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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석만의 인간혁명]세상을 바꾼 칭기즈칸의 육포, 혁신은 ‘창조적 파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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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기병은 인류 역사상 가장 강력했던 군대 중 하나로 꼽힌다. [중앙포토]

몽골기병은 인류 역사상 가장 강력했던 군대 중 하나로 꼽힌다. [중앙포토]

칭기즈칸의 세계제국 건설이 ‘육포’ 때문이었다는 말을 들어보신 적 있나요? 황당하게 들릴 수 있지만 몽고사(史)에 관심 있는 이들에겐 익히 알려진 사실입니다. 유목민족인 몽골인들은 어려서부터 말타기에 능하고, 이동하며 살아야 했기 때문에 저장이 간편한 육포(Borcha)를 즐겨 먹었습니다. 그만큼 익숙한 음식이란 이야기죠. 오늘날 우리가 즐겨먹는 육포도 몽고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합니다.

전 세계를 뒤흔든 몽골기병의 비밀은 #말 안장에 육포 가루 넣고 다니며 싸워 #'전쟁=보급전' 고정관념 깨버린 혁신 #일등기업 코닥은 세계최초 디카 개발 #'카메라=필름' 편견에 빠져 디카 포기 #4차 산업혁명 시대는 변화의 속도 빨라 #리더의 혁신은 '창조적 파괴'에서 시작

 음식과 전쟁이 무슨 상관이 있느냐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몽골인들의 식습관은 칭기즈칸의 군대가 세계 최고의 전투력을 갖는 데 결정적 요인이 됐죠. 육포는 어떻게 칭기즈칸의 세계제국 건설에 영향을 미쳤을까요? 칭기즈칸의 육포를 따라 모래바람 휘날리던 800여 년 전의 전장 속으로 잠시 여행을 떠나보시죠.

몽골 올란바토르 수흐바타르 광장에 세워진 칭기즈칸의 대형 동상이 위용을 자랑하고 있다. [중앙포토]

몽골 올란바토르 수흐바타르 광장에 세워진 칭기즈칸의 대형 동상이 위용을 자랑하고 있다. [중앙포토]

 “칭기즈칸이 세상을 흔들자 술탄들이 힘없이 쓰러졌다. 칼리파들은 넘어졌고, 카이사르들은 왕좌에서 떨어져 나갔다. 그는 천수를 누리며 최고의 영광을 맞이한 상태로 죽었다. 마지막에는 중국의 최종 정복을 완수하라는 유지를 남긴 채 숨을 거뒀다.” (에드워드 기번, 『로마제국쇠망사』)

12세기 중반 몽고고원의 부족장이던 테무친은 1189년 여러 부족을 통일해 맹주 자리에 올랐습니다. 세력을 계속 넓혀가던 그는 1206년 칭기즈칸이라는 칭호를 받고 몽고고원 일대 유목민족의 왕(Khan·칸)으로 추대되죠. 이후 중국을 침략하고 서방으로 가는 무역로를 확보하면서부터 세계제국 건설이 시작됩니다. 칭기즈칸의 뒤를 이은 몽골제국은 동쪽으로는 한반도에서, 서쪽으로는 러시아까지 영향력을 미치게 됩니다.

 몽골제국은  전성기 알렉산더의 마케도니아, 나폴레옹의 프랑스, 히틀러의 독일을 합한 것보다 더 넓은 영토를 갖게 됩니다. 불과 200만명의 유목민에서 시작한 몽골제국은 150년 동안 2억명이 사는 세계 영토의 절반(아메리카 대륙 제외)을 지배하게 된 거죠.

 세계제국 건설이 가능했던 이유는 칭기즈칸의 용맹한 몽골 기병 덕분입니다. 기병은 말을 타고 싸우는 전사를 뜻하는데요. 당시 몽골의 말은 유럽인의 것보다 작고 힘도 약했습니다. 그러나 말을 모는 기술만큼은 몽골인들을 따라갈 수 없었죠. 몽골인들은 걷기와 함께 말타기를 시작했으니까요. 특히 몽골 기병의 가장 큰 강점은 세상의 어떤 군대보다 빨랐다는 겁니다.

