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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택희의 맛따라기]‘냉·부’ 초대손님 울린 정호영 셰프의 손맛…연희동 ’카덴’ 점심 한 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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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희동 ‘이자카야 카덴’이 어제(3월 8일)부터 점심 식사를 한다. 맛으로는 이미 정평이 난 저녁 음식 12가지를 양을 줄이거나 작게 만들어 밥·국과 함께 한 상 개념으로 나무쟁반에 차려낸다. 이름은 ‘카덴 정식’, 값은 2만5000원이다. 지난 3월 3일 오후 시식용으로 차린 최초의 ‘카덴 정식’.

연희동 ‘이자카야 카덴’이 어제(3월 8일)부터 점심 식사를 한다. 맛으로는 이미 정평이 난 저녁 음식 12가지를 양을 줄이거나 작게 만들어 밥·국과 함께 한 상 개념으로 나무쟁반에 차려낸다. 이름은 ‘카덴 정식’, 값은 2만5000원이다. 지난 3월 3일 오후 시식용으로 차린 최초의 ‘카덴 정식’.

그의 눈에 힘이 들어가기 시작했다. 평소에도 크던 눈동자가 더 커 보였다. 언뜻 핏기도 감돌았다. 점점 어쩔 줄 몰라 하는 표정이 되더니 끝내 낙루(落淚). 끓어오르는 울음을 꿀컥 삼키고 얼굴을 양손으로 가리며 눈물을 감추려 했으나 돌아서서 소리 내 울고 말았다.

치매 아버지 생각에 방송 도중 펑펑 울어
지난 5일 밤 방송된 JTBC ‘냉장고를 부탁해’ 프로그램 말미에 벌어진, 방송에서 보기 드문 진풍경이다. 돌발사태였지만 이토록 가슴 아픈 눈물 화면은, 내 경험으로는 1983년 한국방송공사(KBS)의 이산가족찾기 생방송 이후 처음이다. 주인공은 ‘냉·부의 댄싱머신’ 정호영(42) 셰프다.

자신이 해준 음식을 먹고 초대손님인 배우 박철민씨가 어머니를 회상하며 울자 지켜보던 정호영 셰프도 얼굴이 굳어지더니 눈시울이 붉어지기 시작했다. [JTBC 화면 캡처]

자신이 해준 음식을 먹고 초대손님인 배우 박철민씨가 어머니를 회상하며 울자 지켜보던 정호영 셰프도 얼굴이 굳어지더니 눈시울이 붉어지기 시작했다. [JTBC 화면 캡처]

정호영 셰프는 끝내 울음을 참지 못했고 고개를 돌려 눈물을 닦았다. 내막을 아는 내가 보기에는 닦기보다 터져 나오는 눈물을 막고 있는 듯 보였다. [JTBC 화면 캡처]

정호영 셰프는 끝내 울음을 참지 못했고 고개를 돌려 눈물을 닦았다. 내막을 아는 내가 보기에는 닦기보다 터져 나오는 눈물을 막고 있는 듯 보였다. [JTBC 화면 캡처]

터진 눈물은 울음으로 이어졌다. 막아도 자꾸 터져 나오는 울음을 감추려고 무대 뒤쪽으로 등을 돌리는 정호영 셰프. [JTBC 화면 캡처]

터진 눈물은 울음으로 이어졌다. 막아도 자꾸 터져 나오는 울음을 감추려고 무대 뒤쪽으로 등을 돌리는 정호영 셰프. [JTBC 화면 캡처]

이날 초대손님은 ‘애드리브(ad lib)로는 세계적 명배우’라는 박철민씨였다. 희망 음식 주제는 ‘엄마손 밥상’이었다. 정호영은 샘 킴과 대결을 벌였다. 정 셰프는 ‘맘스텔라’라는 제목으로 ▷일본식 즉석 카스텔라 ▷조기매운탕(※박철민은 고향에서 ‘조기지짐’이라 했다고) ▷찐 가지 무침을 준비했다. 박씨 어머니가 예전에 해주던 추억의 음식들이다.

정호영 셰프가 초대손님 박철민씨를 위해 차린 엄마손 밥상 ‘맘스텔라’. 조기매운탕, 찐 가지무침, 옛날식 카스텔라는 박씨가 그리워하는 어머니의 음식이다. 어머니가 치매를 앓고 있어 다시는 맛볼 수 없게 됐다. 정 셰프의 아버지도 현재 치매여서 두 사람은 같은 아픔을 안고 있다. [JTBC 화면 캡처]

정호영 셰프가 초대손님 박철민씨를 위해 차린 엄마손 밥상 ‘맘스텔라’. 조기매운탕, 찐 가지무침, 옛날식 카스텔라는 박씨가 그리워하는 어머니의 음식이다. 어머니가 치매를 앓고 있어 다시는 맛볼 수 없게 됐다. 정 셰프의 아버지도 현재 치매여서 두 사람은 같은 아픔을 안고 있다. [JTBC 화면 캡처]

카스텔라는, 설탕도 안 넣고 소는 없이 커다랗게 부풀어 오르는 밀가루 빵만 늘 쪄주던 어머니가 언젠가 한 번 밀가루에 베이킹파우더를 넣어 만들어준 적이 있다고 한다. 그때 아들은 어머니가 맛있는 빵을 만들 줄 모르는 게 아니고 돈이 없어 못 하는 것임을 깨달았다. 얘기를 듣고 정 셰프가 일본에서 배운 옛날식 ‘5분 카스텔라’라며 즉석에서 전 부치듯 만들었다.

