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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쓸로얄] 네팔왕조 몰락 부른 '궁중 대학살' 그 뒤엔 왕자의 이룰 수 없는 사랑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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힌두교 신자들은 창조신 브라마, 보호신 비슈누, 파괴신 시바를 가장 위대한 신으로 꼽습니다. 힌두교 왕국이었던 네팔에서 국왕은 비슈누의 환생으로 존경을 받았고요. 그러나 2001년 비슈누의 화신은 왕궁에서 죽음을 맞습니다. 이후 왕조도 몰락의 길을 걷죠.
이번 [알쓸로얄]은 2008년 막을 내린 네팔의 왕조 이야기입니다.

2007년 10월 네팔은 500루피권 지폐를 새로 발행했습니다. 구권의 앞면에 그려진 갸넨드라 국왕의 초상화가 신권에서 에베레스트 산의 이미지로 교체됐죠. 이듬해엔 모든 권종의 지폐가 새로 나왔습니다.

네덜란드 중앙은행이 발표한 논문 ‘지폐 정체성 디자인’에 따르면 발행국의 정체성은 지폐 디자인의 주요 요소입니다. 네팔이 지폐에서 국왕을 지우고 에베레스트를 넣은 것 역시 국가 정체성에 중대한 변화가 일어났기 때문이었죠.
바로 왕정 폐지와 공화정 수립입니다.

2008년 5월 네팔 의회는 왕정 폐지와 공화정 도입을 내용으로 하는 결의안을 채택했습니다. 의회는 갸넨드라 국왕에게 수도 카트만두의 왕궁을 떠나라는 요구도 했습니다. 나라얀히티 왕궁은 국유화되어 박물관이 됐고, 국왕은 평민으로 격하됐습니다.
1768년 소왕국들을 제압해 네팔을 통일한 ‘샤(Shah) 왕조’가 239년 만에 막을 내린 겁니다.

왕조의 종말을 불러온 ‘피의 만찬’

비운의 네팔 왕가 가족사진. 앞줄 왼쪽은 비롄드라 국왕, 오른쪽은 아이스와랴 왕비. 뒷줄은 왼쪽부터 쉬루티 공주, 디펜드라 왕세자, 니라잔 왕자. [중앙포토]

비운의 네팔 왕가 가족사진. 앞줄 왼쪽은 비롄드라 국왕, 오른쪽은 아이스와랴 왕비. 뒷줄은 왼쪽부터 쉬루티 공주, 디펜드라 왕세자, 니라잔 왕자. [중앙포토]

네팔 왕실은 비교적 국민의 신망을 얻었습니다.
비렌드라 국왕이 네팔 민주화의 물꼬를 튼 인물이었기 때문입니다. 1972년 27세에 네팔의 열번 째 국왕이 된 그는 한동안 전제 군주로 군림했지만, 1990년 민주화 시위가 발발하자 스스로 권력을 포기하고 입헌군주제를 도입했습니다. 힌두교의 삼위일체신 중 둘째인 비슈누의 화신으로 국민의 추앙도 받았죠.

왕실은 그러나 2001년 벌어진 ‘피의 만찬’으로 몰락의 길을 걷습니다.
그해 6월 나라얀히티 왕궁의 만찬장. 매달 국왕이 주재하는 왕실 일가의 저녁 모임이 열렸습니다. 비렌드라 국왕과 아이스와랴 왕비, 디펜드라 왕세자, 니라잔 왕자, 쉬루티 공주, 그리고 비렌드라 국왕의 누이 등이 참석했죠.

이 자리에서 무차별 총격이 벌어집니다. 유혈극의 장본인은 디펜드라 왕세자. 당시 현지 언론에 따르면 만취한 왕세자가 왕비의 꾸중을 듣고는 격분해 가족을 향해 자동소총을 난사했다고 합니다. 왕세자는 자살을 기도했죠.
국왕 부처 등 8명은 현장에서 즉사했고, 뇌사 상태에 빠졌던 왕세자는 사흘 뒤 병원에서 사망했습니다. 왕실 일가족이 몰살하는 대참극이 벌어진 겁니다.

네팔 왕실 살인극의 장본인인 디펜드라 왕세자와 그의 연인 데브야니. [중앙포토]

네팔 왕실 살인극의 장본인인 디펜드라 왕세자와 그의 연인 데브야니. [중앙포토]

전대미문의 살인극은 왕세자의 결혼 문제에서 비롯됐습니다. 사건을 조사한 왕립 조사위원회가 훗날 발표한 결론도 “왕세자가 결혼에 반대하는 국왕 내외와 갈등을 빚다 일으킨 사건”이었죠.