몽골인들은 걸음마를 떼면서부터 말 타는 법을 배웠다. [네이버]

몽골인들은 걸음마를 떼면서부터 말 타는 법을 배웠다. [네이버]

 전쟁사 전문가 리처드 가브리엘(Richard Gabriel) 캐나다 왕립사관학교 전쟁학과 교수는 “몽골 기병의 가장 큰 장점은 기동성이었다. 앞에 있던 적의 뒤편에 갑자기 나타나거나 후방 깊숙한 곳까지 침투해 유럽군을 흔들어 놓았다”(『칭기즈칸의 위대한 장군 수부타이』)고 말합니다.

 예를 들어 적의 척후병이 200~300km 떨어진 곳에서 몽골군의 이동을 감지하고 영지로 돌아와 보고하면  성안에선  그때부터 전쟁 준비를 시작합니다. 당시 통념으로는 일주일 정도는 있어야 군대가 도착할 거라고 예상했죠. 세계대전 당시 독일 전차부대가 하루 30~40km씩 진군했던 걸 생각하면 12~13세기로서는 충분히 예상 가능한 기간이었습니다.

울란바토르 교외에 세워진 칭기즈칸 동상. [중앙포토]

울란바토르 교외에 세워진 칭기즈칸 동상. [중앙포토]

 하지만 몽골군은 일주일은커녕 다음 날이면 성에 도착해 공격을 시작했습니다. 리처드 가브리엘은 “제베와  수부타이 같은 몽골의 명장들은 당시 상식으론 상상할 수 없는 위험한 전투를 많이 벌였는데 이를 가능케 한 것은 압도적인 전투 속도 덕분이었다. 전투에서 불리할 때는 적의 추격 속도보다 훨씬 빨랐기 때문에 적이 쫓아올 수 없었다”고 설명합니다.

몽골군이 뛰어난 기동성을 보인 것이 단순히 말을 잘 탔기 때문일까요. 더욱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칭기즈칸의 군대에는 보급부대가 따로 없었다는 겁니다. 오늘날엔 간편한 전투식량이 많아져 보급부대의 역할이 크지 않지만, 과거의 전쟁에선 ‘보급’이 전쟁의 8할을 차지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진군하는 중간중간 진을 치고 밥을 지어야 했기 때문이죠. 삼국지와 같은 소설을 보면 적의 보급로를 차단하는 작전이 많이 등장하는데, 그만큼 전쟁에선 보급이 중요했습니다.

몽골제국을 건설한 칭기즈칸. [네이버]

몽골제국을 건설한 칭기즈칸. [네이버]

 임진왜란에서 이순신 장군의 승리가 위대한 점도 이 때문입니다. 개전과 함께 육지에선 이미 왜군이 모든 걸 점령하다시피 했죠. 1592년 4월 부산포로 쳐들어온 왜군은 도성(한양) 함락까지 불과 20일밖에 걸리지 않았습니다. 또 당시 임금인 선조는 전쟁이 시작되자마자 제일 먼저 궁을 버리고 북쪽으로 도망쳤죠. 그런데도 왜군은 조선을 완벽히 손에 넣을 수 없었습니다.

 그 이유는 왜군이 보급전에 실패했기 때문입니다. 당시 조선은 나라 살림이 엉망이라 비축된 곡식이 거의 없었습니다. 식량의 대부분을 본토에서 조달해 와야 했죠. 보급 작전을 펼치기 위해선 쓰시마섬을 출발한 배가 남해에서 서해를 돌아 제물포로 와야 했습니다. 그런데 배가 지나는 길목마다 이순신이 지키고 있었죠. 해전에서 이순신에게 참패를 당한 왜군은 전쟁을 오래 지속하기 어려웠습니다. 보급로가 끊긴 왜군은 난항을 겪었고 마침 명나라까지 개입하며 전세가 꺾였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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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처럼 보급은 과거 전쟁에서 핵심적 부분을 차지했습니다. 하지만 칭기즈칸의 군대엔 앞서 설명한 것처럼 보급부대가 없었죠. 그렇다면 병사들은 무엇을 먹었냐고요? 칭기즈칸의 기병들은 개개인이 육포와 가루우유, 말 젖 등을 휴대하고 다녔습니다. 안장 밑에 깔아둔 고기는 말이 달리면서 발생하는 열과 땀으로 부드럽게 절여졌죠. 가루우유는 물에 타 마시면 오늘날의 요거트와 같은 든든한 음식이 됐습니다.

