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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오래] 30년째 이혼 준비 중인 나를 돌려세운 『사랑의 기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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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0면

한순의 인생후반 필독서(6)

지난겨울 묵었던 서울 시내 호텔에서 이주신 선생님이 연주해준 피아노 음악 '떠날 때는 말없이'를 무한 재생했다. (내용과 연관없는 사진) [사진 pixabay]

지난겨울 묵었던 서울 시내 호텔에서 이주신 선생님이 연주해준 피아노 음악 '떠날 때는 말없이'를 무한 재생했다. (내용과 연관없는 사진) [사진 pixabay]

지난겨울, 혹한의 중심에 나는 서울 시내 한 호텔에 묵었다. 차들도 얼어붙었는지 왕래가 드물었고, 상대적으로 호텔 안 객실은 따뜻했고 안전했다. 집에서 입고 나온 옷 그대로 슬리퍼만 갈아 신은 채, 이주신 선생님이 연주해준 피아노 음악 ‘떠날 때는 말없이’를 무한 재생하고 있었다.

얼어붙은 가로등 불빛이 빈 도로를 비추고 있을 때 눈가에 물 같은 것이 흘렀다. 한번 흐르기 시작하자 주체할 수 없이 흘러내렸다. 내 사랑이 실패했다. 30여 년을 노력하고 속으로는 내 생명이 다하는 날까지 내어주리라고 다짐하고 인내했던 결혼 생활이 처참한 모습으로 수면 위로 올라왔다. 캄캄하게 불이 꺼진 안방에서 자정이 가까운 시간에 나온 ‘이혼’이란 말은 차라리 진실에 가까워 더 할 말이 없었다.

다음 날 남편이 출근하자 나는 망설일 것도 없이 핸드백만 들고 집을 나왔다. 한편으로 몹시 홀가분하고, 한편으로는 휑하니 허망한 기분이 나를 잠식하기 시작했다. 황혼 이혼, 졸혼을 이야기하는 사람의 심정이 더 가까이 이해가 갔다. 더불어 나의 기억은 고향 모충동 본가 시절로 급후진해 영상처럼 나의 사랑 이력을 영화 필름 돌리듯 점검하고 있었다.

혹한에 집 나올 만큼 중요했던 '사랑'

요즘 세상에서는 사치처럼 여겨지는 ‘사랑’이 나에게는 혹한에 집을 나올 만큼 중요한 문제였다. 고향 모충동의 어린 나는 사랑받는 존재였고, 성장하자 내가 어떤 사람을 선택했고, 사랑을 키웠으며, 사랑하고자 끊임없이 노력하고 희생했다. 그리고 오십 중반을 넘는 즈음에 어떤 강력한 한계에 직면했다.

상대에 대한 원망과 한계는 매우 정확하게 몇 가지로 정리되었다. 문제는 오히려 ‘나’에 대한 개념이 모호한 것이었다. 내가 나에 대한 객관성이 명확하지 않았다.

사랑의 기술, 에리히 프롬 지음, 황문수 옮김, 문예출판사.

사랑의 기술, 에리히 프롬 지음, 황문수 옮김, 문예출판사.

에리히 프롬의 저서 『사랑의 기술』에서는 사랑은 ‘기술’이라는 말을 냉철하게 서두에 내세우고 있다. 1장의 제목은 ‘사랑은 기술인가?’이다. 그렇다면 나의 기술은 오십 어느 즈음에서 고장이 났다는 말이다. 아이들이 커서 독립을 했고, 의무에서 어느 정도 벗어났으니 지치기도 했고, 빈 둥지 증후군도 찾아와 모든 것이 시들해졌다. 당연히 매번 결과가 실패로 끝나는 사랑도 빛이 바랬을 것이다.

이렇게 사랑의 결과는 실패이고, 사랑의 결론은 자명한데, 나는 왜 아직도 ‘사랑’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혹한에 가출을 감행하는가? 『사랑의 기술』 4장 ‘사랑의 실천’에는 ‘애호가와 명장’에 대한 비유가 나온다.

