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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대통령 중대 제안설 … 김정은 비핵화 ‘통큰 결단’할까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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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3호 08면

이번주 대북 특사 파견

문재인 정부가 이번 주에 대북 특사를 파견한다. 2007년 제2차 남북 정상회담을 준비하기 위해 김만복 당시 국가정보원장이 특사로 방북한 후 11년 만이다.

11년 만에 평양 가는 특사 #4월 한·미연합 훈련 예정돼 있어 #상당 기간 핵·미사일 도발 중단 등 #북 전향적 입장 보여야 북·미 대화 #과거엔 남북 교착상태 해소 #이후락 방북 후 7·4 공동성명 #임동원 평양 가 첫 정상회담 논의 #정동영 북 6자회담 복귀 이끌어

 특사 파견 목적은 물론 비핵화에 대한 김정은 북한 노동당 위원장의 생각을 직접 확인하고 설득하기 위해서다. 평창 겨울올림픽 기간 중 특사 자격으로 남한을 방문한 김여정 노동당 중앙위원회 제1부부장, 김영남 최고인민위원회 상임위원장, 김영철 통일전선부장 등 북한 최고위 인사들에게 문재인 대통령이 직접 비핵화를 위한 미·북 대화 필요성을 설득했지만 당장 효과가 없었다. 북한 체제의 특성상 ‘결단’은 오직 김정은 위원장만이 내릴 수 있기 때문이다. 남북관계에 정통한 한 소식통은 3일 중앙SUNDAY에 “문 대통령이 제시한 향후 비핵화 로드맵 등에 대한 김영철 부장의 보고를 받은 김 위원장의 입장을 직접 들어보고 설득할 필요가 있다”고 설명했다.

 정부가 서둘러서 3월 중 대북 특사 파견 카드를 꺼낸 이유는 4월 한·미 연합군사훈련이 예정돼 있기 때문이다. 북한은 올해 들어서만도 이미 수차례 한·미 군사훈련 중단을 명시적으로 요구했다. 이번에 방남한 북한 대표단도 “한·미 훈련을 예정대로 실시할 경우 (북한) 군 등 내부의 반발이 있을 수 있어 수용할 수 없다”는 반응을 보였다.(중앙일보 3월 1일 자 1면 보도) 도널드 트럼프 미국 행정부의 초강력 대북 제재 발표(2월 23일)에 이어 평창 올림픽 기간 중 연기된 한·미 군사훈련이 4월에 실시될 경우 이에 반발한 북한이 지난해 11월 이후 중단한 핵·미사일 도발을 재개할 가능성이 있다. 북한 조선중앙통신은 3일에도 “지난달 27일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린 군축회의에서 미국이 겨울철 올림픽 경기대회가 끝나는 즉시 우리에 대한 핵 선제공격을 노린 합동군사연습을 벌여 놓으려고 획책하고 있는 데 대해 규탄했다”고 보도했다.

 정부는 이번 특사 파견을 통해 비핵화를 목표로 한 대화에만 나서겠다는 트럼프 행정부를 설득할만한 북한의 전향적인 입장을 끌어내야 한다. 예를 들어 상당 기간의 핵·미사일 도발 중단(모라토리엄) 의지 표명이 그것이다. 북한이 억류 중인 한국계 미국인 3명 석방 결정도 분위기를 좋게 만들 수는 있다. 하지만 상황은 녹록지 않다. 조명균 통일부 장관은 지난달 28일 민주당 외교안보통일자문회의에서 “현재 국면에서 북·미 대화가 쉽지 않다”고 토로했다. 이 때문에 정부 안팎에서는 방남한 북한 대표단에 문 대통령이 일종의 ‘중대 제안’을 했고 이에 대한 김 위원장의 입장을 확인하기 위해 대북 특사를 파견하는 것이라는 관측까지 나오고 있다.