 『세상을 바꾼 음식 이야기』의 저자 홍익희 세종대 교수는 “가루를 낸 육포를 물에 타 마시면 한 끼 식사로 충분했다, 바싹 마른 육포가 뱃속에서 불어 공복을 채웠기 때문이다. 육포 한 봉지로 일주일치 식량이 됐다”고 말합니다. 그는 특히 “몽골군은 기동성이 뛰어난 데다, 전쟁 중 불을 피울 일도 없어 적에게 노출되지 않았기 때문에 신출귀몰한 기습작전이 가능했다”고 강조하죠.

 이처럼 칭기즈칸은 자신들에 익숙한 육포라는 음식을 전투식량으로 사용하며, 이때까지 존재했던 ‘전쟁=보급’이라는 통념을 완벽히 깨버립니다. 별도의 보급부대가 후미에서 따라오고, 또 이들을 사방에서 호위하는 진군이 필요 없던 거죠. 보급전이 전쟁의 승패를 갈랐던 중세 역사에서 보급부대를 없앤 건 당시로선 엄청난 혁신이었던 셈입니다. 이 같은 칭기즈칸의 ‘창조적 파괴’는 몽골을 세계 최대의 제국으로 만드는 데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전 세계인이 즐겨먹는 음식이 된 육포. 몽골이 원조다. [중앙포토]

전 세계인이 즐겨먹는 음식이 된 육포. 몽골이 원조다. [중앙포토]

 모든 혁신에는 리더의 ‘창조적 파괴’가 필요합니다. 새로운 무언가를 만들기 위해선 기존의 것들을 과감하게 떨쳐내야 하는 거죠. 20세기 최고의 경제학자 중 한 명인 조셉 슘페터는 『경제발전론』에서 “혁신으로 낡은 것을 파괴하고, 기존의 것을 도태시켜야 새로운 게 창조된다. 이윤이란 ‘창조적 파괴’를 성공적으로 이끈 기업이 얻는 정당한 대가”라고 말했습니다. 혁신은 ‘새가 알을 깨고 나오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는 이야깁니다.

 하지만 국가와 기업, 모든 조직의 흥망사를 보면 현실에 안주해 ‘창조적 파괴’를 하지 못한 사례가 많습니다. 과거의 성공과 영광에 심취해 변화를 거부하는 거죠. 모두가 새로운 것을 향해 앞으로 나갈 때 움직이지 않고 가만있는 건 현상을 유지하는 게 아니라 뒤로 처지는 일입니다. 흐르는 물에서 헤엄을 치우지 않으면 뒤로 떠밀려 가는 것과 같은 이치죠.

 대표적인 사례가 20세기 최고의 기업 중 하나인 코닥(Kodak)입니다. 1888년 이스트만이 설립한 코닥은 100년 동안 업계의 최강자였습니다. 전성기였던 1970년대 중반 코닥의 미국 시장점유율은 필름 90%, 카메라 85%에 달했죠. 그 당시엔 ‘코닥 모멘트(사진을 찍는 순간)’이란 말이 유행할 정도로 ‘카메라는 곧 코닥’이었습니다. 물론 모든 카메라는 필름을 사용했고요.

 원래 코닥도 처음엔 혁신기업이었습니다. 설립자 이스트만은 지속적 투자로 새로운 상품을 개발하는 데 고삐를 늦추지 않았습니다. 당시 이스트만은 기술개발 책임자에게 다음과 같은 두 가지 당부를 했다고 합니다. 첫째 원하는 모든 것을 연구하라, 둘째 사진기술의 미래가 되라는 것이었죠. 그 때문에 코닥은 특허를 가장 많이 가진 기업 중 하나였습니다.

