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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있는 피아노 여제의 삶과 사랑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573호 32면

근래에 재킷사진이 깊은 인상을 준 음반이 둘 있었다. 하나는 피아니스트 마르타 아르헤리치와 지휘자 클라우디오 아바도가 DG(도이치 그라모폰)에 남긴 협주곡들을 모은 것인데 명연주로 평가받는 라벨·프로코피에프·리스트·쇼팽 등이 포함돼 있다. 이 박스 음반의 표지사진이 젊디젊은 마르타와 아바도다. 두 사람은 피아노 앞에 마주 앉았는데 보는 사람이 설렐 정도로 잘들 생겼다.

『마르타 아르헤리치』 #저자: 올리비에 벨라미 #출판사: 현암사 #가격: 1만7000원

다른 하나 역시 마르타와 아바도의 협주곡 음반이다. 아바도가 이끈 루체른 페스티벌에서 연주한 모차르트의 20, 25번 협주곡을 담았다. 재킷사진 역시 두 사람이다. 그런데 그 푸르던 청춘이 할머니, 할아버지가 되었다. 위암을 앓은 아바도는 얼굴이 반쪽이 났고 마르타의 검고 풍성한 머리칼에도 허연 서리가 내렸다. 두 사진을 번갈아 보면 인생이 허망하기도 하지만 치열하게 외길을 걸은 두 사람을 경외하지 않을 수 없다.

『마르타 아르헤리치』는 그런 삶을 산 피아니스트의 전기(傳記)다. 부제는 ‘삶과 사랑, 그리고 피아노’다. 저자 올리비에 벨라미는 방대한 자료를 섭렵한 뒤 마르타 본인과 주변 사람들을 직접 만나 이야기를 들었다. 덕분에 글은 마르타의 인간적 면모를 있는 대로 드러내 그녀의 환희와 고통, 안타까움을 생생히 느끼게 한다.

마르타가 어떤 피아니스트였는지는 당대 최고의 피아니스트들이 증언한다. 프리드리히 굴다는 남미 방문길에 열두 살의 마르타를 만나 강렬한 인상을 받고는 그녀를 빈으로 초대한다. 그는 나중에 자서전에 이렇게 썼다. “누군가를 가르치는 일은 늘 지루했지만 마르타와 시도한 경험만은 예외다.”

마르타가 제네바에 갔을 때 디누 리파티의 미망인 마들렌은 그녀를 클라라 하스킬에게 데려갔다. 하스킬은 그녀의 연주를 주의 깊게 듣고 나서 질책하듯 말했다. “내가 너처럼 연주할 수 있다면 하루 종일 피아노에만 붙어 있을 텐데.” 자기만족이라고는 모르고, 오십이 넘어서야 진가를 인정받은 장애인 피아니스트는 어린 나이에 주목을 끄는 마르타가 부러웠을 것이다.

기인이자 완벽주의자인 미켈란젤리도 일 년 반 동안이나 마르타의 스승이었다. 그러나 제대로 된 레슨은 네 번 밖에 하지 않았다. 미켈란젤리는 “마르타에게 침묵의 음악을 아로새기고 싶었다”고 변명삼아 말했는데, 호로비츠를 좋아하는 마르타에게 복수를 한 것이라는 해석도 있다. 책에는 마르타 뿐만 아니라 20세기 중반 이후의 세계적 음악가들이 대거 등장해 거목이 들어찬 숲을 산책하는 느낌이 든다.

피아니스트로는 그렇다 치고, 그녀의 ‘삶과 사랑’은 혼돈스럽다. 대체로 클래식 음악가들이 음악에 집중하면서 사생활을 포기하는데 반해 마르타는 주변이 조용한 적이 없었다. 저자는 ‘매인 데 없이 분방한 떠돌이 예술가’라고 표현했는데, 특히 남자관계가 그랬다. 스물두 살에 중국계 미국인 로베트 첸을 만난 것을 시작으로 지휘자 샤를 뒤투아, 피아니스트 스티븐 코바세비치와 만나고 헤어지기를 반복하며 성이 다른 세 딸을 낳는다. 이러고도 피아니스트로 살 수 있을까 걱정되지만, 마르타는 손주를 보고도 여전히 현역이다.

언젠가 거실에서 마르타가 연주하는 리스트의 B단조 소나타를 듣고 있었다. 빨래를 안고 지나가던 아내가 물었다. “누군데 저렇게 잘 쳐?” 그 곡은 ‘잘 친다’는 느낌이 나게 치기 어려운 곡이다. 마르타 아르헤리치는 『BBC 뮤직 매거진』이 선정한 ‘역대 최고 피아니스트’ 9위에 올랐고 ‘현존’으로는 1위다.

글 최정동 기자 choi.jeongdo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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