3월 5일 방송된 JTBC ‘냉장고를 부탁해’의 초대손님인 배우 박철민씨가 정호영 셰프가 준비한 음식을 먹으면서 어머님 생각에 울컥해 흘린 눈물을 닦고 있다. [JTBC 화면 캡처]

3월 5일 방송된 JTBC ‘냉장고를 부탁해’의 초대손님인 배우 박철민씨가 정호영 셰프가 준비한 음식을 먹으면서 어머님 생각에 울컥해 흘린 눈물을 닦고 있다. [JTBC 화면 캡처]

정호영 셰프가 해준 음식에 감격해 흐르는 눈물을 손으로 닦으며 얼굴을 가린 박철민씨. [JTBC 화면 캡처]

정호영 셰프가 해준 음식에 감격해 흐르는 눈물을 손으로 닦으며 얼굴을 가린 박철민씨. [JTBC 화면 캡처]

박씨는 음식을 맛보면서 “맛있습니다”를 연발하더니 “어머니가 해주던 음식과 똑같다”면서 눈언저리가 조금씩 젖어가기 시작했다. 조기매운탕 국물을 한술 뜨면서 “어머니가 선생님이어서 아침 시간이 늘 바빠 할머니가 많이 도와주셨다. 이 매운탕 국물은 어머니의 맛에 할머니 맛까지 그대로다”라고 말할 때는 목소리가 갈라지고 휴지를 찾아야 했다. 지문처럼 변하기 어려운 모성 입맛이 어머니를 향한 그리움과 애절함을 폭발시켜 눈물샘을 결국 통제 불능에 빠트렸다.

다시 먹을 수 없게 된 어머니의 손맛 선사
박씨 어머니는 뇌졸중 후유증으로 치매가 와서 인지능력이 현재 3~4세 어린이 수준이라고 한다. 아들이 배 내놓고 잔다고 커다란 국어사전을 펼쳐 덮어준 적도 있다. 어머니 손맛이 깃든 음식을 이제 다시는 맛볼 수 없게 된 것이다. 그런데 정 셰프가 해준 세 가지 음식에 어머니 품처럼 영혼을 쓰다듬어주는 그리운 맛이 고스란히 녹아있었고, 할머니 솜씨까지 맛보니 눈물을 참을 수 없었다.

그걸 지켜보던 정 셰프도 동병상련(同病相憐). 아버지가 시골에서 올라와 서울에서 자리 잡고 자식들 키우느라 고생을 지독하게 했는데, 아들이 초심 흔들리지 않고 한 우물을 파며 열심히 한 덕에 조금 살 만해지자 치매가 왔다. 처지가 같으니 음식을 먹는 사람도, 만든 사람도 함께 울고 말았다. 애타는 사모곡(思母曲)이요, 사부곡(思父曲)이다.
미각의 뿌리를 거슬러 올라가면 두 사람은 동향이다. 박씨는 광주광역시 출신이다. 정 셰프 부모는 광주와 경계를 맞댄 화순(아버지)·담양(어머니)이 고향이고, 어머니는 서교동에서 식당을 40년 운영했다. 포장마차로 시작해서 차곡차곡 일군 한식 밥집이었다.

방송 사흘 전, 이틀 전, 그리고 당일 그를 만났다. 부인 강은영씨에 따르면 두 사람은 화면에 나온 것보다 프로그램 녹화장에서 훨씬 오래, 더 진한 눈물을 뿌렸다고 한다. 녹화 다녀온 남편 얼굴이 울어서 퉁퉁 부어있었다. 집에 와서도 터져 나오는 울음을 참지 못하고 한동안 통곡했다.

이자카야·로바다야키·우동 '카덴' 매장 3곳
부인 얘기를 듣고, TV 화면에 비친 눈물을 보면서 내 머리에는 4년 동안 그의 음식점에 출입하면서 알게 된 그의 사람됨과 살아온 역정이 그림처럼 떠올랐다. 내가 정 셰프의 ‘카덴’ 음식을 믿는 이유다. 회·구이·조림·튀김·우동, 그밖에 다양한 단품 음식을 막론하고 맛으로 실망하게 하는 일이 없다.

연희동 ‘카덴’ 입구. 우동과 구이를 하는 1층은 40석, 점심에 ‘카덴 정식’을 하고 저녁엔 이자카야로 운영하는 2층은 70석 규모다. 출입문에 2018년 ‘미슐랭 가이드 서울’의 ‘더 플레이트’ 표지와 5년 연속 받은 ‘블루리본’이 붙어있다.