“어떤 기술을 배우는 조건은 기술 습득에 대한 ‘최고의 관심’이다. 그 기술이 최고로 중요한 것이 아니라면, 견습공은 이 기술을 배우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기껏해야 애호가로 남아 있을 뿐 결코 명장(名匠)이 되지는 못할 것이다. 이러한 조건은 어떤 기술과 마찬가지로 사랑의 기술에도 필요하다. 그러나 다른 기술의 경우와 달리 사랑의 기술에서는 명장과 애호가의 비중이 애호가 쪽으로 훨씬 기울어지는 것 같다.”

자기 안에 갇힌 사람을 극복해야

나는 인생의 다른 문제에서는 애호가 쪽이 될 가능성이 크다 하더라도, ‘사랑’의 문제에 있어서만큼은 애호가를 벗어나고 싶었던 거 같다. 정신분석학자이자 사회철학자인 에리히 프롬도 세 여자와의 사랑이 실패로 끝나고, 그의 나이 52세에 애니스라는 여인과 충만하고 안정적인 사랑에 접어들었다.

에리히 프롬은 사랑을 성취하는 중요한 조건은 ‘자아도취’를 극복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여기서 자아도취는 자신의 내면에 존재하는 것만을 현실로서 경험하는 방향성을 말한다. 자기 안에 갇힌 사람을 말할 것이다.

사회심리학자 에리히 프롬(Erich Fromm, 1900~1980). [사진 Muller-May / Rainer Funk, via Wikimedia Commons]

사회심리학자 에리히 프롬(Erich Fromm, 1900~1980). [사진 Muller-May / Rainer Funk, via Wikimedia Commons]

사랑은 스스로 도달한 성숙도와는 관계없이 누구나 쉽게 탐닉할 수 있는 감상이 아니라는 점을 보여주려는 것이 이 책의 의도다. 에리히 프롬은 사랑의 기술에 어떤 지침을 기대하는 사람들을 냉정하게 밀어낸다. 그리고 매우 불편한 어떤 일관성을 독자들에게 기대한다.

“이 책은 독자들에게 가장 능동적으로 자신의 퍼스낼리티(personality) 전체를 발달시켜 생산적 방향으로 나가지 않는 한, 아무리 사랑하려고 노력해도 반드시 실패하기 마련이며, 이웃을 사랑하는 능력이 없는 한, 또한 참된 겸손, 용기, 신념, 훈련이 없는 한, 개인적인 사랑도 성공할 수 없다는 것을 깨우쳐주려고 한다”고 이 책의 의미를 밝히고 있다.

존재의 존립은 발전의 결과이다. 나는 누군가의 사랑의 미완 상태로 오늘 여기에 살고 있다. 나 또한 사랑의 미완인 채로 이 세상을 떠날 것이며 남겨진 나의 후손이 다기능으로 발전된 개체로 존재하게 될 것이다.

나의 인생에 객관성을 확보해줄 수 있는 사람과 꽁꽁 언 호숫가 앞에 차를 세웠다. 결혼 생활 30년 동안 그는 나에게 서너 번쯤 불려 나온 거 같다. ‘결혼 생활 그만하면 어떨까?’라는 주제였다. 그는 “너 몇 년 전에도 같은 이야기를 했어”라고 했다. 그의 대답에서 ‘나는 결혼 생활 내내 작은 실패와 작은 성공을 통해 끊임없이 상대와 나의 내면을 한 땀 한 땀 넓히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머쓱해진 내가 이력서 경력에 ‘30년째 이혼 준비 중’이라고 쓰겠다고 했다. 허허로운 웃음이 호숫가 겨울나무 가지에 걸렸다. 기울어가는 해가 웃음에 반짝 빛났다.

한순 도서출판 나무생각 대표 tree3339@hanmail.net

비트코인의 탄생과 정체를 파헤치는 세계 최초의 소설. 금~일 주말동안 매일 1회분 중앙일보 더,오래에서 연재합니다. 웹소설 비트코인 사이트 (http:www.joongang.co.kr/issueSeries/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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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작 현예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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