왕세자는 네팔 유력 정치인의 딸인 데브야니 라나와 사랑에 빠져 비밀 결혼식까지 올렸습니다. 하지만 끝내 부모의 허락을 얻지 못했다고 합니다.
혼사를 둘러싼 갈등이 얼마나 심각했는지 국왕이 왕세자 대신 차남인 니라잔 왕자에게 양위하겠다는 뜻을 밝혔을 정도였습니다.

결혼 반대 부닥치자 가족 몰살

네팔 국기.

네팔 국기.

결혼 반대의 원인은 분분합니다.
당시 현지 언론엔 독실한 힌두교 신자였던 아이스와랴 왕비가 “왕세자가 35세 전에 결혼하면 국왕이 비명횡사한다”는 점성술사의 말을 믿고 결혼을 강력히 반대했다고 보도됐습니다. 사건 당시 왕세자는 30세였죠.

신붓감의 가문이 문제였다는 설도 있습니다.
라나 가문은 네팔 총리를 세습해 온 명문가입니다. 아버지는 외무·재무장관을 지냈습니다. 그러나 왕실 가문과는  사이가 좋지 않았죠. 또 아이스와랴 왕비가 신붓감 어머니의 낮은 신분을 문제 삼았다고 합니다. 데브야니의 어머니는 인도 중부 마드야 프라데시의 왕족 출신이었습니다.

아이스와랴 왕비가 마음에 두고 있던 며느리감이 따로 있었다고도 합니다.
왕세자가 결혼은 왕비가 정해준 신붓감과 하는 대신 데브야니를 정부(情婦)로 삼는 ‘절충안’을 마련해 부모를 설득했지만, 데브야니가 거부했고 참극으로 이어졌다는 보도도 나왔죠.

권력 다툼이 참극의 원인이라는 분석도 있었습니다.

입헌군주국이 된 뒤에도 네팔은 의회를 중심으로 한 민주화 세력과 왕권 강화를 도모하는 왕실 세력의 알력으로 몸살을 앓았습니다. 이런 갈등이 왕실 내부에서 격화돼 살인극으로 이어졌을 것이란 추정입니다.
영국 이튼칼리지와 미국 하버드대에서 유학한 디펜드라 왕세자가 민주 세력에 우호적인데 반해, 왕실의 실력자였던 왕비는 보수의 대변자였다는 점이 이런 분석을 뒷받침합니다.

왕정에서 공화국으로 바뀐 뒤 국왕 초상을 에베레스트 이미지로 교체한 네팔. [중앙포토]

왕정에서 공화국으로 바뀐 뒤 국왕 초상을 에베레스트 이미지로 교체한 네팔. [중앙포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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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극에 뒤이은 폭정…왕실, 자멸의 길로 

네팔의 마지막 왕, 갸넨드라 전 국왕. [중앙포토]

네팔의 마지막 왕, 갸넨드라 전 국왕. [중앙포토]

참극 이후 왕권은 비렌드라 국왕의 동생인 갸넨드라가 물려받았습니다. 마침 해외출장 중이라 죽음을 모면한 탓에 그가 사건을 사주했다는 의혹이 제기되기도 했지만, 그다지 신뢰받지는 못하는 음모론입니다.

갑자기 즉위한 그는 폭정을 시작했습니다. 선출직 총리를 해임하는가 하면 헌법을 바꿔 전제정치를 부활시켰습니다. 비상계엄을 선포해 전권을 장악하고, 축재와 공포정치를 일삼았습니다.
갸넨드라 국왕은 형 비렌드라가 마오이스트 반군과의 협상으로 간신히 얻은 평화마저 깨뜨렸습니다.
1996년 왕정 폐지를 내세우며 내전을 시작한 마오이스트 반군은 국토의 상당 부분을 장악하고, 인구 대부분을 차지하는 농민들의 지지를 받고 있었죠.
갸넨드라 국왕은 협상 대신 제압을 선택해 내전을 격화시켰습니다.

국민만 고통받는 상황이 이어지자 야당 연합과 마오이스트 반군이 손을 잡았습니다. 이들이 주도하는 민주화 시위가 시작됐고, 정부의 강경 진압은 민주화를 향한 열망에 불을 지폈습니다. 미국 등 국제사회도 네팔 정부를 압박했습니다. 갸넨드라가 스스로 자멸의 길로 들어선 겁니다.

