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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속으로] 숨었던 고액권 속속 세상 밖으로 … 한국 지하경제 빠르게 줄어들어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9면

설 땅 좁아지는 검은 거래

지난해 5만원권 환수율이 60%에 육박하며 5년 만에 최고치를 기록했다. 현금거래가 투명해지면서 지하경제도 함께 줄었다. [뉴시스]

지난해 5만원권 환수율이 60%에 육박하며 5년 만에 최고치를 기록했다. 현금거래가 투명해지면서 지하경제도 함께 줄었다. [뉴시스]

최근 연임이 결정된 이주열 한국은행 총재를 지난 임기 내 괴롭힌 골칫거리 중 하나는 ‘돌아오지 않는 5만원권’이었다. 5만원권 환수율은 2012년 61.7%, 2013년 48.6%로 절반을 넘나들다 이 총재 임기 첫해인 2014년 25.8%로 반 토막이 났다. 박근혜 정부가 지하경제 양성화를 선포한 직후다. 이후 이 총재는 국정감사 때마다 “5만원권 환수율 급락 이유를 한은이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는 질책에 시달렸다.

시중으로 돌아오는 5만원권 #2014년 26%로 떨어졌던 환수율 #지난해 58%로 5년 만에 최고치 #지하경제 축소는 글로벌 추세 #IMF “한국 GDP 대비 20%이하로” #줄어드는 속도 세계 평균 앞질러

한은은 2014년 말 가계 1000가구와 중소기업 1000곳을 대상으로 5만원권 사용 행태를 조사했다. 그렇지만 사라진 5만원권의 구체적 행방은 나오지 않았다. 이 총재는 “고액권 특성상 지하 자금화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다”면서도 “통계로 나타나지 않아 지하경제에 쓰였다고 단정 짓기 어렵다”는 원론적 설명을 반복했다.

이후 5만원권 환수율은 개선됐다. 2015년 40.1%, 2016년 49.9%로 회복세를 보이더니 지난해 1~11월 58%를 기록하며 크게 뛰었다. 5년 만의 최고치다.

현금은 지하경제를 이루는 가장 큰 축이다. 흔적이 남지 않고, 국내 어디서든 일정한 가치를 인정받는다. 5만원권 환수율이 60%에 육박한 지금 한국의 지하경제 규모는 얼마나 될까. 이와 관련해 최근 주목할만한 국제기구의 분석 결과가 나왔다.

IMF가 추산한 한국의 지하경제 규모

IMF가 추산한 한국의 지하경제 규모

국제통화기금(IMF)은 지난달 발간한 ‘전 세계 지하경제: 지난 20년간의 교훈’ 조사보고서에서 한국의 국내총생산(GDP) 대비 지하경제 규모가 2015년 기준 20% 이하로 떨어졌다고 분석했다. 98년 외환위기 직후 GDP의 30%까지 치솟았던 지하경제 규모가 지난 20년간 10%포인트 넘게 줄어들었다는 연구 결과다.

IMF 연구팀에 따르면 2015년 기준 한국의 GDP 대비 지하경제 규모는 분석 시작 시점인 91년 이후 처음으로 20% 이하인 19.83%를 기록했다. 분석 대상으로 삼은 전 세계 158개국 평균(27.78%)과 비교해도 8%포인트가량 낮다.

지역별 GDP대비 지하경제 규모

지역별 GDP대비 지하경제 규모

지하경제 축소 속도도 한국이 세계 평균을 앞질렀다. 글로벌 GDP 대비 지하경제 규모가 91년 34.51%에서 2015년 27.78%로 6.73%포인트 감소했는데 같은 기간 한국은 평균보다 30%가량 많은 9.48%포인트 감소를 기록했다. 91년 GDP 대비 29.13%를 기록했던 한국의 지하경제 규모는 97년 26.97%까지 축소했다가 외환위기 직후 30%로 다시 커졌다. 이후 다시 꾸준한 감소세를 기록하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때 23.86%로 급격히 떨어진 것으로 나타났다.

이번 연구를 이끈 프리드리히 슈나이더 오스트리아 린츠대학 교수는 앞서 2010년 한국의 지하경제 규모를 GDP 대비 24.7%로 추산했었다. 이는 2014년 당시 지하경제 양성화를 추진한 정부가 근거로 삼은 자료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번 IMF 보고서에서 슈나이더 교수는 2010년 한국의 지하경제 규모를 GDP 대비 22.97%로 봤다. 동일한 학자가 같은 시기를 분석했는데 차이가 생긴 이유는 뭘까.

안종석 조세재정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지하경제는 통일되지 않은 기술적 정의를 가지고 있어 실제 추산하는 방법은 연구마다 다를 수 있다”고 설명했다. 지하경제란 개념 자체가 그만큼 학계에서 모호하고, 학자들 사이에서도 통일된 기준이 정립돼있지 않다는 얘기다.

슈나이더 교수가 새로 분석한 지하경제는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강도, 마약 거래 등 불법 생산을 포함한 경제활동을 측정하지 않았다. 위법성을 가진다는 의미의 ‘블랙 이코노미(black economy)’가 아니다. 연구진은 보고서에서 “세금이나 최저임금, 안전기준 등과 같은 규제나 행정절차를 피하기 위해 정부 당국으로부터 숨겨진 경제행위를 포괄한다”고 지하경제의 개념을 설명했다. 과세당국의 눈을 피해 영수증 없이 현금으로 이루어지는 ‘캐시 이코노미(cash economy)’와 비슷한 개념이다.

지하경제 축소는 글로벌 경제발전과 함께 나타나는 전 세계적 흐름이다. IMF는 이번 보고서에서 158개국의 1991년~2015년 연도별 지하경제 규모를 추정해 발표했다. 연구팀은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때를 제외하고는 1991년부터 2015년까지 전 세계 지하경제 규모가 명확히 줄어들었다”고 밝혔다.

[S BOX] 한국 지하경제 줄어도 중국·베트남보다 커

IMF의 ‘전 세계 지하경제: 지난 20년간의 교훈’ 조사보고서에 따르면 국가별로는 2015년 기준 짐바브웨(67%)가 조사대상국 중 지하경제 규모 최대치를 기록했다. 조지아(53.07%), 나이지리아(52.49%), 가봉(52.01%), 미얀마(50.99%) 등이 상위권에 올랐다. 반면 스위스(6.94%)는 지하경제 규모가 가장 작았다. 미국(7%), 독일(7.75%), 네덜란드(7.83%), 호주(8.10%), 영국(8.32%), 캐나다(9.42%) 등도 10% 이하를 기록했다.

한국 주변국 중에서는 일본(8.19%)이 GDP 대비 지하경제 규모가 가장 작았고 싱가포르(9.2%), 중국(12.11%), 홍콩(12.39%), 베트남(14.78%)이 한국보다 작았다.

안종석 조세재정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선진국일수록 지하경제의 규모가 작게 측정되는데 이는 그만큼 경제 시스템이 치밀하게 갖춰져 있기 때문”이라면서 “예를 들어 미국은 푸드트럭도 허가제로 세금을 내고 영업하기 때문에 그렇지 않은 한국보다 지하경제 규모가 작을 수밖에 없다”라고 말했다.

세종=심새롬 기자 saero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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