연희동 ‘카덴’ 입구. 우동과 구이를 하는 1층은 40석, 점심에 ‘카덴 정식’을 하고 저녁엔 이자카야로 운영하는 2층은 70석 규모다. 출입문에 2018년 ‘미슐랭 가이드 서울’의 ‘더 플레이트’ 표지와 5년 연속 받은 ‘블루리본’이 붙어있다.

그는 현재 ‘카덴’이라는 이름으로 2곳에서 3개의 매장을 운영하고 있다. ▷이자카야·로바다야·우동 카덴(서울 서대문구 연희로 173 거화빌딩 1, 2층/전화 02-3142-6362, 02-337-6360) 오전 11시30분~오후 10시. 1층은 우동과 구이를 하고, 2층은 이자카야로 운영한다. 저녁에는 주로 주점으로 운영하는데, 2층에서 모든 메뉴를 맛볼 수 있다. 손님이 많으면 같은 음식으로 1층에서도 술을 마실 수 있다. ▷우동카덴(서울 마포구 양화로7안길 2-1/전화 02-6463-6362) 오전 11시 30분~오후 10시. 저녁에는 연희동처럼 음식이 다양하지는 않지만 간단하게 술도 마실 수 있다. 양쪽 다 오후 3시~5시 30분 준비시간이 있고, 일요일엔 쉰다.

연희동 ‘카덴’ 1층 내부.

연희동 ‘카덴’ 1층 내부.

연희동 ‘카덴’ 2층 내부.

연희동 ‘카덴’ 2층 내부.

2018년 『미슐랭 가이드 서울』은 ‘카덴’에 ‘더 플레이트(The Plate)’ 픽토그램을 주면서 “신선한 재료로 만든 수준 높은 요리를 합리적인 가격에 제공하는 레스토랑”이라고 평가했다. 파리에서 2016년 처음 적용한 ‘더 플레이트’는 ‘좋은 요리를 맛볼 수 있는 레스토랑’이라는 의미로, 서울에는 올해가 처음인데 101곳이 받았다. 그보다 위 등급인 ‘빕 구르망’은 48곳, 별은 24곳이다.

연희동 '카덴'서 어제부터 모둠요리 점심
나흘 사이 그를 세 번이나 만난 건 연희동 ‘이자카야 카덴’이 그간 점심에는 열지 않다가 8일부터 한 상 차림의 점심을 한다는 소식이 있어서다. 메뉴 이름은 ‘카덴 정식’(2만5000원), 오사카 ‘겐지’의 점심 도시락을 벤치마킹했다고 한다. 이틀은 준비과정을 확인하면서 시식했고, 하루는 사진 보충 촬영을 했다.

정호영 셰프가 ‘카덴 정식’에 올라가는 ‘붕장어 봉초밥’에 쓸 붕장어를 하루 전 술을 탄 물에 익히고 있다.

정호영 셰프가 ‘카덴 정식’에 올라가는 ‘붕장어 봉초밥’에 쓸 붕장어를 하루 전 술을 탄 물에 익히고 있다.

2가지 시식 상차림을 참관하고 맛을 보았다. 1인분씩 차려 나오는 4각 나무쟁반에 오른 음식들을 살펴보니 이랬다. ▷요리 8가지: 회(참치·도미·광어·연어·단새우), 옥돔구이, 붕장어 봉초밥, 송로버섯 슬라이스와 메추리알을 날로 올린 육회, 단포박 퓌레에 얹은 문어조림, 피조개와 쪽파 초된장무침, 에스카르고 방식으로 조리한 소라버터구이, 새우크림고로케. ▷반찬(츠케모노) 3가지 모둠: 한 그릇에 담은 우엉초절임·잔멸치조림·갓지. ▷후식 2가지: 달걀에 새우를 갈아 넣고 부친 달걀말이 교꼬, 데쳐 시럽에 절인 방울토마토 젤리.

동시에 차려진 ‘카덴 정식’ 최초 상차림의 이란성 쌍둥이.

동시에 차려진 ‘카덴 정식’ 최초 상차림의 이란성 쌍둥이.

여기에 밥과 미소된장국이 따라 나왔다. 다른 상에는 음식 가짓수는 같고, 옥돔구이 대신 삼치구이, 육회 대신 메추리알 프라이를 얹은 츠쿠네(완자), 소라버터구이 대신 성게 알을 올린 자완무시(계란찜), 새우크림고로케 대신 새우튀김이 올라왔다.

접시들을 살펴보면 대개 이 집의 저녁 인기 요리들을 골라 미니어처로 만든 것들이다. 손이 안 가는 음식은 올리지 않는다는 방침으로 요리 하나하나 신경을 써서 준비했다. 저녁에 안주로 호평을 받은 음식들이니 작게 만들어 점심상에 올라도 맛은 정평 그대로다. 반주 한 잔이 생각나는 게 대낮 상차림으로는 흠이라면 흠이겠다. 한 상에 차리는 내용은 계절과 재료 수급에 따라 매일 조금씩 달라진다.