쫓겨난 前국왕, 왕정복고에 아직도 미련

2001년 네팔 왕족 피살 사건이 벌어진 카트만두의 나라얀히티 궁전, 현재는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위키피디아]

2001년 네팔 왕족 피살 사건이 벌어진 카트만두의 나라얀히티 궁전, 현재는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위키피디아]

갸넨드라는 두 손을 들고 맙니다. 국회를 복원하고 권력 이양을 발표했습니다.
마오이스트 반군은 정부와 내전 종식을 위한 회담을 시작했습니다. 왕정 폐지도 밀어붙였습니다. 정부와 의회는 왕조의 239년 역사를 계승해 입헌군주국으로서 민주주의를 강화하자고 했지만, 반군은 “다시 게릴라가 되어 앞으로 40년간 더 싸울 수도 있다”며 배수진을 쳤습니다.
결국 네팔은 연방민주공화국으로 재출범하고 2008년 4월 제헌의회 선거를 치렀습니다.

이 모든 사건의 주요 인물들은 지금 어떻게 살고 있을까요.

갸넨드라 국왕은 상당히 안온한 여생을 보내고 있습니다. 폐위되고 재산이 몰수되긴 했지만, 네팔에서 잘살고 있으니까요. 보통 쫓겨난 왕들이 죽음을 맞거나 해외를 떠도는 신세가 되는 데 비하면 해피엔딩입니다.

물론 본인은 불만이 가득합니다. 호시탐탐 왕정복고를 노리며 2012년 방송 인터뷰에선 “왕으로 복귀하겠다”고 선언하기도 했죠.
그렇다고 구체적 행동을 하는 건 아닙니다. “국민투표를 통해 왕정 복귀에 대한 여론을 물을 수 있는 것 아니냐”는 물음에 그는 이렇게 답했습니다.

“폐지할 때 국민에게 묻지 않았으니, 내가 돌아가는 것에 대해서도 물을 필요가 없다”

비극 원인이 된 ‘비련의 여인’은 새 인생

네팔 왕조의 몰락을 초래한 2001년 왕실 살인극의 원인이 된 데브야니 라나의 결혼식. 그는 2007년 인도 유력 정치인의 손자와 결혼했다. [중앙포토]

네팔 왕조의 몰락을 초래한 2001년 왕실 살인극의 원인이 된 데브야니 라나의 결혼식. 그는 2007년 인도 유력 정치인의 손자와 결혼했다. [중앙포토]

왕실 몰락의 원인을 제공한 데브야니는 어떨까요.

사건이 발생한 다음 날 신변안전을 위해 인도로 도피한 그는 7년의 세월이 흐른 뒤에야 네팔에 돌아왔습니다. 2008년 4월 제헌의회 총선에 출마한 아버지의 선거운동을 돕기 위해서였습니다.

그 사이 그는 영국의 런던정치경제대학(LSE)에서 학위를 취득하고 유엔개발계획(UNDP)에서 일을 시작했습니다. 인도의 사업가이자 유력 정치인의 손자인 남성과 결혼도 했습니다. 당시 인도 총리와 정관계 고위인사 등 하객 5000명이 참석한 성대한 결혼식이었습니다.

2008년 4월엔 영국의 더타임스와 사건 이후 처음 인터뷰도 했습니다. “멋지고 이해심 깊은 남편과 결혼했다” “유엔에서 일하며 배운 것들로 네팔을 돕고 싶다”는 등 그는 과거의 비극을 완전히 떨쳐낸 듯 행복과 희망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운명은 스스로 만들어가는 것이라 믿는다”며 강한 의지도 보였습니다.

그는 또 “그 사건이 아니었다면 역사가 바뀌었을지 모른다”며 “정치인이 아니라 국민에 의해서 (네팔에선) 더 많은 것이 이뤄져야 한다”는 발언도 했습니다. 그러나 “정치에 직접 뛰어들 생각은 없다”고 선을 그었죠.

이 인터뷰로부터 약 10년. 지난해 2월 인도 매체인 인디아 익스프레스엔 데브야니가 네팔 정치권에 뛰어들 것이란 보도도 나왔습니다.
매체는 “(데브야니가) 네팔 정계에서의 역할을 고려하고 있다”며 “아버지가 소속된 ‘라스트리야 프라자탄트라당(RPP-N)’의 후보로 선거에 출마할 수 있다“고 전했습니다.
홍주희 기자 hongho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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