현 전 대통령은 자신의 실패가 진보의 실패로 될 것을 걱정했다. ‘여러분은 저를 버리셔야 합니다’라고 외쳤다. 하지만 두 전직 보수 대통령에게선 보수의 미래를 더 걱정하는 메시지를 듣지 못한다. 박 전 대통령은 탄핵 과정에서 몇 번이나 실기하더니 결국 정치보복 주장에만 매달렸다. 이 전 대통령도 같은 길로 방향을 잡는 모양새다. 그래선 궤멸 상태의 보수를 살릴 수 없다. 지금은 말을 아낄 때가 아니다.

최상연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