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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투’가 말하는 것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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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이지영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이지영 아트팀 기자

이지영 아트팀 기자

‘미투(#MeToo)’는 역사의 변곡점이 될 만한 사회 현상이다. 범죄 피해자가 자신의 피해 사실을 밝히고 가해자 처벌을 요구하는 것. 그 마땅한 권리를 오랜 세월 성폭력 피해자는 누리지 못했다. 피해자가 도리어 부끄러워했고, 범죄 사실이 드러날까 두려워했다. 피해자를 보호 못한 사회가 도리어 피해자를 향해 손가락질하는 잔인하고 뻔뻔한 시대였다.

봇물 터지듯 이어지는 미투 현상은 이제 세상이 바뀌었다는 것을 말해 준다. 권력자가 자신의 힘을 무기로 타인의 존엄을 해치는 행동은 더는 용인되지 않는다는 선언이다. 미투 증언자들을 바라보는 시선도 변했다. 한때 강간범을 가정파괴범이라고 불렀던 시절이 있었다. 성폭력 피해자의 가정은 당연히 깨진다고 여겼던 것이다. 하지만 이번 미투에선 다르다. 피해자의 남편들도 자주 등장한다. ‘이윤택 성폭력 사건’ 피해자인 추은경씨의 남편 구민혁씨, 홍선주씨의 남편 변진호씨 등은 자신의 페이스북에 공개적으로 글을 올려 아내의 미투에 힘을 보탰다. 구씨는 “이제 갓 스무 살, 딸뻘 되는 꼬맹이에게 그런 짓을 하다니”라며 함께 분노했고, 변씨는 “아내의 어려운 결정을 진심으로 존중하고 지지한다”며 응원했다. 우리나라 미투의 선구자 격인 권인숙 한국여성정책연구원장이 1986년 부천경찰서 성고문 사실을 알렸을 때, 그의 가족조차 폭로를 말렸던 것을 생각하면 격세지감이다.

이제 성폭력 사실이 드러남으로써 인생이 망가지는 쪽은 피해자가 아니라 가해자다. 유력한 대권주자였던 안희정 전 충남도지사는 현직 비서의 성폭행 폭로로 정치생명이 사실상 끝났다.

유명 연출가·배우 등의 성폭력 사실이 대거 밝혀지면서 쑥대밭이 된 문화예술계는 새로운 기준으로 생태계가 정리되고 있다. 이제 ‘미투’에서 자유로운 자가 살아남는다. 일례로 국립극장장 후보 1순위였던 연출가 김석만씨는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시절 저지른 성추행 사실이 드러나면서 탈락했다. 조민기·조재현씨는 드라마에서 하차했고, ‘천만요정’으로 불렸던 오달수씨는 다 찍어 놓은 영화에서조차 사라지게 됐다. 또 고은씨의 고향 군산에서 추진 중이었던 ‘고은 생가 복원사업’은 중단됐고, 박재동씨는 울주세계산악영화제 집행위원장 자리를 내놨다. 해외에서도 사정은 비슷하다. 미국의 대표적인 초상화 화가 척 클로스는 모델을 성희롱한 사실이 밝혀지면서 올 5월로 예정됐던 워싱턴 국립미술관 전시가 취소됐다. 도덕성 없는 예술가가 예술적 성취만으로 평가받던 시대는 막을 내린 것이다. ‘인성이 실력’이라는 추상적 명제가 현실이 됐다. 바야흐로 새 시대다.

이지영 아트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