코닥의 엔지니어인 스티브 세손이 세계 최초로 개발한 디지털 카메라. [네이버]

코닥의 엔지니어인 스티브 세손이 세계 최초로 개발한 디지털 카메라. [네이버]

 그러나 영원한 일등일 것 같던 코닥도 중대한 실수를 범하고 맙니다. 1975년 코닥의 젊은 엔지니어 스티브 세손은 세계 최초로 디지털카메라를 개발합니다. 사진을 필름이 아닌 카세트에 기록하고 이를 텔레비전 이미지로 출력하는 기술이었습니다. 카메라 무게만 3kg이 넘어 상용화하기엔 어려움이 있었지만 필름을 쓰지 않는 매우 혁신적인 카메라였죠.

 하지만 세손의 연구 결과를 보고받은 당시 경영진은 시큰둥한 반응을 보입니다. 무겁고 기괴한 카메라를 누가 쓰겠냐는 거였습니다. 특히 필름 시장의 독점업체인 코닥 입장에서 필름이 없는 카메라는 제 살 깎아 먹기라는 생각이 많았습니다. 3년 후 경영진은 다시 ‘2010년 디지털카메라 시대가 열린다’는 보고를 받았지만 묵살하고 말죠. ‘카메라=필름’이란 고정관념을 깨지 못했던 것이었습니다.

 반면 후발주자인 후지필름은 코닥의 ‘신기한’ 발명품을 보고 뒤늦게 디지털카메라 연구를 시작합니다. 그리고 1988년 첫 상용 제품을 내놓죠. 물론 디지털카메라가 시장의 대세가 되기까진 10여 년이 더 걸렸지만 한 번 시장에 자리 잡은 ‘디카’는 무섭게 필름 카메라를 내몰았습니다. 결국 수십 년이 지난 지금 코닥은 파산 신청(2012년) 후 재기를 노리고 있고, 후지필름은 연 매출 2조4916억엔(2016년)의 건실한 회사로 성장했죠.

코닥 파산신청 당시 주가. [중앙포토]

코닥 파산신청 당시 주가. [중앙포토]

 코닥의 사례에서처럼 변화하지 않는 것은 도태되기 마련입니다. 요즘처럼 변화의 속도가 빠른 세상에선 혁신이 의무죠. 아이러니하게도 과거의 누적된 성공은, 자기 확신을 낳고 결국엔 실패의 원인이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기존의 업무와 역할만 고수하다가 한 번에 ‘훅 갈 수’도 있다는 거죠. 물론 ‘잘 나가는’ 상태에서 이런 인식을 하기란 어려운 일입니다.

 하지만 조직의 리더라면 언제나 새로운 것에 대해 목말라 있어야 합니다. 정체성을 버리지 않되 끊임없는 혁신을 해야 하죠. 그 시작은 기존의 통념을 벗어던지고 매일 같이 리셋하는 것입니다. 생전의 존 F. 케네디는 “삶의 가장 큰 법칙 중 하나는 변화다. 어제와 오늘만 생각하는 사람은 미래를 놓친다”고 말하기도 했죠.

 이처럼 모든 것이 변화하고 있습니다. 이런 시대엔 코닥처럼 과거에 안주하면 도태될 수밖에 없습니다. 반대로 보급부대를 없앤 칭기즈칸처럼 기존의 통념을 뒤흔들고 변화에 성공한다면 기존엔 생각지도 못했던 큰 기회를 얻게 될 겁니다. 혁신은 리더의 창조적 파괴에서 나온다는 것, 4차 혁명시대에 우리가 꼭 잊지 말아야 할 교훈입니다.

윤석만 기자 sam@joongang.co.kr

#'윤석만의 인간혁명‘은 매주 토요일 아침 업데이트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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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 기자는 2010년부터 교육 분야를 취재했다. 특히 인성·시민 교육 및 미래와 관련한 보도에 집중했다. 앞으로는 성적과 스펙보다 협동과 배려, 공감 같은 인성역량이 핵심능력이 될 것이라고 믿는다. 이를 주제로 ‘휴마트(humanity+smart) 씽킹’이란 책을 냈다. 유네스코가 15년마다 주최하는 세계교육포럼에서 세계시민교육 심포지엄의 기조발표자로 나서기도 했다. 중앙인성연구소 사무국장을 겸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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