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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의 메이지유신...일본, 규제의 틀 속에서 암호화폐 꽃핀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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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데이트

“오해다. 사실은 그 반대다. 규제를 강화하기 위해 법을 도입했다.”

[암호화폐 , 투기 대상에서 산업으로] #금융청 "자금결제법 개정은 규제 강화 위해" #규제의 목적은 자금세탁 방지, 이용자 보호 #정부는 불법 거래만 적발, 산업 진흥은 민간이 #코인체크 해킹은 규제 사각지대서 벌어진 일 #투기ㆍ과열 우려되지만 투자 금지는 못 해"

일본 금융청 관계자의 첫 마디다. 지난달 21일 도쿄 가스미가세키(霞ケ關) 중앙합동청사에 위치한 금융청을 찾아 암호화폐 관련 규제 담당자를 만났다. 첫 질문에 대한 답이 오해란다.

질문은 “일본이 암호화폐에 대해 전향적인 입장을 취하면서 암호화폐 시장을 선도하고 있다”며 “암호화폐를 제도권으로 편입한 자금결제법 개정의 배경을 설명해 달라”는 것이었다.

그는 “이용자 보호, 자금세탁 규제를 강화한다는 취지이기 때문에 (자금결제법을 개정한 것이) 전혀 전향적이지 않다”며 “중국처럼 금지한 것은 아니지만 규제는 필요하고, 그래서 규제를 도입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자금결제법은 송금 및 결제에 관한 규제다. 2009년 제정됐다. 100만엔 이하의 상품권ㆍ선불카드 등 선불방식의 대금결제를 규제한다. 이 법에 비트코인 등 암호화폐(일본 정부의 공식 용어는 ‘가상통화’다)에 대한 규제를 추가한 개정안이 작년 4월부터 본격 시행됐다.

개정안의 핵심은 암호화폐를 결제수단의 하나로 ‘재산적 가치’를 지닌다고 정의했다는 점이다. ‘법정통화와 교환 가능하고 전자거래 기능이 있지만 법정통화는 아니다’라고 부연했다.

이런 전제 아래 가상통화 교환업 등록제를 도입했다. 가상통화 교환업자에 대한 공인회계사 또는 감사법인의 감사를 의무화하고, 이 감사보고서를 정부에 제출해 금융청의 업무개선 명령 등 감독을 받도록 명문화했다.

금융청 관계자에 따르면, 자금결제법 개정은 두 가지 목적 달성을 위한 규제다. 하나는 자금세탁 방지다. 2015년 선진 7개국(G7) 정상회담이 시작이었다.

그는 “당시 암호화폐에 대해 투명성을 높일 수 있는 규제가 필요하다는 합의가 있었다”며 “그해 국제자금세탁방지기구(FATF)에서 자금세탁 방지를 위해 (암호화폐 거래소의) 등록제나 면허제를 도입해야 한다는 제의가 있었는데 일본이 제일 먼저 이를 받아들인 것”이라고 말했다.

다른 하나는 이용자 보호다. 세계 최초이자 한때 전세계 비트코인 거래의 80%를 담당했던 마운트곡스(Mt. Gox)의 파산이 계기가 됐다. 창립자 제드 매케일럽( 리플과 스텔라루멘의 개발자)에게 회사를 넘겨받은 마크 카펠레스 전 최고경영자(CEO)는 일본 만화와 코스프레를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본사를 일본 도쿄로 옮겼다.

잘 돌아가는가 싶었는데 2014년 2월, 85만 비트코인을 해킹으로 분실했다며 파산 신청을 했다. 하루아침에 거액을 날린 전세계인들이 비행기를 타고 도쿄 본사로 날아와 시위를 벌였다. 파산 사태를 가까이서 지켜본 일본 정부는 세계에서 가장 처음으로 이용자 보호를 위한 규제를 선보였다.

그런데도 해킹 사태가 일어났다. 지난 1월 말, 일본 2위 거래소인 코인체크가 해킹을 당해 580억 엔어치의 암호화폐를 도난당했다. 일본을 암호화폐 규제의 모범 사례라고 여겼던 한국의 암호화폐 커뮤니티가 충격에 휩싸였다. 일부에서는 거래소 등록제 무용론(無用論)까지 제기됐다.

2월 22일 일본 도쿄 시부야에 위치한 코인체크 본사 앞(왼쪽). 이 건물의 3층에 위치해 있다. 건물 입구에는 ’개별 응대가 어려우니 아래 연락처로 문의 바란다“며 홍보 담당 부서의 연락처가 기재돼 있는 안내문이 붙어 있다(오른쪽). 이날 해당 번호로 여러 차례 전화했으나 응답하지 않았다. [고란 기자]

2월 22일 일본 도쿄 시부야에 위치한 코인체크 본사 앞(왼쪽). 이 건물의 3층에 위치해 있다. 건물 입구에는 ’개별 응대가 어려우니 아래 연락처로 문의 바란다“며 홍보 담당 부서의 연락처가 기재돼 있는 안내문이 붙어 있다(오른쪽). 이날 해당 번호로 여러 차례 전화했으나 응답하지 않았다. [고란 기자]

사정을 뜯어보면 그러나, 이 사태는 규제의 사각지대에서 벌어진 일이다. 코인체크는 금융청에 등록된 거래소가 아니다. ‘유사 가상통화. 작년 4월 자금결제법 개정안이 시행되기 이전부터 영업해 오던 거래소를 지칭하는 용어다.

