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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종의 평양 오디세이] 눈살 찌푸리게 한 특사 5인방의 김정은 앞 깨알 메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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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개인은 물론 국가 간의 관계에서 형식이 내용을 지배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예의범절이나 외교·의전은 그 반영물이다. 남북 당국 간 접촉에서는 특히 격(格)과 절차를 깐깐히 따진다. 이를 간과하다 회담 테이블이 깨져 버리거나, 소기의 성과를 거두고도 결국 낭패를 보기도 한다. 분단과 체제 대결의 산물이라 여길 수도 있지만, 여전히 남북관계가 민감한 이슈이기 때문이다. 1박 2일의 평양 방문을 마친 대통령 특사단은 이런 측면에서 많은 아쉬움과 숙제를 남겼다.

김정은 발언 ‘받아쓰기’ 모양새에 #노동신문, 특사 사진 대대적 선전 #뒷짐 진 채 기념 촬영한 김정은 #배경엔 ‘김일성 민족’ 상징 벽화 #언론 취재 배제한 ‘깜깜이’ 방북 #“김일성에 고개 숙여” 가짜뉴스도

지난 5일 오후 6시 평양 중구역의 노동당 중앙위 청사. 접견실에 들어선 김정은 당 위원장은 웃음을 드러내며 정의용 청와대 국가안보실장을 비롯한 대북 특사단과 인사했다. 대통령 문장(紋章)인 봉황 금박 봉투에 담긴 문재인 대통령 친서가 전달됐다. 자리에 앉은 김 위원장은 미리 준비한 메모를 펼쳐놓고 평창올림픽과 한반도 정세, 남북 정상회담 등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밝혔다.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김정은이 입을 떼자 정 실장과 서훈 국가정보원장 등 특사단 5명은 일제히 품속에서 수첩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는 김정은의 언급 내용을 깨알같이 적어 내려갔다. 북측 배석자인 김영철 당 통일전선부장과 김정은의 여동생 김여정 당 제1부부장도 마찬가지 모습이었다. 순식간에 접견장은 김정은의 발언을 받아쓰는 분위기가 연출됐다. 북한의 관영 선전·선동 매체는 이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이튿날 노동신문 1면에는 김정은의 특사단 접견 소식이 전체 지면에 걸쳐 크게 실렸다. 여기에는 김정은 앞에서 메모에 열중하는 정의용 실장을 비롯한 특사 5인방의 모습을 다양한 앵글에서 담은 사진 여러 장이 실렸다. 관영 조선중앙통신은 김영철과 김여정이 펜을 놓고 있는 순간에도 남측 특사단이 메모에 몰입한 사진을 전송했다. 노무현 정부 당시 국정원 차장을 지낸 염돈재 성균관대 초빙교수는 “수석을 맡은 정의용 실장까지 펜을 들고 메모하는 건 부적절해 보인다”며 “배석자 중에서 한두 명 메모하면 충분할 텐데 왜 이런 상황이 벌어졌는지 안타깝다”고 말했다. 특사단이 사전에 치밀한 협의를 통해 역할분담을 했어야 하는데, 이를 가볍게 여긴 여파일 것이란 얘기다. 본의는 아니더라도 북한에 ‘김정은 동지 말씀을 꼼꼼히 받아 적는 남조선 대통령의 특사단’이란 선전 빌미를 제공했다는 때늦은 비판이 대북부처 안팎에서 나온다.

김정은이 특사단과 찍은 기념사진도 논란거리로 떠올랐다. 인민복 차림의 김 위원장이 뒷짐을 진 채 다리를 벌리고 촬영에 나선 걸 두고 결례란 지적이 쏟아진 것이다. 붉은 태양을 부각시킨 대형 벽화를 배경으로 삼은 것도 문제로 지적된다. 안찬일 세계북한연구센터 소장은 “국가주석 김일성(1994년 사망)을 ‘태양’으로 치켜세우고, 우리 민족을 ‘태양 민족’ 운운하는 찬양·선전 논리를 펼치는 꼼수”라고 지적했다. 남북대화에 오래 종사한 통일부 전직 간부는 “사전 실무협의를 통해 꼼꼼히 모든 걸 다짐 받아 돌출변수를 제거했어야 했다”고 덧붙였다.

