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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넬 스타일? 한국엔 '데무 스타일'이 있다

중앙일보

입력

1990년대 한국 거리를 휩쓴 옷이 있었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온통 검정색, 치마인지 바지인지 구분이 안 될 만큼 통 넓고 바닥에 질질 끌릴 정도로 긴 바지, 짙은 남색 바탕에 가는 줄무늬가 들어간 롱코트. 박춘무 디자이너(64)가 만든 '데무'의 옷이다. 당시 사람들은 이 독특한 분위기의 디자인을 '데무 스타일'이라 불렀고, 현재도 백화점을 포함해 100개 이상의 매장을 운영할 만큼 주목받고 있다. 88년 시작한 데무가 올해로 30주년을 맞았다. 오랜 동안 한국의 대표 패션 브랜드로 자리를 지켜온 박춘무 디자이너를 만났다.
글=윤경희 기자 annie@joongang.co.kr  사진=강정현 기자 cogito@joongang.co.kr

지난 2월 13일 청담동의 데무 사옥에서 만난 박춘무 디자이너는 늘 그랬듯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검은색 옷을 입고 있었다. 낮은 톤이지만 힘이 느껴지는 그의 목소리와 단단해 보이는 몸매는 60대의 나이가 무색했다. 30년간 데무가 활력적으로 운영된 이유를 알 수 있는 순간이었다. 강정현 기자

지난 2월 13일 청담동의 데무 사옥에서 만난 박춘무 디자이너는 늘 그랬듯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검은색 옷을 입고 있었다. 낮은 톤이지만 힘이 느껴지는 그의 목소리와 단단해 보이는 몸매는 60대의 나이가 무색했다. 30년간 데무가 활력적으로 운영된 이유를 알 수 있는 순간이었다. 강정현 기자

-‘데무 스타일’이란 어떤 것인가.

브랜드 30주년 맞은 '데무' 박춘무 디자이너 #명동양품점에서 한국 대표 디자이너 되기까지 #올 블랙·통바지, 중성적인 '데무 스타일' 유행

“단어로 정의하면 '역발상'. 실험적인 옷이다. 기존의 공식처럼 여겨지던 소재와 디자인을 비튼 것이다. 슈트인데 바지는 치마처럼 바닥을 질질 끄는 통바지나 배기팬츠를, 재킷은 몸에 꼭 맞는 대신 넉넉하게 직선으로 풀고 길이도 발등에 닿을 만큼 길게 만들었다. 디자인팀이 단체로 우리 옷을 입고 점심을 먹으러 가면 ‘종교단체에서 왔냐’고 할 정도였다.”

-새로운 아이디어의 출발점은.
“처음 데무를 만들 땐 핑크색·꽃무늬처럼 여성스러운 옷들이 인기를 끌 때였는데, 난 그게 싫었다. 여자 옷이지만 남성복같은, 남자 옷이지만 여성스러운 이미지가 더해진, 중성적인 느낌의 옷이 좋았다. 무채색을 메인으로 하고, 남성복에 많이 쓰는 남색 바탕에 가는 줄이 들어간 스트라이프 원단으로 여성용 재킷을 만들었다. 그게 유행하니 나중엔 원단업자가 스트라이프 원단을 들고 와서 ‘데무 스타일 원단’이라고 하더라.”

2012년 가을겨울 뉴욕컬렉션.

2012년 가을겨울 뉴욕컬렉션.

 2012년 가을겨울 뉴욕컬렉션.

2012년 가을겨울 뉴욕컬렉션.

-당시에 없던 디자인을 위한 영감은 어디서 얻었나.
“없다. 그냥 '박춘무의 취향'일 뿐이다. 옷이란 게 깔끔하게 입을 수만 있으면 됐지 고정된 형태를 꼭 지켜야할 필요가 있나. 망사에 털을 달거나, 여름 원단과 겨울 원단을 붙이기도 하고, 옷깃을 뒤집어 달거나, 봉제를 하다 만 것처럼 시접을 밖으로 튀어 나오게 만들어 보는 등의 실험을 많이 했다.”

-독특하다고 꼭 좋은 평가를 받는 건 아니다. 생소함은 받아들여지기 힘들다.
“처음엔 내 옷을 안 좋아한 사람들이 많았다. 88년 브랜드를 본격적으로 론칭하기 전에 쇼를 했는데 흰색·회색·검은색으로만 옷을 만들었다. 당시 그 쇼를 보고 잡지 ‘멋’의 편집장이 ‘옷도 아니다’라며 ‘색도 없고 형태도 없는 게 제대로 된 옷이 아니다’라는 악평을 실었다.”

-공들여 만든 옷인데 상처가 됐겠다.
“잠시 속상했지만 처음부터 내가 좋아하는 옷을 만들려고 브랜드를 만든 거라 크게 신경 쓰진 않았다.”

-악평을 받았던 그 스타일이 30년째 사랑받고 있다.
“항상 잘 되는 건 아니다. 리듬이 있다. 여성스러운 무드가 유행일 때는 가라앉았다가 시간이 지나 중성적인 무드가 각광받기 시작하면 함께 인기가 올라간다.”

