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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속으로] 190㎝에 261㎏, 그녀는 왜 계속 먹었을까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2면

헝거

헝거

헝거
록산 게이 지음
노지양 옮김, 사이행성

“옛날 일을 왜 이제 와서….”

‘미투(#MeToo)’ 관련 기사에 꼭 한 번씩은 등장하는 댓글이다. 어렵사리 입을 연 피해자에게 되레 핀잔을 주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건 어떤가. 그때는 너무 어려서 자기가 당한 일이 무엇인지조차 알지 못했거나, 혹은 아무도 그 사건 이후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 건지 알려주지 않았더라면 그 역시 피해자의 책임이라고 할 수 있을까.

『헝거』는 성폭력 가해자를 향해 선뜻 ‘미투’라고 말하지 못했으나 마침내 말할 수 있게 된 한 여성의 이야기다. 아이티계 미국인으로 태어난 저자 록산 게이(44)는 12살 당시 자기가 사랑한다고 생각했던 소년과 친구들에게 집단 성폭행을 당한 뒤 자신의 삶이 어떻게 바뀌었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싫다”고 말하는 법을 몰랐던 소녀는 자신을 ‘아무렇지 않은’ 존재로 대했던 한 남자 때문에 점점 더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되어갔다.

마음속 커다란 동굴을 갖게 된 소녀는 ‘먹는 것’으로 그 공허함을 채우고자 했다. 작고 약하다는 이유로 파괴를 경험한 사람으로서 몸을 키우면 더 강하고 안전해질 것이라 믿었기 때문이다. 뚱뚱한 사람은 욕망의 대상이 되지 않으리라고 생각한 그는 자신의 몸을 점점 더 큰 방패로 만들기 위해 부풀렸고, 결국엔 키 190㎝에 최고 몸무게 261㎏(지금은 68㎏ 정도 적다)이라는 거대한 육체의 우리 안에 스스로를 가뒀다. 그가 느낀 허기와 몸을 만들어온 과정 자체가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몸부림이었던 것이다. 오죽하면 더 안전해지기 위해 동성애자로 살길 시도했을까.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녀의 방패는 또 다른 상처를 막는데 별다른 도움이 되지 못한다. 미국 사회에서 흑인인 데다 뚱뚱하기까지 한 여성은 삼중고를 겪는 탓이다. 여성학자 정희진은 추천사에서 “이것은 인종이나 젠더 문제라기보다는 몸이 계급성을 상징하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하여 그의 삶은 더욱 고단하다. 중상류층 가정 출신에 예일대에 진학한 그는 전형적인 흑인 서사에 부합하지 않기에 더 많은 시선과 반감을 유발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더 떨어질 나락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힘든 시간을 겪었던 그녀가 고통스러운 과거를 고백한 이유는 하나였다. ‘나와 당신에게 필요한 작업’이기에, 무너졌던 자신을 되돌리기 시작한 시점에, 아픈 상처들을 낱낱이 까발려 놓은 것이다. 그는 “너무나 자주 ‘그가 말했다’가 더 중요하게 취급되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가 아는 진실을 삼켜버리는 것”이라고 털어놨다. 자꾸만 삼키면 진실은 변질되기 마련이다.

부디 더 많은 진실이 감춰지기 전에 록산 게이처럼 더 많은 이들이 단단하게 뭉친 응어리를 토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 아직도 성폭력 피해자가 된 것이 내 잘못처럼 느껴진다면 저자의 어떤 책을 펼쳐도 도움이 될 것이다. 『나쁜 페미니스트』는 “핑크색을 좋아해도 페미니스트가 될 수 있다”고 용기를 북돋워 주고, 소설집 『어려운 여자들』에서는 다양한 형태로 왜곡된 여성상을 통해 현실을 비추어볼 수 있다. 그 속에서 더 많은 단어를 발견하게 될 수 있음은 물론이다. 아마존, 타임지 등 숱한 매체가 ‘올해의 책’으로 선정했다.

민경원 기자 storymi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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