 대북 특사 카드는 1970년대부터 고비고비마다 남북관계나 비핵화 6자회담의 교착상태를 해소하는 숨통 역할을 해왔다. 정부 관계자는 “남북한 간에 군사적 대치상태가 엄중하고 신뢰가 전혀 구축되지 않은 상황에서 각종 현안 해결에 있어 최고 책임자의 의사는 결정적이었다”며 “이에 따라 최고 책임자 간에 의견을 직접 교환할 수 있는 특사의 역할은 정권과 상관없이 매우 중요했다”고 설명했다.

 첫 대북 특사는 1972년 5월 평양을 방문해 김일성 주석을 두 차례 만난 이후락 당시 중앙정보부장이었다. 북한 박성철 부수상의 서울 방문으로 이어진 첫 특사 교환의 성과물은 이후 남북관계의 이정표를 제시한 ‘7·4 남북 공동성명’이었다. 두 번째 대북 특사 파견은 1985년이었다. 그해 9월 허담 조국평화통일위원회 위원장의 서울 방문과 10월 장세동 국가안전기획부장의 평양 방문이 이뤄졌다. 당시 남북 간에는 정상회담 개최 논의까지 진행됐으나 특사 교환 직후인 10월 부산 앞바다 북한 무장간첩선 격침사건이 발생하면서 결국 별다른 성과 없이 유야무야됐다.

 노태우 정부 당시엔 서동권국가안전기획부장이 1990년 10월 평양에서 김일성 주석과 김정일 총비서를 모두 만나 남북정상회담 개최를 논의했다. 이후 북한은 한·미 팀스피릿 훈련 실시를 이유로 남북대화를 거부했다.

 김대중·노무현 정부 시절(1998~2008년) 대북 특사 카드는 이전과 비교할 때 훨씬 활발하게 추진됐다. 김대중 정부의 대북 특사는 임동원 대통령 외교안보통일특보였다. 2001년 미국 부시 행정부의 대북 강경정책과 9·11 테러 발생으로 정례 개최되던 남북 장관급회담이 중단되자 김 전 대통령은 2002년 4월 임 특보를 대북 특사로 평양에 파견했다. 임 특사는 남북관계, 미·북 대화, 북핵 문제 등 현안 해결을 위한 김정일 위원장의 결단을 촉구했고 김 위원장은 남북관계 복원과 경의선·동해선 철도·도로 연결 제안 등으로 화답했다. 앞서 임 특사는 2000년 국가정보원장 재직 당시 첫 남북정상회담을 준비하기 위해 두 차례 방북했다.

 2002년 미국 제임스 켈리 특사의 방북 이후 북한의 고농축우라늄계획(HEU) 의혹으로 2차 핵위기가 불거지자 2003년 1월 임동원 특사는 또 한 번 방북길에 올랐다. 노무현 대통령 당선인 측 이종석 대통령직 인수위원(나중에 통일부 장관)과 함께 대화를 통한 핵 문제 해결을 촉구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당시 김 위원장은 지방에 있다는 이유로 면담을 사실상 거부했다.

 노무현 정부 때엔 2005년 6월 정동영 당시 통일부 장관이 특사 자격으로 김 위원장을 면담했다. 정 특사는 북한의 6자회담 복귀와 핵 폐기에 관한 전략적 결단을 내릴 것을 촉구했다. 또 북한의 핵 폐기시 미·북 제네바 합의 폐기로 건설 중단된 경수로 2기를 대신해 200만kW의 전력을 북한에 직접 송전해 줄 수 있다는 ‘중대 제안’을 직접 설명하기도 했다. 현재 정부 안팎에서 제기되는 ‘중대 제안’ 설의 원조 격인 것이다. 이후 북한은 6자회담에 복귀했고 9월엔 6자회담 최초의 합의인 ‘9·19 공동성명’으로 이어졌다. 2007년엔 2차 남북 정상회담 개최를 위해 김만복 당시 국가정보원장이 두 차례 특사 자격으로 방북했다.

 이명박·박근혜 정부에서는 3차 남북정상회담 개최를 위한 논의가 이뤄진 적은 있었으나 대북 특사는 파견되지 않았다.

차세현 기자 cha.sehyeo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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