지난 3일 오후 ‘카덴 정식’을 처음 차려보는 정호영 셰프가 송로버섯을 육회에 갈아 넣고 있다.

지난 3일 오후 ‘카덴 정식’을 처음 차려보는 정호영 셰프가 송로버섯을 육회에 갈아 넣고 있다.

밤톨 크기의 송로버섯.

밤톨 크기의 송로버섯.

많은 도상작전 끝에 처음으로 ‘카덴 정식’ 두 상을 차리면서 생각에 잠긴 정호영 셰프.

많은 도상작전 끝에 처음으로 ‘카덴 정식’ 두 상을 차리면서 생각에 잠긴 정호영 셰프.

‘카덴 정식’ 첫 상 2개가 차려졌다. 저 상태에서 밥·국·간장만 올리면 완성이다. 정호영 셰프가 밥·국을 준비하라고 지시하는 사이 작업에 참여한 스태프들은 기록을 남기려고 사진을 찍고 있다.

‘카덴 정식’ 첫 상 2개가 차려졌다. 저 상태에서 밥·국·간장만 올리면 완성이다. 정호영 셰프가 밥·국을 준비하라고 지시하는 사이 작업에 참여한 스태프들은 기록을 남기려고 사진을 찍고 있다.

저녁 안주요리 미니어처들로 한 상 구성
작은 음식들을 사각 나무쟁반 안에 정연하게 차리려고 맞춤한 그릇들을 일본에 가서 새로 사 왔다. 쟁반에 오른 그릇은 11개인데, 모양이나 색이 오밀조밀하고 같은 게 없어 형형색색 펼치는 그릇들의 잔치도 볼만하다. 얼핏 보기에는 음식이 적은 듯하지만 먹고 나면 속이 든든하다.

‘카덴 정식’을 위해 모두 일본에서 새로 사온 그릇들. 모양이나 색이 같은 게 하나도 없다.

‘카덴 정식’을 위해 모두 일본에서 새로 사온 그릇들. 모양이나 색이 같은 게 하나도 없다.

정 셰프는 “일본으로 유학 가기 전 일식당에서 일했는데 그 시절 한국형 일식에는 아주 다양한 음식이 상에 나갔다. 나갔다가 손 한번 안 거치고 그냥 주방으로 돌아오는 메뉴도 많았다. 그걸 버리는 게 너무 아까웠다. 음식 종류를 줄이고 중심 요리를 더 잘하면 음식은 더 맛있고, 재료도 아끼고, 버리지 않게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많이 했다. 이자카야는 단품으로 나가니까 그런 일이 없는 게 장점이다. 이자카야가 그래서 좋다. 이자카야에서 검증받은 음식들로 점심상을 차린다”고 배경을 설명했다.

개정되는 노동법규도 또 다른 이유다. 법이 바뀌면 밤 10시 이후나 휴일 영업을 하면 직원들 시간 외 수당을 올려줘야 해서 인건비가 대폭 늘어나게 됐다. 그래서 자정까지 하던 야간영업을 10시까지로 줄이고, 이전에는 하지 않던 점심시간에 문을 열기로 했다. ‘카덴’에는 직원이 20명 넘는다.

'카덴' 상호는 일본문화 전공한 부인 작품
상호를 ‘카덴[花傳]’으로 정한 사람은 일본에서 일본문화를 전공한 부인이다. 2007년 유학생 둘이 일본에서 결혼했을 당시 정 셰프는 츠지조리사전문학교의 본과에 해당하는 ‘일본요리연구소’ 과정에 다녔다. 수업은 학생들이 요리사·손님·홀서빙 역할을 돌아가며 매일 실습으로 한다. 음식 만드는 조와 손님 역할 조가 하루건너 바뀌는데 음식 하는 조 멤버들은 돌아가면서 대표로 오늘의 음식을 설명한다.

연희동 ‘카덴’ 2층 입구의 벽 장식. 미슐랭 가이드 ‘더플레이트’표지와 츠지조리사전문학교의 교표가 정호영 셰프의 자부심을 보여준다.

연희동 ‘카덴’ 2층 입구의 벽 장식. 미슐랭 가이드 ‘더플레이트’표지와 츠지조리사전문학교의 교표가 정호영 셰프의 자부심을 보여준다.

‘카덴’이라는 용어는 츠지에서 실습실 이름으로 쓴 것보다 연원이 훨씬 깊고, 문화적 함의도 크다. 조선왕조 개국 무렵인 1400년 전후에 쓴 책 『후시카덴(風姿花傳)』에서 유래한 말이다.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전통 예능인 노[能]라는 가면극의 최초·대표 이론서다. 노의 이론과 연희의 기틀을 완성한 제아미(世阿彌, 1363-1443 ?)가 자신의 오랜 연희 경험과 아버지 간아미(觀阿彌)에게 물려받은 가르침을 토대로 당시까지 전승되던 노의 이론을 집대성했다. 500년이나 비전(秘傳)돼 오다가 20세기 초에 와서야 출간돼 세상에 널리 알려졌다.

