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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석의 Mr. 밀리터리] 남북 합의, 전갈 독침 찔리는 개구리 되지 않아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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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북한 김정은 노동당 위원장을 만난 대북 특사단이 가지고 돌아온 남북 간 잠정 합의안에는 긍정적인 희망과 우려가 섞여 있다. 김 위원장의 솔직한 입장에 세계 언론과 전문가들이 처음엔 환영했지만 몇일 지난 뒤인 지금은 걱정을 내놓고 있다. 북한이 과거처럼 속임수를 반복할 가능성 때문이다. 합의안에는 보기에 따라 독소 조항으로 해석되는 부분이 있어서다. 북한의 비핵화 과정에서도 지뢰밭이 도처에 깔려있다.

독소 조항 가득한 남북 합의안 #철저한 검증 거쳐 정상회담 가야 #한반도 비핵화는 주한미군 철수 #북한 비핵화는 북핵만 제거 #평화협정은 한미동맹 이완 #김정은 통 큰 꼼수 안되길 기대

이번 대북 특사단 수석특사인 정의용 청와대 안보실장이 발표한 내용은 남·북 합의사항이라기보다 그동안 북한이 주장해온 기존 입장에 가깝다. 그래서 철저한 검증과정이 필요하다. 북한이 이번에도 약속한 비핵화를 실천하지 못하면 북한은 ‘삼진아웃’을 면할 수 없게 된다. 북한에 대한 마지막 기대인 셈이다. 지금은 3차 북핵 위기다. 국제사회는 1·2차 북핵 위기를 겪으면서 20여년간 북한 비핵화에 노력했지만 실패했다. 그 과정에서 북한에 대한 설득과 선의의 노력도 있었고 북한을 경제적으로도 지원했다. 2번이나 남북 정상회담을 가졌지만 성과가 없었다. 빅터 차 미국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 한국 석좌는 지난 7일 CSIS 소식지를 통해 “북한의 자세는 기존 입장에서 전혀 새로울 게 없다”며 “전술적 작전변경”이라고 평가했다. 문재인 대통령도 같은 날 여야 5당 대표와 만난 자리에서는 “(북한의) 핵폐기가 최종 목표”라며 “남북 정상회담이나 남북대화의 진전은 비핵화와 함께 가지 않으면 안 된다”며 성급한 진전을 경계했다.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남북이 합의한 6개 항목 가운데 가장 심각한 부분은 3항으로 사실상 주한미군 철수 요구다. ‘북측은 한반도 비핵화 의지를 분명히 했다’는 대목이다. 정 실장은 “김 위원장이 ‘한반도 비핵화’가 선대(김일성·김정일) 유훈이라 말했다”고 전했다. 하지만 북측이 요구하는 ‘한반도 비핵화’와 정부가 추진해온 ‘북한의 비핵화’의 속 내용은 정반대다. 정부의 기본 입장인 북한 비핵화는 단순히 북한의 핵능력만 제거하는 것이다. 이에 비해 북한이 말한 ‘한반도 비핵화’는 “주한미군을 포함해 한반도에 전개할 수 있는 미군의 전략적 핵능력까지 배제하라는 의미”라고 정영태 북한연구소장이 말했다. 미국은 북한의 대규모 남침 또는 핵공격에 대비해 한미동맹 차원에서 핵우산이 포함된 확장억제력을 한국에 제공한다고 매년 약속해왔다. 그런데 북한은 이러한 방어적인 조치를 위협으로 보고 있다. 미국의 확장억제력에는 한반도에 수시로 전개하는 B-52 전략폭격기와 핵추진 잠수함, 항공모함 등 미군 전략자산이 포함된다. 따라서 북한이 원하는 한반도 비핵화를 실천하려면 미군 전략자산 배제는 물론 주한미군까지 철수해야 한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이러한 북한의 생각을 수용하면 한·미 연합체제의 이완으로 이어진다. 그런 만큼 북한의 요구를 그대로 수용하기란 쉽지 않다.

