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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사설

한반도 운명 좌우할 트럼프·김정은 회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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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한반도 정세가 중대한 분수령을 맞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노동당 위원장이 4월 말 정상회담을 하는 데 이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김 위원장의 정상회담이 5월 중 성사될 전망이다. 한국전쟁 정전협정 당사국인 미국과 북한 정상의 만남은 역사상 처음이며 ‘사건’이다. 북한의 핵·미사일 도발로 군사옵션까지 거론되며 일촉즉발의 대립과 긴장 구도가 대화 국면으로 급선회하면서 북한 비핵화를 평화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돌파구가 마련되는 셈이다. 1953년 한국전쟁이 끝난 지 65년 만에 절호의 기회라고 할 수 있다. “훗날 한반도 평화를 일궈낸 역사적 이정표로 기록될 것”이라는 문재인 대통령의 말에 공감이 간다.

“한반도 평화 일궈낼 역사적 이정표” #비핵화는 불가역적으로 철저해야 #대북제재 속 냉정한 현실 인식 필요

어제 정의용 청와대 안보실장은 미 백악관에서 트럼프 대통령을 만난 뒤 김 위원장이 트럼프 대통령에게 조속한 만남을 희망했고, 이에 트럼프 대통령도 5월 안에 만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고 발표했다. 북·미 정상회담의 낭보는 전쟁의 먹구름으로 가득 찼던 한반도에 대반전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지난해 북한이 6차 핵실험과 미 본토에 닿을 수 있는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을 시험발사하면서 미국과 북한 사이에 무력 충돌의 분위기가 조성됐다. 당시 트럼프 대통령은 ‘화염과 분노’를 경고하며 군사옵션을 배제하지 않는다고 했다. 실제 워싱턴에선 대북 선제타격론도 퍼졌다. 북한도 미국령 괌 주변에 대한 포위사격 방안을 검토 중이라고 위협했다. 양측의 ‘말 전쟁’은 올 1월 김 위원장 신년사에서 “핵 단추가 책상 위에 놓여 있다”로 증폭됐다. 트럼프 대통령도 “나는 더 크고 강력한 핵 버튼이 있다”고 받아쳐 위기가 고조됐다.

이처럼 암울한 상황에서 역전극을 이뤄낸 문재인 정부의 ‘중매 외교’는 평가할 만하다. 문 대통령의 ‘운전자론’이 통했다고 볼 수 있다. 평창 겨울올림픽을 계기로 시도한 남북 고위급 접촉이 촉매제가 됐다. 김 위원장의 친동생인 김여정의 방남, 대북 특사단의 방북과 김 위원장과의 만찬 회동으로 이어지면서 북한의 의사를 타진하고 미국에 전달하기에 이르렀다. 어제 백악관에서 정 실장이 한·미를 대표해 북·미 정상회담을 발표한 것은 ‘한반도호(號)’의 운전대를 잡았음을 방증한다.

이제 시작에 불과하다. 북·미 정상회담이 실패할 경우 기회는 위기로 돌변할 수 있다. 북한의 비핵화 과정은 험난하고 까다롭다. 북한은 1차(1993년)와 2차(2003년) 북핵 위기 때 국제사회의 해결 노력을 모두 수포로 돌아가게 한 전력을 갖고 있다. 이번에 북한이 핵실험과 미사일 발사를 잠정 중단한다고 했지만 비핵화에 진정성을 갖고 있는지가 중요하다. 미국을 비롯한 국제사회는 북한 비핵화의 조건으로 ‘완전하고 검증 가능하며 돌이킬 수 없는 폐기(CVID)’를 요구하고 있다. CVID는 ‘북한의 핵시설 및 핵무기 공개→국제사회의 사찰 및 검증→폐기’ 과정을 거쳐야 한다. 여기에는 비핵화에 대한 북한의 투명성과 협조가 필수적이다.

북한의 비핵화와 병행해 북한 체제의 안전을 보장하기 위한 대응 조치도 간단치 않다. 북한은 미국이 제공하는 방어적 차원의 핵우산 등 전략자산을 한반도에 전개하지 말고 심지어 주한미군까지 철수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실제 북·미 간 평화협정을 체결하면 양국 간 적대 관계가 청산되기 때문에 한·미 연합체제가 해체될 수 있다. 하지만 북한의 핵 능력이 완전히 제거되지 않은 상태에서 한·미 동맹이 이완되면 국민의 불안감은 커지고 안보 위기를 맞을 수도 있다. 북한이 대화에 나선 배경에는 국제적인 대북 제재와 압박이 주효했기 때문이다. 북한의 비핵화가 불가역적으로 달성될 때까지 한·미 동맹을 기반으로 한 대북제재는 유지돼야 한다.

“(북한 문제는) 불면 날아갈까 쥐면 부서질까 조심해야 하고, 유리그릇 다루듯 다뤄야 한다”는 문 대통령의 지적은 적확하다. 북한의 진정성이 확인되지 않은 상태에서 섣부른 낙관은 금물이다. 특히 우리 정부가 냉철한 현실 인식 없이 북한의 파격적 평화 공세에 흥분하거나 들떠선 곤란하다. 어떤 돌발 변수가 발생할지 알 수 없다. 남북-북·미 정상의 연쇄 회담이 한반도의 운명을 좌우할 기로에 서 있음을 직시하며 차분히 대응할 필요가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