김충영 교수(고려대 일문학)는 “무대에서 예술의 ‘꽃’을 피우기 위해 연기자들이 가져야 할 올바른 ‘수련’ 태도를 제시한 책”이라고 설명하고, 제목은 “풍자(風姿)는 예술적으로 표현된 연기의 모습을 의미하므로, 예술적 매력이 있게 연기의 꽃을 피우기 위해 연기자들이 알아야 할 비결을 써서 전한다는 뜻”이라고 해석했다. 음식점 ‘카덴’도 꽃을 피우듯 맛있고 아름다운 요리를 해서 손님에게 전하겠다는 다짐을 담은 작명으로 봐도 좋겠다.

서교동서 한식당 40년 한 어머니 업 이어
서교동에서 태어나고 자란 정 셰프는 학창시절 공부에 별 관심이 없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군대에 자원입대했다. 1998년 제대했는데 마침 외환위기로 IMF 구제금융을 받았을 때라 실업자 홍수가 나고, 공원과 거리에는 노숙자가 넘쳐났다. 막막했다. 뭘 할까 고민이 많았다.

어머니는 서교동에서 40년 동안 음식점을 했다. 지금 기준으로는 법을 어기는 일이지만 어려서는 어머니 심부름으로 골목 수퍼에 가서 소주·맥주를 사 세발자전거 뒤에 실어 나르기도 했고(동네 어른들의 후일담), 좀 자라서는 일요일마다 어머니 식당 바닥 물청소를 했다. 중학교 2학년 때까지 식당과 살림집이 한 곳에 있었다. 자란 환경이 그랬다.

‘카덴’의 대표 음식인 모둠회 4인용. 18가지 회가 올라왔다.

‘카덴’의 대표 음식인 모둠회 4인용. 18가지 회가 올라왔다.

버크셔K 돼지고기 간장구이.

버크셔K 돼지고기 간장구이.

문어초회.

문어초회.

어머니가 식당을 하니까 너도 요리하면 어떻겠냐고 어느 날 누나가 말했다. 어떻게 시작할지 막연해 일단 요리학원을 찾아가 등록했다. 1999년 한식·양식 조리사 자격증을 따고 어머니 식당에서 일했다. 얼마 안 있어 어머니 식당에서는 언제라도 일할 수 있으니 보다 넓은 세상으로 나가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인 소개로 홍익대 앞에 있는 일식 스타일 선술집에 들어가 3년을 근무했다. 회는 없고 튀김이나 조림 같은 음식만 하는 집이었다. 중간에 주방장이 나가는 바람에 음식 만드는 걸 제대로 배우지도 못하고 주방을 책임지게 됐다. 갑자기 중책을 맡으니 능력의 한계를 빨리 깨달았다. 책을 찾아보고, 돌아다니면서 많이 먹어봐도 실제 해보는 게 아니어서 배우는 데 한계가 있었다.

일식집 일하다 본토 요리 궁금해 유학 길에
3년을 꾸준히 근무하면서 일식을 정통으로 배우고 싶다는 뜻을 비치자 사장이 성실하게 일해줘서 고맙다며 수준이 약간 높은 음식점으로 가도록 주선해줬다. 호텔 일식당 주방장 출신이 일산 밤가시마을 일식집들이 모여있는 거리에 연 음식점이었다. 2년을 일했다. 90㎏이었던 몸무게가 3개월 만에 65㎏까지 빠졌다. 오전 9시 출근인데 남보다 1시간 먼저 나가려고 7시에 집에서 나가면 자정이 돼서야 집에 돌아왔다. 2년을 버티면서 너무 힘이 들었다. 쌓인 눈 속에서도 새싹이 돋듯, 그런 가운데도 새로운 욕심이 생겼다. 일식 본토에서는 요리를 어떻게 하는지 궁금해졌다.

유학을 결심하고 2004년 10월 오사카로 갔다. 요리사를 하려면 요리하기 전에 그 나라 말과 문화를 알아야 음식문화도 깊이 있게 공부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츠지조리사전문학교에 들어가려면 6개월의 어학연수나 일본어능력시험 2급을 취득하면 되지만 일본어를 더 잘하기 위해 1년 6개월간 어학연수를 받았다. 학교의 모든 수업이 일본어로 진행되니까 언어를 충분히 익히고 들어가야 더 빠르게 깊게 배울 수 있겠다는 판단 때문이다. 어학연수 중 일본문화를 공부하러 온 제주도 출신 아내를 알게 돼 공부 막바지이던 2007년 일본에서 약식으로 결혼식을 올렸다.