3항의 두 번째 대목인 ‘북한에 대한 군사적 위협이 해소되고 북한의 체제안전이 보장된다면 핵을 보유할 이유가 없다’는 부분도 같은 맥락이다. 사실 북한이 핵을 포기하면 남북 간 재래식 전력의 균형이 가능하다. 미국이 북한을 선제타격할 이유도 없다. 미국의 대북 선제타격 방안은 북한이 핵무기로 한국과 주일미군, 미국을 공격하겠다고 여러 차례 협박했기 때문에 나온 것이다. 북한은 방어훈련인 한·미 연합군사훈련조차 ‘북침훈련’이라고 주민들에게 선전하고 있다. 따라서 북한은 미국을 위협 그 자체로 보고 있어 미국과 평화협정을 체결하고 싶어 한다. 평화협정이 체결되면 미·북 간 적대관계가 청산되기 때문에 한·미 연합체제도 있을 명분이 없어진다. 나아가 북한은 평화협정을 통해 미군을 한반도에서 밀어내려는 속셈도 있다. 1950년 한국전쟁 경험 때문이다. 당시 북한군은 부산까지 거의 점령할 뻔했다. 그러나 미국이 개입하는 바람에 한반도 공산화에 실패했다는 게 전쟁 후 북한의 자체 평가다.

이런 경험에 따라 북한은 1996년 미국과 평화협정 체결을 요구한 적 있다. 한·미는 2차 북핵 위기 때 북한의 요구를 받아들였다. 2005년 6자회담의 ‘9·19 공동성명’에서 북핵을 제거하는 대신 한반도 평화체제를 협상키로 했었다. 하지만 이 합의는 북한의 막판 도발로 물거품이 됐다. 이런 점을 감안해 정부는 북핵의 해결 고리가 평화협정을 통한 북한의 체제안전 보장에 있다고 보고 미·북 회담 중재에 나선 것이다. 그러나 미·북 평화협정을 체결하면 한·미 연합체제 이완이 필연적이라는 점을 우리로선 경계해야 할 중대 사안이다. 따라서 평화협정과 북한의 비핵화는 반드시 병행돼야 한다. 문 대통령이 말하는 로드맵도 이런 차원에서 짜야 한다.

5항의 두 번째 대목인 ‘북측은 핵무기는 물론 재래식 무기를 남측을 향해 사용하지 않을 것’이라는 부분은 사실상 협박이다. 북한은 상당한 수량의 핵무기를 생산했거나 조만간 생산해 배치할 전망이다. 북한은 이 핵무기로 한국을 공격할 능력이 있지만 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북한은 그러면서 지난해 핵을 장착한 대륙간탄도미사일(ICBM)로 미국을 타격하겠다고 했다. 이 둘을 합치면 북핵은 대남용이라기보다 미국 대응용이니 한국은 미국과 대화할 다리를 놔 달라는 뜻으로 볼 수 있다. 한국이 북한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으면 북한이 핵으로 우리를 공격할 수도 있다는 얘기로도 들린다. 16세기 일본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조선에 대해 명나라를 치는 데 필요한 길을 빌려달라는 정명가도(征明假道)와 유사한 말이다. 당시 조선이 일본의 요구를 거절하자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이를 빌미로 임진왜란을 일으켰다. 마찬가지로 북한이 노동미사일에 핵탄두를 달면 평택에 있는 주한미군을 공격하지 말란 법도 없다.

지금 남북 상황은 ‘전갈과 개구리’ 우화가 될 수도 있다. 내용은 이렇다. 우화는 전갈이 개구리에게 강을 건널 수 있게 해 달라는 부탁으로 시작한다. 그러나 개구리는 전갈이 독침으로 자신을 찌르지 않을까 두려워했다. 전갈은 독침으로 찌르면 개구리가 죽으면서 자신도 물에 빠져 죽게 될 테니 걱정 말라고 안심시킨다. 이 말에 개구리는 전갈을 등에 태워 준다. 하지만 강을 반쯤 건넜을 때, 전갈은 개구리를 찌르고, 둘 다 죽는다. 개구리가 왜 찔렀느냐고 물었다. 전갈은 설명했다. “나는 전갈이야. 그게 내 본성이다.” 우화 속의 전갈은 아직은 핵의 광기로 가득 찬 북한 체제다. 특사단의 방북으로 얻은 성과를 잘못 처리하면 전갈과 개구리 우화의 어리석음을 범할 소지가 있다는 뜻이다. 정부는 맹독을 가진 전갈을 상대하며 신중하게 정상회담을 준비하길 기대한다. 전향적인 행보를 시작한 김정은 위원장도 통 큰 행동을 통 큰 꼼수로 변질시키지 않길 바란다.

김민석 군사안보연구소장 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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