암호화폐에 대해 규제하는 국가가 하나도 없는 데다 이미 그 거래소를 통해 거래해 오던 고객들이 있는데, 법을 만들었다고 하루아침에 영업을 중단시킬 수 없었다는 게 금융청의 설명이다. 금융청 관계자는 “과도기 상태였던 업자(거래소)들이 아직 등록할 만한 역량이 안 돼 (해킹 사태 같은) 일이 벌어진 것이지 등록제의 문제는 아니다”고 강조했다.

일본 정부가 그렇다고 시장 과열과 투기를 우려하지 않는 건 아니다. 시장 과열을 우려해 정부 차원에서 “암호화폐는 안정성이 높지 않은 투자자산이며, 국가가 보증해 주지도 않고, 시스템적 위험이 있는데다, 거래소는 은행과 같은 금융회사가 아니다”고 몇 차례나 강조한다.

그렇지만, 과열 진정이나 투기 근절이 암호화폐 관련 정책의 목표는 아니다. 금융청 관계자는 “(암호화폐는) 자유로운 거래이기 때문에 위험성을 알고서도 투자하는 것까지 금지할 수는 없다”며 “(정부가 할 수 있는 일은) 리스크를 분명하게 이해하고 투자해야 한다고 강조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원칙은 분명하다. 암호화폐를 통한 자금세탁을 막고, 이용자 보호에 최선을 다한다는 것이다.

실제로 금융청은 코인체크 사태를 계기로 등록 거래소 16곳과 유사 거래소 16곳 전체에 대한 현장조사를 벌였다.

한 달여간의 조사 끝에 지난 8일 유사 거래소 두 곳에 1개월 간의 업무정지 명령을 내렸다. 고객이 맡긴 비트코인을 사적으로 유용했거나(비트스테이션), 암호화폐의 고액 거래 등을 금융당국에 신고하지 않았다(FSHO)는 등의 이유에서다.

문제가 생겼다고 '거래소 폐쇄'를 거론하지 않는다. 암호화폐를 가지고 불법 행위를 못하도록 규제의 울타리를 치는 건 정부의 몫이고, 울타리 안에서 산업을 키우는 건 민간의 몫이다. 정부가 산업의 싹을 자르지는 않는다.

정부는 불법 거래를 적발하고 산업 진흥은 민간 몫으로 남겨 둔다. 정부가 나서 적법과 불법을 가려줄테니 민간이 시장에서 암호화폐와 블록체인 산업을 발전시키라는 것이다.

지난달 찾은 일본 도쿄 신주쿠의 키노쿠니야(紀伊國屋) 서점 입구 매대는 비트코인 등 암호화폐 관련 책이 점령했다(왼쪽). 서점 안쪽 잡지 코너에도 비트코인 관련 잡지가 따로 모아져 있다. [고란 기자]

지난달 찾은 일본 도쿄 신주쿠의 키노쿠니야(紀伊國屋) 서점 입구 매대는 비트코인 등 암호화폐 관련 책이 점령했다(왼쪽). 서점 안쪽 잡지 코너에도 비트코인 관련 잡지가 따로 모아져 있다. [고란 기자]

자금결제법 개정안에 따라 작년 4월부터 일본에서는 엔화로 암호화폐를 살 때 냈던 소비세를 없앴다. 암호화폐를 결제 수단으로 인정했기 때문이다.

대신 암호화폐로 실제 상품을 구입할 경우에는 엔화로 살 때와 마찬가지로 소비세를 낸다. 작년 말까지 16개 거래소가 등록을 마쳤고, 암호화폐 결제가 가능한 상점은 26만여 곳까지 늘어났다.

결제 가능한 물품도 초기엔 전자 기기가 대부분이었지만, 이제는 일반 소매점을 넘어 자동차 등 고가의 물품도 비트코인으로 살 수 있다.

심지어 일본의 부동산 스타트업인 이탄지는 지난 1월부터 부동산 구입에 비트코인 결제 시스템을 도입했다. 일본 저가 항공사인 피치항공은 일본 3대 거래소인 비트포인트와 제휴해 오는 6월부터 비트코인으로 항공권을 구입할 수 있도록 할 계획이다.

해외 진출도 활발하다. 일본 최대 거래소인 비트플라이어는 작년 1월 미국에 진출한 데 이어, 올 초에는 유럽에도 진출했다. 비트포인트는 지난해 한국에 진출했다.

기존 금융회사의 변신도 눈에 띈다. 일본 최대 인터넷 은행인 SBI는 암호화폐 기업인 리플사와 합작해 'SBI리플아시아'를 설립했다.

미즈호금융그룹은 지방은행 등과 손잡고 올해 디지털 화폐인 'J코인'을 발행할 계획이다. 미쓰비시도쿄UFJ은행은 '1코인=1엔'의 가치를 갖는 'MUFG코인' 발행을 검토 중이다.

암호화폐 산업의 발전은 경제성장도 이끈다. 노무라증권은 연초 “지난해 암호화폐 시장의 성장으로 올해 일본의 국내총생산(GDP)이 약 0.3% 상승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보고서에는 “암호화폐로 자산을 늘린 사람이 증가하면 소비액도 그만큼 늘어나는 자산효과가 발생한다”며 “작년부터 암호화폐로 큰돈을 손에 넣은 투자자가 출현했기 때문에 올 해에는 230억~960억엔 정도의 소비가 늘어날 것”이라고 밝혔다.

오다 겐키 비트포인트 대표는 “국가가 일하기 가장 쉬운 방법이 금지해 버리는 것이지만 한국이 암호화폐를 완전히 금지하기는 불가능할 것”이라며 "암호화폐(투자)는 큰 위험을 동반하기 때문에 정부가 (거래소) 인가제 등을 통해 규제해야 한다"고 말했다.

도쿄=고란 기자 neora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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