그 사이에도 돈을 벌어야 했다. 집에서 학비를 댈 형편이 못 됐다. 한국 동포가 운영하는 야키니쿠 전문점에서 3년 동안 일했다. 경력이 있어서 돈을 후하게 받았다. 2년 동안은 수산시장에서 생선 손질해주는 가게에서 무보수로 일했다. 배우고 싶어 자청했다. 처음엔 잘 몰랐는데 알고 보니 자연산 고급어종을 주로 취급하는 유명한 곳이었다. 일본은 생선을 통으로 사다가 음식점에서 손질해 회를 뜨기보다, 회 뜨기 직전 상태로 손질한 생선을 사다가 쓰는 경우가 많다.

생선가게 무보수 일하며 솜씨·안목 수련
학기 중에는 주말에만 하고, 방학 때는 매일 일을 했다. 일하면서 보니 오사카 일대에서 유명한 음식점들이 이곳의 단골손님이었다. 미슐랭 별을 받은 음식점도 여럿이었다. 어느 날 츠지에서 특강이 열렸는데 강의하러 온 사람도 그 가게 손님이었다. 여기서 일하면서 생선을 보는 안목이나 손질법을 많이 배웠다.

츠지의 수업과정은, 처음 1년은 의과대학의 예과와 같다. 일본·중국·프랑스·이탈리아 요리를 전반적으로 배운다. 1년만 하는 사람도 많다. 하지만 1년을 마치고 보니 기대보다 수준이 높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공부를 마치기에는 아쉬움이 남았다. 본과에 해당하는 츠지 일본요리연구소 1년 과정에 다시 들어갔다.

정호영 셰프가 일본에서 츠치조리사전문학교 1년을 마치고 취득한 오사카부 조리사면허증.

정호영 셰프가 일본에서 츠치조리사전문학교 1년을 마치고 취득한 오사카부 조리사면허증.

정호영 셰프가 츠지조리사전문학교 1년 수료 후 고급 과정인 ‘일본요리연구과정’에 들어가 다시 1년을 마치고 받은 졸업장. 정 셰프는 졸업식 때 그해 외국 학생으로는 유일하게 성적 우수상을 받았다.

정호영 셰프가 츠지조리사전문학교 1년 수료 후 고급 과정인 ‘일본요리연구과정’에 들어가 다시 1년을 마치고 받은 졸업장. 정 셰프는 졸업식 때 그해 외국 학생으로는 유일하게 성적 우수상을 받았다.

여기서는 1년 내내 가이세키[會席] 요리 실습만 한다. 수업은 2개 조로 나눠 역할극으로 진행한다. 한 조는 요리사와 홀 직원, 다른 조는 손님 역을 맡는다. 손님 역할을 하는 날은 오전에 이론수업을 듣고, 점심으로 동료들이 한 음식을 먹은 다음, 오후에는 내일 준비할 음식에 대해 멤버들과 회의를 한다. 모든 생각과 생활이 요리에 집중될 수밖에 없게 수업과정이 짜였다.

마지막 학기 삭발 투혼…성적 우수상 받아
2학기 들어서는 삭발을 단행했다. 이용비도 아끼면서 공부를 야무지게 하겠다는 각오를 다졌다. 한 업소에 취업했다는 마음으로 수업에 임했다. 누구보다 일찍 등교해 몸을 풀고 구상도 하면서 수업 준비를 했다. 부지런히 하자 공부 진척이 빨랐다. 10대 학창시절에는 공부에 흥미도 없고 잘하지도 못했는데 요리학교 공부는 재미있고 성과도 좋았다. 연구소 과정 1년 동안 실기와 이론 평가를 합쳐 그 해에 외국인으로는 유일하게 졸업식장에서 성적 우수상을 받았다.

2008년 4월 졸업하면서 바로 귀국했다. 3년 6개월 만이다. 일자리를 알아보는데 쉽지 않았다. 일본 유학을 했다고 하니 대우를 어떻게 해야 할지 부담스러워했다. 츠지 졸업장을 들고 압구정·청담·논현동 일대 음식점을 찾아다니며 이력서를 냈지만 연락은 오지 않았다. 우여곡절 끝에 일본인 주방장이 있는 강남의 가이세키 음식점에 들어갔다. 급여가 형편없었다. 액수를 말하면서 기사에는 쓰지 말아 달라고 했다. 3개월 지나면 80%를 올려주기로 하고 일을 시작했는데 경영이 어렵다는 이유로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결혼도 했는데 생활급이 안 돼 나올 수밖에 없었다.

도미머리찜.

도미머리찜.

굴만두.

굴만두.

그해 추석 임박해 ‘초밥왕’ 안효주(60) 셰프가 운영하는 청담동 ‘스시 효’에 자리가 나 이력서를 내고 입사했다. 안 셰프 아래서 과장으로 1년 동안 스시를 제외한 주방 요리 전반을 담당했다. 명인의 큰 그늘 아래서 많은 걸 배웠다. 음식 말고도 배울 점이 많았다. 좋은 재료를 쓰되 아끼고 소중히 다루는 자세를 우선 본받아야 했다.

