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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석의 Mr. 밀리터리] 리비아 원샷 비핵화 … 미 CIA 국장과 영 MI6 국장 개입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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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북한 비핵화의 핵심은 진정성과 핵·미사일 정보 확인이다. 첫 돌다리를 놓기 위해선 정보당국의 역할이 중요하다. 남북(4월 말)-북·미(5월) 정상회담까진 시간이 촉박하다. 연쇄 회담이 깨지면 파국이다. 무력 충돌도 배제할 수 없다. 그래서 서훈 국정원장과 북한 김영철 통전부장이 뛰었다. 미국은 렉스 틸러슨 국무장관을 경질하고 후임에 마이크 폼페오 중앙정보국장(CIA)을 지명했다. 과거 리비아 핵폐기 때도 정보당국이 움직였다.

북 비핵화도 ‘원샷방식’ 밟아 나가야 #북한 의지와 핵·미사일 정보 중요 #리비아, 미 이라크 침공에 위협 #북, 한·미 공군훈련에 놀라 #리비아+우크라이나 비핵화 활용 #이번도 파행되면 전쟁 배제 못해

2003년 3월 20일. 미국이 이라크 전쟁을 시작한 날이었다. 워싱턴 외곽에 있는 덜레스 국제공항으로 중요 인사가 입국했다. 영국 비밀정보국 MI6의 선임 정보요원이었다. 그는 다음날 조지 테넷 CIA 국장을 만났다. 그의 손에는 리비아 정보국장인 무사 쿠사의 메시지가 들려있었다. 1988년 미 팬암기 폭파사건(로커비 사건)에 대한 책임을 인정하면서 핵 개발 포기를 타진하는 내용이었다. 리비아는 영국 정보기관을 통해 미국에 노크한 것이다. 당시 무하마드 가다피 리비아 대통령이 미국의 아프간 침공에 이은 이라크 전쟁 감행에 큰 위협을 느꼈기 때문이다. 최근 북한도 한·미가 스텔스 전투기 등 230여대의 전투기를 동원한 지난해 ‘비질런트 에이스’훈련을 보고 공포감을 느꼈다고 한다. 지난해 11월 평양에서 북한 외무성 관계자를 만난 러시아 사이언스 아카데미의 알렉산더 보론트소브 교수의 전언이다.(38 North, 2018.1.19)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테넷 국장은 닷새 후 미 대통령 별장인 캠프 데이비드에 갔다. 조지 부시 미 대통령과 토니 블레어 영국 총리가 그곳에서 이라크의 미래를 의논하고 있었다. MI6 수장인 리처드 디어러브 경과 콘돌리자 라이스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도 배석했다. 이 자리에서 리비아의 비핵화 진의를 파악하기로 했다. 리비아 핵 폐기에 미·영 정보당국이 깊숙이 끼어든 계기다. 이 일이 있은 지 한 달 뒤 리비아의 쿠사 국장은 미·영 정보당국자와 만난 자리에서 “핵 프로그램을 포기하겠으니 미국과 영국이 보장해달라”고 했다. 이에 CIA 2인자였던 스티브 카페즈는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의 사례인 “검증을 조건한 신뢰”를 제시했다는 것이다. 카페즈가 워싱턴으로 복귀해 미 대통령 집무실인 백악관 오벌 오피스에서 접촉 결과를 보고하자 부시 대통령은 “리비아가 국제사회로 복귀하려면 완전하고 검증 가능한 비핵화가 이뤄져야 한다”고 말했다고 한다. 리비아의 핵폐기 비밀협상 과정을 정리한 하버드대 케네디스쿨 벨프센터의 비확산 전문가 윌리엄 토비 선임연구원의 얘기다.(‘Studies in Intelligence’ 2017.12호)

이후 리비아의 비핵화 추진은 일사천리로 이뤄졌다. 리비아는 같은 해 12월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 대통령이 체포되자 핵무기를 비롯한 모든 대량살상무기 개발 포기를 선언했다. 또한 국제기구의 즉각적이고 포괄적인 사찰을 허용하겠다고 했다. 청와대가 북한의 비핵화를 고르디우스 매듭을 끊듯이 일괄타결 방식으로 추진한다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단계적 접근이 아닌 ‘원샷 해법’이다. 고르디우스 매듭은 고대 알렉산더 대왕이 전차에 얽히고설킨 매듭을 단칼에 끊어버린 일화다.