북한이 나름 구태에서 벗어나려 애쓴 흔적도 보인다. 특사단 도착 당일 최고지도자 면담 일정을 잡은 건 눈길을 끈다. 뜸을 들이거나 몽니를 부린 김정일(2011년 사망) 국방위원장과는 달랐다. 2005년 6월 정동영 당시 통일부 장관의 3박 4일 특사 방북 때는 마지막 날 김정일 면담 일정을 잡을 수 있었다. 앞서 2000년 9월 평양을 방문한 박재규 당시 통일부 장관은 동해안 지역 함흥 특각으로 달려가야 했다. 2003년 1월엔 임동원 특사를 아예 만나주지 않았다. 대북 제재와 압박에 따른 다급함이 작용했겠지만 “아버지가 통치하던 시기의 구태를 답습하지 않겠다”는 김정은의 태도 변화는 평가해줄만 하다. 만찬 행사에 부인 이설주를 동반한 점도 그렇다.

그렇다고 너무 오버하거나 성과에 집착하는 태도는 피했으면 한다. 남측 숙소가 고방산초대소로 드러나자마자 청와대 대변인이 “고급 휴양 시설이다. 북측이 남측 환대에 많은 준비를 했다는 게 특사단 판단”이라고 자화자찬형 브리핑을 한 건 지나치다. 대통령 방북 때나 역대 대북특사 파견 시 주로 투숙한 국빈급 시설은 백화원초대소란 점에 비춰봐도 그렇다. 김여정의 청와대 방문에 이어 김정은 면담 때도 우리 국민은 이들 남매의 육성 하나 접하지 못했다. 북한의 신비주의 전략을 우리 정부가 거드는 모양새란 비판이 나오는 건 이런 배경에서다.

김정은이 자신의 집무실인 노동당 청사에서 남측 인사를 만난 걸 두고 지나치게 의미를 부여하는 것도 볼썽사납다. 잿빛 당사(黨舍)를 조선노동당 70년 폭압정치와 세습권력의 상징으로 여기며 치를 떠는 북한 주민과 탈북자, 국제사회의 지식인·단체가 적지 않다는 측면에서다. 김여정 특사의 서울 방문 시 청와대를 개방했으니, 이에 상응하는 조치를 취한 것으로 보인다는 수준의 절제된 대처가 아쉽다.

이번 대북특사는 평창 겨울올림픽을 계기로 물꼬를 튼 남북관계 모멘텀을 지속시켜야 할 막중한 임무를 부여받았다. 북·미 대화의 중재자 역할을 하고, 여건을 만들어 남북 정상회담도 추진한다는 문재인 대통령의 대북구상도 추진해야 한다. 그러려면 국민여론의 공감과 지지가 무엇보다 절실하다. 이런 측면에서 특사단이 언론사 취재진을 배제한 채 방북길에 나선 건 아쉬움이 남는다. 대북정책 추진의 투명성을 공언한 문재인 정부의 입장과도 배치된다. 북한은 김여정 특사 파견 시 밀착 취재로 꼼꼼히 관련 영상 등을 챙겨갔다.

청와대와 정부의 부실한 대처는 우리 언론이 북한 선전매체의 보도에 의존토록 만들어버렸다. 김정은 면담과 만찬 내용은 당일 오후 11시 20분 서울로 보고됐다. 하지만 청와대는 이튿날 새벽 북한이 보도할 때까지 언론에 알리지 않았다. 이런 ‘깜깜이 보도’는 엉뚱한 사태를 불렀다. 순안공항 도착 영상이 확보되지 않자 우리 방송사들은 서울공항 출발 영상을 되풀이해 내보냈다. 그러자 인터넷 공간에선 “특사단이 활주로에 내려 평양 공항청사에 걸린 김일성 대형 초상화를 향해 고개 숙여 인사했다”는 소문이 퍼졌다. 서울공항 출발 인사를 하는 영상을 오인한 가짜뉴스다. 김일성 초상화는 2015년 공항 리모델링 때 철거됐다. 실시간 영상제공이 이뤄졌거나, 취재진이 동행했다면 피할 수 있는 소모적 논란이다.

특사단 입장에선 비핵화 논의 같은 까다로운 이슈를 다루는 게 버거웠을 공산이 크다. 김정은과 북측의 비위를 맞추는 모양새도 필요했을 수 있다. 하지만 최소한의 품격은 지켜야 하고, 절제된 언행도 필요하다. 그게 대한민국과 5000만 국민만 바라보고 섬기는 국가대표급 공무원의 올바른 처신이다.

이영종 통일북한전문기자 겸 통일문화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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