안효주 셰프 가르침 "요리보다 사람됨 먼저" 
그분은 ‘내가 음식점을 내면 이렇게 해야겠다’고 막연히 생각하던 것들을 이미 적용하고 있었다. 가령 직원들 식사도 중국산이나 싼 재료 쓰지 않고 좋은 재료로 잘해서 먹였다. 대신 재료를 손질하다가 잘못해 손실이 나면 크게 야단을 쳤다. 허실(虛失; 헛되이 잃음) 없이 아껴 쓰면 비용을 절약해 더 좋은 재료를 쓸 수 있지 않겠냐, 그런 논리였다. 날마다 새벽시장에 나가고, 좋은 재료를 찾아 전국을 찾아다니는 걸 보면서 많이 느끼고 배웠다.

감태 후토마끼.

감태 후토마끼.

감태 후토마끼 단면.

감태 후토마끼 단면.

김 후토마끼.

김 후토마끼.

그분에게 처음 받은 가르침이자 가장 큰 가르침은 “사람이 회를 잘 썰면 얼마나 잘 썰겠나. 먼저 사람이 돼야지. 요리와 손님에 대한 마음가짐이 제대로 안 돼 있으면 음식 아무리 잘해도 소용없다”는 말이었다. 음식을 계속하면서 생각해봐도 참 옳은 가르침이라는 걸 뼈저리게 느낀다.

안주용 치킨 가라아게.

안주용 치킨 가라아게.

두릅튀김.

두릅튀김.

2009년 9월 27일 부족하지만 작아도 내 뜻을 펼칠 음식점을 하고 싶어서 유학 동기 2명과 망원동에 ‘카도야’라는 이자카야를 냈다. 동업이지만 첫 가게였다. 동업의 한계 때문인지 생각처럼 되지는 않았다. 3년 만에 발을 빼고 2012년 8월 서교동에 ‘카덴’을 열었다. 우여곡절이 없지 않았지만 ‘카덴 시대’의 개막이었다.

야심차게 냈던 스시집 6개월 만에 거덜
2012년 3월 스시 전문점을 접고 그 자리에 ‘이자카야 카덴’을 차렸다. 돈은 들어오는 게 없는데 직원들 월급 주고 스시 재료 사들이고 하다 보니 그 무렵 빚이 1억을 넘어갔다. 부부는 지금도 “그때 고생 엄청 했다”고 회상한다. 어느 날은 밥도 못 먹고 온종일 돈 구하러 다니다가 자정쯤 집에 들어와 컵라면 하나씩 먹고 잔 적도 있다고 했다.

모든 우동에 따라 나오는 일본식 붉고기덮밥. 정 셰프는 일본 유학 때 오사카 야키니쿠 음식점에서 3년간 아르바이트를 했다.

모든 우동에 따라 나오는 일본식 붉고기덮밥. 정 셰프는 일본 유학 때 오사카 야키니쿠 음식점에서 3년간 아르바이트를 했다.

이자카야였지만 가게를 알리기 위해 점심 영업을 했다. 돈가스·우동이 주메뉴였다. 오전 9시에 나와 다음날 오전 2시까지 영업하고 집에 들어가면 3시에 잠이 들었다. 하루 3~4시간만 자면서 독하게 하니까 서서히 손님이 늘었다. 가을쯤 되니 손님들이 줄을 서기 시작했다. 저녁 내내 빈자리가 없었다. ‘카덴 시대’가 활짝 열렸다.

굴우동.

굴우동.

버크셔K 우동.

버크셔K 우동.

돈카츠카레우동.

돈카츠카레우동.

새우크림우동.

새우크림우동.

이자카야로 전환 몇달 지나 손님들 줄 서

호사다마(好事多魔; 좋은 일에는 흔히 방해되는 일이 많음)일까, 그럴 때 사고가 났다. 통으로 들어온 생참치를 손질하다가 회칼이 집게손가락 뼈에 박히는 깊은 상처를 입었다. 왼손을 한동안 쓸 수 없어 점심을 중단했다. 사실 점심 영업은 음식점을 알리는 차원에서 운영해 수익은 거의 나지 않았다. 이참에 저녁 메뉴에 더 집중하려고 정리했다.

우동 팀장이 제면실에서 국수 무게를 저울에 달아 나누고 있다.

우동 팀장이 제면실에서 국수 무게를 저울에 달아 나누고 있다.

삶아 찬물에 헹궈서 갓 건져낸 우동 가닥. 특별한 배합의 반죽을 치대고 숙성해 발로 밟아 뽑은 족타면은 부드럽고 탱탱하면서 쫄깃해 밀가루가 재료라는 사실을 잊게 만든다.

삶아 찬물에 헹궈서 갓 건져낸 우동 가닥. 특별한 배합의 반죽을 치대고 숙성해 발로 밟아 뽑은 족타면은 부드럽고 탱탱하면서 쫄깃해 밀가루가 재료라는 사실을 잊게 만든다.

