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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여, 그 젊은날의 아스라함이여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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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3호 16면

『백야』의 삽화. 러시아-소비에트 화가 도부쥔스키(1875-1957)의 1922년 작품이다.

『백야』의 삽화. 러시아-소비에트 화가 도부쥔스키(1875-1957)의 1922년 작품이다.

도스토옙스키라는 이름이 풍기는 무게감 때문이건 아니면 심각한 생김새 때문이건, 도스토옙스키와 해맑은 러브스토리는 어쩐지 잘 어울리지 않는다. 하지만 그도 젊은 시절에는 수채화처럼 투명하고 잔잔한 연애소설을 두어 편 썼다. 1848년에 발표한 중편 『백야』가 그 중 하나다. 백야의 페테르부르크에서 우연히 마주친 남녀의 이루어지지 못한 사랑을 다루는 소설은 주제가 워낙 통속적이어서 그런지 여러 차례 영화로도 만들어졌다.

석영중의 맵핑 도스토옙스키 <8> #상트페테르부르크: ‘하얀 밤’의 추억

백야 즉 ‘하얀 밤’은 여름에 북유럽에서 나타나는 기후 현상으로, 태양이 지평선 아래로 어느 정도 이상 내려가지 않아 밤 시간에도 초저녁처럼 훤하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페테르부르크는 5월 말부터 7월 초까지가 백야 기간이다. 햇살과 온기가 늘 아쉬운 러시아인에게 거의 하루 24시간 빛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은 마술 같은 행복일 것이다.

이 마법의 시간을 축하하기 위해 페테르부르크에서는 해마다 ‘백야 축제’가 펼쳐진다. 음악제와 영화제, 퍼레이드와 불꽃놀이, 카니발, 심야 관광 등 다양한 행사와 볼거리가 새벽까지 이어진다. 밤새 영업하는 카페와 레스토랑과 술집은 시민들 뿐 아니라 관광객들로 북적거린다.

내가 처음 페테르부르크의 백야를 본 것은 1996년 여름이었다. 시간은 한밤중임에도 거리는 초저녁 같았다. 검푸른 하늘 위에 두텁게 깔려있는 분홍색 보라색 황금색 구름이 너무 아름다워서 하늘만 바라보았던 기억이 난다.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음악 소리도, 왁자지껄 떠드는 소리도, 손을 꼭 잡고 다리 위를 서성이는 연인들의 모습도 그냥 다 좋았다.

그런데 요즘에는 백야 시기에 페테르부르크를 방문할 일이 생기면 잠자리 걱정이 앞선다. 며칠씩 밤잠을 설치고 나면 축제는 먼 나라 이야기가 된다. 암막 커튼과 방음 시설이 호텔 선정의 최우선 조건이 되어버렸다. 백야는 확실히 젊음의 시간인가 보다. 『백야』의 첫 문장도 바로 이 젊음을 이야기한다. “아름다운 밤이었다. 우리가 젊을 때에만 만날 수 있는 그런 밤이었다.”

구소련의 유명한 영화감독 이반 피리예프의 1959년 작품 ‘백야’의 포스터

구소련의 유명한 영화감독 이반 피리예프의 1959년 작품 ‘백야’의 포스터

페테르부르크의 운하와 다리

페테르부르크의 운하와 다리

몽상가에게 닥친 현실의 사랑  

인생에는 젊음의 눈에만 아름답게 보이는 것들이 있다. 어쩌면 사랑이 순수하게 아름다울 수 있는 것도 젊을 때에만 가능한 일인지 모른다. 『백야』는 덧없이 사라져버린 젊은 시절의 아스라한 사랑 이야기로, 도스토옙스키 작품 중에서 가장 서정적이고 시적이라 평가받는다.

주인공인 ‘나’는 혼자만의 세계에서 고독한 삶을 살고 있는 자칭 ‘몽상가’다. 아는 사람도, 대화할 사람도 없이 홀로 비정한 도시에 살게 된 그가 직장에서 퇴근 후 하는 일은 소설을 읽고 공상하는 일 뿐이다. ‘소설 쓴다’는 표현은 그의 삶을 정확하게 묘사한다. 그에게는 사랑도 우정도 대화도 모두 상상 속에서 소설처럼 진행된다. 그러던 그에게 현실에서 연애 비슷한 사건이 일어난다.