토비 선임연구원에 따르면 리비아의 핵폐기 초기 협상에서 CIA와 MI6 가 개입한 이유는 리비아의 비핵화 진의 확인과 비밀 유지 때문이었다. 진의 확인을 위해선 정보가 필요했고 혹시라도 협상 내용이 새나가면 정보기관끼리 부인하면 그만이었다. 트럼프 대통령이 틸러슨 장관 후임에 CIA 국장을 지명한 것도 과거 리비아와의 협상 경험과 무관치 않아 보인다. 미국은 지난해 CIA에 신설한 코리아임무센터(KMC)의 대북정보를 적극 활용하기 위해선 당분간 CIA 국장 출신이 편리할 수 있다. KMC는 CIA 요원 외에도 미 국방정보국(DIA), 백악관 국가안보회의(NSC), 재무부 금융제재 전문가 등으로 구성돼 있다. 여기에다 지난해 복원된 주한미군의 인간정보(휴민트·HUMINT)부대인 524정보대대가 역할을 할 전망이다.

미국과 리비아가 합의한 핵폐기 협상은 ‘선(先)이행 후(後)보상’ 개념에 따라 3단계로 진행됐다. 완전 검증 가능하고 되돌릴 수 없도록 폐기하는 CVID방식이 적용됐다. 1단계는 2004년 1월까지 리비아가 포괄적핵실험금지조약(CTBT)에 가입하고 핵무기 설계정보와 핵무기 및 미사일 프로그램과 관련된 주요 장비·문서를 미국에 전달하는 것이었다. 2단계는 그해 9월까지 이뤄졌는데 리비아의 핵무기 개발과 화학무기에 대해 국제기구의 사찰을 받고 폐기했다. 또 우라늄 농축용 원심분리기 등 대량살상무기 관련된 장비 1000t을 미국으로 반출했다. 3단계로 핵무기 프로그램을 완전히 폐기했다. 이 모든 과정이 2004년 1월∼2005년 10월까지 완료됐다. 미국은 리비아의 대량살상무기 폐기의 대가로 먼저 리비아에 연락사무소를 설치하고 경제제재를 공식 해제했다. 2006년엔 리비아의 미국 연락사무소를 대사관으로 승격시켰다. 리비아는 원자력을 평화적으로 이용하기 위해 러시아의 저농축 우라늄을 제공받기도 했다.

리비아의 비핵화 과정은 북한 비핵화를 위한 6자회담의 2007년 2.13 합의와 핵심내용이 유사하다. 6개의 핵무기를 폐기한 남아공과, 보유 중이던 모든 핵무기와 핵물질을 러시아에 반환한 우크라이나의 비핵화 과정은 리비아보다 단순했다. 그러나 이미 핵실험을 마치고 핵무기를 생산 중이거나 생산한 북한은 상대적으로 더 복잡하다. 따라서 북한의 비핵화는 ‘리비아+우크라이나’ 방식이 될 가능성이 있다. 북한을 완전하게 비핵화하려면 리비아처럼 북한의 핵시설을 모두 투명하게 공개하고 검증과정을 거쳐 폐기하는 것이다. 또 우크라이나와 같이 북한이 보유한 핵무기와 핵물질을 모두 미국 등으로 보내는 것도 병행돼야 한다. 문제는 이 모든 것이 짧은 시간에 한꺼번에 타결되고 행동이 이뤄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북한에 그만한 대가를 치를 수밖에 없다. 북한이 핵개발에 들인 비용 일부를 보상해주고 리비아처럼 원전에 필요한 핵연료 제공도 검토할 수 있다. 또한 우크라이나가 요구했던 체제와 안전 보장을 북한에도 적용할 필요가 있다. 김영삼 정부 때 추진했던 남북이 합의하고 미·중이 보증하는 ‘2+2’방식 또는 6자회담 당사국이 동의하는 등의 방식도 가능하다. 미국은 리비아와 우크라이나의 비핵화 과정을 경험해본 만큼 북한에도 같은 형태의 CVID를 요구할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북한이 이를 거부하고 또다시 파행으로 갈 경우엔 대북 군사제재가 불가피하다. 세종연구소 조사(박지광 연구위원)에 따르면 현재 미국민들의 대북 선제공격 지지율은 10% 이하지만 종국에는 전쟁도 할 수 있다는 생각이 대다수라고 한다.

김민석 군사안보연구소장 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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