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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통상 압박 거세지만…통상 조직 정비도 안 된 한국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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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허(劉鶴) 공산당 중앙재경영도소조 판공실 주임은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의 경제 책사이자 50년 지기 친구다. 곧 부총리로 승진할 것이 유력한 중국 경제의 실세다. 이런 류 주임이 지난달 27일 미국을 찾았다. 외국산 세탁기·태양광제품에 대한 세이프가드(긴급수입제한조치), 수입산 철강에 대한 25% 관세 부과 등 거세지는 미국의 보호무역 정책에 대응하기 위해서다.

미 통상압박에 중국, 일본 발빠르게 대응 #중국은 경제 '실세' 류허 미국 방문, #일본은 고노 다로 외상이 미국에 전화 #한국은 통상조직 조차 정비 안 돼 #차관급 김현종 본부장이 접촉 도맡아 #통상관계장관회의는 '알멩이'없어 #무역전쟁 상황에서 통상조직 정비 안돼 #"청와대가 통상 컨트롤타워로 직접 나서야"

#.닛케이 신문은 5일 “고노 다로(河野太郞) 외상이 로버트 라이트하이저 미국 무역대표부(USTR) 대표 등에게 일본 정부의 우려 입장을 전달했다”고 보도했다. 앞서 세코 히로시게(世耕弘成) 경제산업상은 지난 3일 윌버 로스 미국 상무장관과 전화 회담에서 “동맹국인 일본에서 수입하는 철강과 알루미늄은 미국의 안전보장에 악영향을 주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중국 제13기 전국인민대표대 1차 회의가 5일 개막한 가운데 '시진핑 경제책사'로 불리는 류허(劉鶴) 공산당 중앙재경영도소조 판공실 주임(가운데)이 개막식에 참석했다. 류 주임은 중·미 경제 대화를 책임질 것으로 전망된다.[연합뉴스]

중국 제13기 전국인민대표대 1차 회의가 5일 개막한 가운데 '시진핑 경제책사'로 불리는 류허(劉鶴) 공산당 중앙재경영도소조 판공실 주임(가운데)이 개막식에 참석했다. 류 주임은 중·미 경제 대화를 책임질 것으로 전망된다.[연합뉴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거침없는 보호무역 정책에 중국과 일본 등 각국은 발 빠르게 대응에 나섰다. ‘경제 실세’가 직접 미국을 찾아가고, 장관은 전화 등 여러 루트를 통해 미국과 적극적인 대화에 나서고 있다.

이에 비해 한국 정부의 대응이 미진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미국의 보호무역 정책이 세탁기·태양광·철강산업에 직접적인 타격을 입힐 태세다. 자동차·반도체로까지 확산할 가능성도 있다. 사안의 엄중함에 비해 한국 정부는 뚜렷한 대응책은커녕 미국과 제대로 된 대화 루트도 찾지 못하는 것 아니냐는 의구심이 나온다.

김현종 산업통상자원부 통상교섭본부장이 대미(對美) 아웃리치(접촉)를 위해 지난달 25일 오후 인천공항을 통해 출국하고 있다. [연합뉴스]

김현종 산업통상자원부 통상교섭본부장이 대미(對美) 아웃리치(접촉)를 위해 지난달 25일 오후 인천공항을 통해 출국하고 있다. [연합뉴스]

통상 수장인 김현종 산업통상자원부 통상교섭본부장은 6일 재차 미국을 방문해 로버트 라이트하이저 미국무역대표부(USTR) 대표 등 행정부 인사와 오린 해치 상원 재무위원장 등 주요 상ㆍ하원 의원들을 만날 계획이다. 김 본부장은 앞서 지난달 25일부터 미국을 찾아 게리 콘 백악관 국가경제위원회 의장, 월버 로스 미국 상무부 장관 및 의회 주요 인사와 접촉했다. 이와 별도로 백운규 산업부 장관은 전날 로스 상무장관에게 서한을 보내 232조 관세 대상에서 한국을 제외해달라고 요청했다.

정부는 또 지난 5일 김동연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 주재로 대외통상관계장관회의를 열었다. 전날 김 부총리가 기재부 1급 간부 회의를 주재하며 “통상 문제가 엄중하니 관련 장관 회의를 개최하라”고 지시했고, 곧바로 다음날 회의를 열었다. 하지만 ‘알맹이’는 없었다.

