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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중앙시평

민주공화국을 위한 개헌 II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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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박명림 연세대 교수·정치학

박명림 연세대 교수·정치학

헌법 개혁은 정말 필요한가? 개헌의 압도적 필요성은 민주화 이후 한국 사회의 모습 자체로부터 나온다. 헌법은 국가의 근본 제도를 함께 만들어 삶과 나라를 안정시키는 데 목적이 있다. 갈등의 제도화를 통한 인간과 국가의 평안이 본령인 것이다. 나라의 안정 없는 삶의 안온은 불가능하다.

제왕적 대통령의 권한 축소해야 #전 국민의 자발적 동의에 의해 #헌법 확립하는 건 하나의 경이 #지금 국민과 국회와 대통령의 #‘전율하는 열망들’이 반드시 만나 #경이로운 ‘자발적 동의’ 이뤄내자

그러나 한국은 현행 헌법의 실시 이후에도 갈등이 결코 줄어들지 않고 있다. 국제 비교에 따르면 민주화 이후에도 한국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최고 수준의 갈등을 놓친 적이 없다. 대통령과 의회라는 제도 영역뿐만 아니라, 거리의 시위를 포함한 사회 갈등 역시 마찬가지다. 현행 헌법이 안내하는 한국의 민주주의와 갈등 해소는 비례관계가 형성되지 않고 있다. 헌법제도의 제일 본령은 실현되지 않고 있다. 즉 현행 헌법의 국가 제도로는 한국 사회의 갈등을 수렴해 안정적인 인간 삶과 나라 틀을 정초할 수가 없다.

게다가 민주공화국에서는 유례없게도 민주화 이후에도 한국에서는 모든 대통령의 ‘헌법정치’가 끊이질 않았다. ‘헌법정치’는 ‘정상 정치’가 작동하지 않을 때 등장하는, 즉 헌법 자체를 문제 삼거나 헌법으로부터 파생되는 정치 현상을 말한다. 개헌 약속(노태우·김영삼·김대중), 탄핵 소추·연정 시도·개헌 제안·탄핵과 파면·개헌 공약(노무현·이명박·박근혜·문재인) 등 현행 헌법 아래에서 ‘모든’ 대통령은 헌법정치에 직접 연루되었다. 예외는 없었다. 헌법정치의 고질적 불안정성을 넘지 않고는 안정적 정상 정치가 불가능했던 것이다.

특히 대통령과 국회, 대통령[현재 권력]과 집권당 대선 후보[미래 권력], 집권당과 반대당의 3중 갈등은 모든 대통령을 제왕에서 식물로, 만기친람에서 고립무원으로 추락시킨다. 만성적 헌법정치와 고도의 제도 갈등으로 인해 필수적인 민주공화 의제의 해결은 실패를 반복할 수밖에 없다. 핵심 원인은 대통령과 국회의원 선거에서 나타나는 ①국민 의사(득표)와 ②의석 분포와 ③권력 배분의 심각한 불비례에서 파생된다. 즉 대통령과 국회 권력의 비례성 보장이 갈등 완화와 문제 해결의 지름길이다.

박명림칼럼

박명림칼럼

최근의 헌법정치에서 특히 주목할 점은 집권 세력일 때는 개헌을 적극 추진하다가 반대 세력일 때는 개헌을 반대하거나 소극적으로 돌변한다는 점이다. 역시 예외는 없었다. 권력을 장악했을 때 자신들의 의사를 국가 헌법 체계에 더욱 많이 반영하려 시도하기 때문이다. 이 반복 현상이 문제의 본질이다. 요컨대 집권 이전에 주장하던 헌법 내용으로 타협하면 된다. 이 단순한 지혜가 개헌 성공의 요체 중 요체다.

그것은 제왕적 대통령제의 폐지로 압축된다. 한국의 현행 헌법은 대통령과 그가 임명한 고위 관료들이 통치하는 ‘대통령의 통치(rule of the president)’이지, 민주공화국 헌법이 보장하는 ‘대통령제의 통치(rule of the presidency)’가 아니다. 형식은 법치이나 내용은 인치(人治)다. 따라서 최고·최선의 대통령을 만나지 않으면 헌법 실패-대통령 실패는 불문가지다. 그러나 민주공화주의 최고의 지혜처럼 “썩은 물고기를 솎아내는 것은 쉽다. 문제는 물고기가 썩지 않는 연못을 만드는 것이다.” 썩은 물고기가 생기지 않는 연못의 축조야말로 민주공화국의 최고 원리였다.

문재인 대통령은 대선 공약과 국회 개헌특위 연설을 통해 ‘제왕적 대통령의 절대적 권한 조정’을 반복 약속한 바 있다. 문제의 핵심이다. 그의 개헌 약속이 지켜지면 우리는 비로소 헌법 실패-대통령 실패의 오랜 굴레에서 벗어날 것이다.

문제의 출발은 우리 헌법이 애초 제정헌법 초안(1948)의 국무원제-내각제 정부 형태를 그대로 둔 채 대통령의 법률안제출권·인사권·예산권·감사권·개헌발의권을 보장했기 때문이었다. 이 권한들은 대통령제의 표본인 미국 대통령에게는 없는 초과 권한들이다. 한국 헌법이 수퍼 대통령제(super-presidentialism)-당대 최고 법학자 중 한 명인 미군정 사법국장 에른스트 프랑켈의 표현-로 불린 이유였다. 민주공화적 대통령제를 위해서는 초과 권한들을 내려놓는 개헌이 필수인 이유다.

인류의 첫 성문헌법을 만든 선현들이 남긴, 민주공화 헌법을 위한 장전의 마지막 페이지는 오늘의 우리를 깊이 깨우친다. “깊은 평화의 시기에 전체 국민의 자발적 동의에 의해 헌법을 확립하는 것은 하나의 경이다. 지금 나는 그것의 완성을 전율하는 열망으로 고대하고 있다.” 국민과 국회와 대통령의 ‘전율하는 열망들’은 지금 반드시 만나 경이로운 ‘자발적 동의’를 이룩하지 않으면 안 된다.

박명림 연세대 교수·정치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