어느 맑은 날, 밤거리를 홀로 거닐던 그는 운하의 난간에 기댄 채 울고 있는 아가씨를 발견한다. 흑심을 품고 접근하는 치한으로부터 그녀를 보호해준 것을 계기로 두 사람은 가까워지고 매일 밤 같은 장소에서 만나기로 약속한다. 매혹적인 하얀 밤에 젊은 두 영혼의 애틋한 관계가 시작된다.

그녀의 이름은 나스첸카. 지난해 돈을 벌기 위해 모스크바로 떠나간 약혼자를 그리워하고 있다. 남자는 떠나기 전 날 바로 이 운하 앞에서 1년 뒤에 반드시 돌아와 그녀와 결혼하겠다고 굳게 약속했다. 해가 바뀌어 다시 백야의 계절이 오고 지인들은 남자가 얼마 전 페테르부르크에 돌아왔다고 전해준다. 그러나 그에게서는 이제까지 아무런 연락이 없다. 나스첸카는 약혼자가 변심했다는 생각에 마지막으로 만났던 그 자리를 찾아와 울고 있었던 것이다.

나스첸카의 딱한 사연을 들은 주인공의 심경은 복잡하다. 이미 첫 눈에 귀여운 그녀에게 반했다. 그러나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속내를 털어놓은 그녀의 신뢰를 배신할 수 없다. 그래서 그녀를 성심껏 위로해주고 약혼자에게 그녀의 편지를 전달해 주는 심부름까지 마다하지 않는다. 편지를 보냈는데도 약혼자는 여전히 그녀가 지정해 준 장소에 나타나지 않는다. 다음날에도 역시 그에게서는 연락이 없다. 마침내 나스첸카는 버림받았다는 것을 깨닫고 오열한다.

그동안 나스첸카 옆을 지켜준 주인공은 그녀와 만나면서 비로소 자신이 몽상의 세계에서 빠져나와 ‘현실적인’ 삶을 살 수도 있다고 느끼기 시작한다. 마침내 그는 난생 처음 몽상이 아닌 현실 속에서, 실재하는 여성을 향해 사랑을 고백한다. “당신이 배신당한 사랑에 괴로워하고 있을 때 내 가슴은 당신을 향한 사랑으로 흘러넘치고 있었습니다. 당신이 여전히 그 사람을 사랑할지라도, 내가 알지도 못하는 그 사람을 계속해서 사랑할지라도, 나는 당신을 사랑할 겁니다. 내 사랑이 당신에게 짐이 되지 않도록, 당신이 느끼지 못하도록 그렇게 사랑할 겁니다. 당신은 다만 매 순간 듣고 느끼게 될 겁니다, 당신 곁에서 감사에 넘치는 심장이 고동치고 있음을….” 이 얼마나 순수하고 고결한 사랑의 고백인가.

눈물로 범벅이 된 나스첸카는 머뭇머뭇 그가 내민 손을 붙잡는다. “제가 다른 사람을 사랑했는데도…언제나 지금처럼 저를 사랑하고 싶으시다면…저도 맹세합니다, 저의 사랑이 마침내 당신의 사랑을 받을 가치가 있게 되리라는 걸….”

두 사람은 웃다가 울다가를 반복하며 아무 뜻도 없는 말을 수천 마디 지껄이기도 하고 장래 계획을 세우기도 한다. 바야흐로 행복이 손짓을 하고 있는 듯하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한 남자가 그들 옆을 지나가다가 갑자기 걸음을 멈추고 나스첸카를 유심히 쳐다본다. 나스첸카는 외마디 소리를 지르며 그 자리에 얼어붙는다. 그러더니 주인공의 손을 확 뿌리치고는 낯선 이를 향해 쏜살같이 달려간다. 주인공은 죽은 사람처럼 서서 멀어져 가는 그들을 바라본다. 이것으로 마지막 밤이 끝난다. 다음날 아침 그녀에게서 편지가 온다. “용서해 주세요. 저는 당신도 제 자신도 속였습니다. 그건 꿈이었어요. 환영이었어요. …다음주에 저는 그 사람과 결혼합니다. 그이는 한시도 저를 잊은 적이 없었답니다….”

밤도 아니고 낮도 아닌 시간 백야, 그 마법의 주술이 풀리면서 사랑은 연기처럼 사라진다. 저 황홀한 하얀 밤들은 지나가고 우중충한 새벽이 쓸쓸히 주인공을 맞이한다. 그는 처참한 심정으로 주위를 둘러본다. 벽과 바닥 모두 색이 바래버렸고 모든 것이 침침해졌다. 주인공의 피곤한 시야에 자신의 미래가, 15년 뒤에도 이 낡은 방에서 지금처럼 홀로 고독하게 살고 있을 자신의 늙은 모습이 펼쳐진다.