김 부총리는 이날 “글로벌 통상 마찰 확대 가능성 및 한국 수출과 세계 경제에 미치는 영향을 면밀히 점검 중”이라며 “미국 정부에 우리 입장을 충분히 설명하고 의회, 주 정부 및 경제단체와 접촉해 설득하는 노력을 하겠다”고 말했다. 김 부총리는 “이달 G20(주요 20개국) 재무장관회의를 계기로 미국을 비롯한 주요국과 양자회담을 통해 우리 입장을 설명하겠다”고도 했다.

결국 대응책은 미국과의 협의·설득이 전부다. 하지만 아직까지 뚜렷한 성과는 없었다. 예견됐던 일이다. 김 본부장은 과거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협상을 진두지휘한 경험이 있고, 세계무역기구(WTO)의 상소기구 위원을 지내는 등 국내 최고 수준의 통상 전문가다. 하지만 김 본부장에게 ‘아웃리치(접촉)’ 활동을 도맡기는 건 사안을 너무 경시하는 것 아니냐는 지적이 나온다.

직급도 문제다. 대외적으로 ‘통상 장관(minister of trade)’이라지만 국내에서는 ‘차관’이다. 차관이 장관 명함을 들고 나간다고 해서 전 부처가 관여된 통상 정책을 아우르기 어렵다. 게다가 협상 상대방 역시 이를 모를 리 없다.

송기호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민변) 국제통상위원장은 “통상 현안이 중대한 만큼 미국 무역대표부(USTR)에 맞춰 통상 책임자를 장관급으로 격상하는 게 맞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산업부 고위 관계자는 “김현종 본부장이 외부에 공개된 것 이상으로 미국측과 활발한 접촉을 갖고 있다”라며 “5일 회의대로 부총리도 미국 재무라인과 접촉을 하게될 것”이라고 말했다.

통상 조직 정비도 지연됐다.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해 5월 취임 뒤 통상교섭본부를 부활시켰다. 과거 외교부에 있던 통상교섭본부는 2013년 통상 기능이 산업통상자원부에 이관되며 폐지됐는데 이를 4년여 만에 산업부 산하에 다시 뒀다.

김 본부장은 “통상 담당 인원이 너무 부족하다”며 조직 확대를 요구했다. 통상교섭본부 인원은 약 270명인데 이 중 통상 관련 일을 하는 인원은 170명 정도다. 미국의 통상 전담 조직인 USTR의 인력 규모는 300명 수준이다.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정부는 통상교섭본부에 30명 정도의 ‘신통상전략실’을 마련키로 했지만 아직 마무리 짓지 못하고 있다. 예산 문제로 이견을 보이던 산업부와 기재부가 이제서야 합의를 한 상황이다. 안덕근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는 “통상 문제의 중요성을 고려할 때 아직도 통상 조직이 정비되지 않았다는 건 큰 문제”라고 말했다.

통상 조직이 정비되지 않은 상황에서 전문성과 성과를 기대하기 어렵다. 트럼프 대통령 취임 이후 보호무역 파고는 예견된 일이었다. 정부가 나름대로 대응했다고는 하지만 미진하다는 게 전문가들의 진단이다. 신세돈 숙명여대 경제학부 교수는 “트럼프 대통령이 무역확장법을 본격적으로 언급한 게 지난해 4월이었지만, 한국의 통상교섭본부는 이와 관련한 진위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며 “미국의 메시지를 정확하게 해석하는 능력이 없는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통상 정책과 관련해 청와대가 직접 컨트롤타워로 나서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지난달 20일 문재인 대통령이 수석비서관 회의에서 “불합리한 보호무역 조치에 대해서는 WTO 제소와 한·미 FTA 위반 여부 검토 등 당당하고 결연히 대응해 나가기 바란다”고 했다. 하지만 그 이후 청와대 고위 관계자의 통상 관련 언급을 찾기 어렵다.

경제 정책을 총괄하는 경제 부총리 역시 최근의 통상 환경 변화에 대한 뚜렷한 메시지를 주지 못했다. 외교부도 최근 통상 이슈에서 역할이 거의 없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트럼프 대통령을 비롯한 미국의 고위관계자들이 통상 관련 이슈를 쏟아내는 것과 대비된다. 정인교 인하대 대외부총장은 “미국은 사실상 백악관이 통상 정책을 쥐고 있다”라며 “대통령이 통상 정책에 깊숙이 관여할 수 있도록 대통령 직속 기구 혹은 그에 준해 대통령에게 관련 내용을 직접 보고할 수 있는 조직이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세종=하남현·심새롬 기자 ha.namhyu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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