1988년 처음 문을 연 압구정동 데무 매장. 개업식 날의 모습이다. [사진 데무]

1988년 처음 문을 연 압구정동 데무 매장. 개업식 날의 모습이다. [사진 데무]

1988년 압구정 매장 안의 모습. 마네킹에 입혀 놓은 데무의 블랙&화이트 옷과 한복을 갖춰 입고 개업식을 찾은 친지의 모습이 보인다. [사진 데무]

1988년 압구정 매장 안의 모습. 마네킹에 입혀 놓은 데무의 블랙&화이트 옷과 한복을 갖춰 입고 개업식을 찾은 친지의 모습이 보인다. [사진 데무]

그는 전라북도 김제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아버지는 아동복 제조공장을 했다. 고등학교 졸업 후 가족이 모두 서울로 올라와 엄마가 모아놓은 쌈짓돈으로 명동에 작은 옷가게를 냈다. 남대문 도매상가에서 옷을 떼다가 파는 양품점이었는데 장사가 너무 잘됐다. 당시 20대였던 박 디자이너가 고른 옷은 날개 돋친 듯 팔렸다. 구제품 가게에서 사입은 박 디자이너의 옷까지 사고 싶다는 손님이 많아지자 구제 옷도 사다 팔았다. 사업은 날로 번창해 명동에 가게 3곳을 열었고, 남대문 청진도매상가에 직접 디자인한 옷을 만들어 파는 도매점도 운영했다. 스스로 ‘돈을 많이 벌었다’고 고백할 만큼 잘 됐지만, 30대 초반 그는 하루 아침에 사업을 접었다.
-잘 되던 가게를 접은 이유가 뭔가.
“디자이너가 되기 위해서였다. 돈은 그만큼 벌었으면 됐다 싶었다. 새벽시장 일을 하니 밤낮이 바뀌어 체력이 한계에 부딪혔고, 또 아이가 크는 걸 보면서 제대로 된 옷을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부모님께 말하곤 바로 사업을 정리했다. 디자인 공부를 위해 홍익공업전문대 도안과에 들어가 공부를 마친 뒤 바로 데무를 시작했다.”

-뒤늦게 학교에 간 이유는.
“배움에 대한 갈증이 있었다. 졸업 후에도 뉴욕·파리·오사카 등 세계 도시를 찾아다니며 쇼란 쇼는 다 봤다. 일반인이 들어갈 수 없는 곳은 백화점 바이어에게 부탁해 초청장이나 표를 얻어서 들어갔다.”

-새로운 일에 뛰어드는 게 두렵지 않았나.
“사실 만만했다. 해외 쇼에서 옷을 보면 볼수록 나도 얼마든지 만들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내가 가진 유통 노하우와 비즈니스 감각까지 더하면 브랜드를 운영하는 게 어려울 것 같진 않았다.”

-한국 패션 시장에서 한국 디자이너가 살아남기 힘들다고 한다.
“사실이다. 한국 사람들은 한국 브랜드를 잘 안 입는다. 백화점도 해외 브랜드를 넣기 위해 한국 디자이너 숍을 뺀다. 결국 한섬을 제외하고는 국내 패션 브랜드도 몇 개 안 남았다.”

데무 2017 가을겨울 컬렉션. 스타일은 '데무 스타일' 그대로, 색은 청사초롱에서 영감을 받은 붉은 색을 썼다.

데무 2017 가을겨울 컬렉션. 스타일은 '데무 스타일' 그대로, 색은 청사초롱에서 영감을 받은 붉은 색을 썼다.

-디자이너 브랜드의 비싼 가격을 문제 삼는 사람도 많다.
“내 신념 중 하나가 옷값이 쓸데 없이 비쌀 필요가 없다는 거다. 멋있게 입을 정도로만 비싸면 된다. 디자이너 옷이 턱없이 비싸지는 이유 중 하나는 소량생산이다. 좋은 원단을 쓰면서 사람들이 살 수 있는 가격을 맞추려면 기본 생산량이 있어야 한다. 데무의 해외 진출 이유도 여기 있다.”

-어려운 시장 상황에서도 30년간 브랜드가 굳건할 수 있었던 비결은.
“옷은 '아트'가 아니다. 내가 좋아하는 옷을 만드는 것도 중요하지만 내 옷을 좋아해서 사는 사람도 생각해야 한다. 소비자의 눈높이에서 생각하고 정체된 느낌이 없도록 새로운 스타일을 계속 공급해 흐르는 느낌을 줘야 한다.”

-앞으로 계획은.
“데무는 가격대가 높다보니 젊은 층이 입기엔 한계가 있다. 가격이 상대적으로 저렴하면서도 디자인이 좋은 Y라벨로 젊은 층에 다가갈 계획이다.”

-후배 디자이너들을 위한 조언은.
“실패의 경험에서도 분명 배울 점이 있다. 모두가 힘들다, 안 된다고 말하지만 되는 사람은 분명히 있다. 나도 그랬다. 악평과 실패를 두려워 말고 도전했으면 좋겠다.”

2018 봄여름 시즌 데무 스타일. 속이 비치는 샤 원단을 사용해 아우터를 만들었다.

2018 봄여름 시즌 데무 스타일. 속이 비치는 샤 원단을 사용해 아우터를 만들었다.

 2018 봄여름 시즌 데무 스타일. 속이 비치는 샤 원단을 사용해 아우터를 만들었다.

2018 봄여름 시즌 데무 스타일. 속이 비치는 샤 원단을 사용해 아우터를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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