“한 순간이나마 지속되었던 지극한 행복이여”

글머리에서 『백야』를 “투명하고 잔잔한 연애소설”이라 했지만 사실은 꼭 그렇지만도 않다. 깊이 들어가면 갈수록 사랑 이외에 무언가 의미하는 바가 많은 소설이다. 특히 주인공이 도스토옙스키의 소설에 수없이 등장하는 ‘몽상가’ 유형이라는 것은 그냥 넘어갈 일이 아니다. 도스토옙스키는 평생 동안 몽상과 현실의 문제를 탐구했다. 그에게 몽상은 부정과 긍정이라는 두 가지 면이 있다. 현실에서 누적된 불안에 적절하게 대처할 수 없을 때 인간은 몽상의 세계로 도피한다. 몽상가는 그래서 분열된 인격의 다른 이름이 되기도 한다. 몽상이 극에 이르면 온갖 인격 장애를 수반하는 사회병리학적 현상이 된다는 것을 도스토옙스키는 간파했다. 그래서 “몽상가란 페테르부르크의 악몽이자 구체화된 죄악이자 비밀스럽고 음산하고 야만적인 비극”이라고까지 단언했다.

그러나 몽상은 다른 한편으로 현실의 일부이자 인간 내면에 있는 보편적 성향이다. 몽상이 확실하게 제거된 현실은 얼마나 삭막할 것인가. 꿈꿀 수 없는 인간이란 얼마나 범속하고 지루하고 얼마나 기계처럼 무감각할 것인가.

삼각관계의 다른 두 사람, 나스첸카와 그녀의 약혼자는 몽상과는 관련이 없고 그래서 평면적이다. 나스첸카는 처음부터 끝까지 영악할 정도로 현실적이다. 약혼자를 잃어버렸다는 생각에 ‘대타’로 주인공을 선택하지만 약혼자가 나타나자 즉시 ‘대타’를 버린다. 어쩌면 그녀에게는 누군가가 필요할 뿐 그 누군가가 누구이건 큰 상관이 없는지도 모른다. 그녀의 약혼자는 또 어떤가. 이름도 외모도 알 수 없는 그는 인물이라기보다는 반드시 나타나야만 할, 우리가 언젠가는 반드시 맞닥뜨려야 할 ‘현실’의 은유처럼 읽힌다.

반면 주인공은 몽상과 현실 사이의 경계선에 존재하고 그래서 훨씬 복잡하고 입체적이고 인간적이다. 그는 몽상가이되 몽상의 비극과 위험을 인지할 정도로 현실적이다. 그는 몽상이 지나치게 깊어지면 “헛된 망상”이 된다는 것도 알고 “누구나 성숙해지면 자신이 과거에 품었던 이상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것도 안다. 도피성 인격 장애자도 아니고 무감각한 기계도 아니다. 지극히 ‘인간다운 인간’의 마음으로 그는 나스첸카의 이야기를 재구성하고 자신의 내적인 독백을 아름답고 슬픈 한 편의 로맨스로 변형시킨다. 비록 사랑은 꿈처럼 사라져버렸지만 그가 기록한 로맨스는 현실로 남아있다.

아니, 이 모든 설명은 접어두고 『백야』만큼은 그냥 감상적 소설로 읽고 싶다. 한 편쯤은 인물 분석이나 해석, 이런 것 생각하지 않고 그냥 그대로 슬픈 사랑 이야기로 읽어도 좋지 않을까. 누구나 살다 보면 간직하고 싶은 순수의 추억이 있지 않은가. 마지막에 주인공이 하는 독백은 삶과 사랑과 청춘을 기억하라고 외치는 찬가처럼 들린다.

“아 나스첸카, 행복과 기쁨의 순간에 축복이 너와 함께 하기를! 너는 감사하는 마음으로 가득 찬 어느 외로운 가슴에 행복과 기쁨을 주었으니까. 오, 신이여! 한 순간이나마 지속되었던 지극한 행복이여! 일생이 그것이면 족하지 않을까.”

석영중 : 고려대 노문과 교수. 『도스토예프스키, 돈을 위해 펜을 들다』 『자유, 도스토예프스키에게 배운다』등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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