명란우동(냉)

명란우동(냉)

명란계란우동.

명란계란우동.

2014년 2월에는 일본에 있을 때 자주 다닌 우동 집에 근무하던 츠지 후배를 불러 ‘우동 카덴’을 열었다. 통통하고 부들부들하고 쫄깃한 면발의 족타(足打) 우동은 금세 사람을 불러모았다. 나도 그 무렵 ‘카덴’의 단골이 되었다. 주로 ‘우동 카덴’에 다녔다. 그해 10월에는 서교동사거리 부근에 구이를 전문으로 하는 ‘로바다야 카덴’을 냈다. 돈을 많이 벌어서 확장한 것은 아니다. 분야별로 별도의 가게를 구상했다. ‘수익은 못 내도 좋으니까 일단 해봐라’ 하며 팀장들을 내보내 운영하게 했다. 그랬더니 하나둘 자기 가게를 하겠다며 나갔다. 한꺼번에 10명이 나간 적도 있다. ‘카덴’을 거쳐 간 사람들은 대부분 지금 다른 곳에서 이름난 자기 음식점을 하고 있다.

카키아게우동.

카키아게우동.

청어(니싱)우동.

청어(니싱)우동.

샐러드우동(냉).

샐러드우동(냉).

또 한 번의 계기가 찾아왔다. 정 셰프 개인으로 보자면 ‘카덴 시대’를 넘어 ‘정호영 시대’를 열게 된 것이다. 2015년 추석 직후부터 JTBC ‘냉장고를 부탁해’에 출연하게 됐다. 이 무렵 서교동 ‘카덴’ 건물주의 횡포는 더 참아내기 어려웠다. TV에 정기적으로 출연하면 매장을 한곳에 모아야 효율적이겠고, 프로그램의 체면을 깎지 않으려면 음식의 품질과 수준도 더 신경을 써야 했다. 손님들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요리 품질은 떨어뜨리지 않으면서 집약적으로, 디테일하게 관리하기 위해 2016년 4월 현재의 연희동으로 가게를 옮겼다.

'냉장고를 부탁해' 지난해 종합승률 3위 
연희동 ‘카덴’은 역세권이나 핵심 상권에서 많이 벗어나 있지만, 이자카야·로바다야·우동을 한 자리에서 할 수 있고 주차시설도 충분해 외곽으로 나가는 모험을 감행했다. 우동과 구이를 하는 1층이 132㎡(40평)에 40석, 이자카야 형태인 2층은 264㎡(80평)에 70석 규모다. 이쪽으로 온 다음에는 서교동 시절과 손님 분포가 달라졌다고 한다. 서교동 때는 많았던 2차 손님이 적어지고 손님 연령대는 높아졌다.

‘냉장고를 부탁해’ 프로그램에서는 ‘댄싱머신’이라는 애칭으로 시청자의 눈길을 끌고 있다. 쟁쟁한 요리사들과 대결에서 그는 늘 지는 듯 보였다. 아마 단골로서 나의 시각이 그에게 기울어 있어서 그렇게 보였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2017년에는 연말 종합승률 3위를 차지했다.

삼미(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새우튀김·카레·마즙) 우동.

삼미(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새우튀김·카레·마즙) 우동.

치쿠와튀김우동

치쿠와튀김우동

모시조개우동.

모시조개우동.

그는 유학 마치고 돌아와 ‘스시 효’를 거쳐 유명한 음식점 주인이 되고 ‘스타 셰프’ 반열에 오르기까지 다음 달이면 만 10년이 된다. 1999년 23세에 요리를 시작했고, 2009년 33세에 첫 가게를 열었다. 내년이면 요리인생 20년을 맞는다.

요리인생 30년 땐 10석 오마카세 집이 꿈
그는 요즘 아내와 새로운 꿈을 가다듬고 있다. 노후계획이다. 요리인생 30년이 되면 서서히 구체화할 예정이다. 가게를 줄이는 것이다. 손님 10명 정도만 앉을 수 있는 스시 바 형태의 음식점을 하고 싶다. 정해진 메뉴는 없고, 편하게 들어와 요리사에게 맡기면 그날 들여온 좋은 재료에 가장 어울리는 음식을 만들어 낸다. 요리사는 손님이 다 보이고, 손님은 요리사의 몸놀림이 다 보이는, 무한 소통의 공간이다. 요리사는 30년 갈고닦은 기량을 쏟아붓고, 손님은 품격을 지키고. 값은 음식점을 유지할 수 있을 만큼의 수익만 붙여서 부담스럽지 않게 받는다. 음식점 면적은 줄이되 맛과 분위기의 밀도는 높은 미식 공간을 만드는 꿈이다. 그러자면 그때 생활비로 쓸 여유자금을 지금 비축해둬야 한다. 이게 정호영·강은영 부부의 요즘 생각과 생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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