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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로운 세계] 사표ㆍ자퇴 대신 총을 든 사람들 … 미국은 어쩌다 ‘총기 난사국’이 되었나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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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은품으로 총을 드리고 있어요.”

유명 감독 마이클 무어의 다큐멘터리 ‘볼링 포 콜럼바인’(2002)의 한 장면. 미국의 한 은행을 찾은 감독에게 직원이 친절히 안내합니다. 계좌를 만들면 선물로 총을 준다고요.
16년 전에 제작된 다큐멘터리지만 지금도 미국의 현실은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습니다.

최근 플로리다주의 한 고등학교에선 이 학교의 퇴학생이 총기를 난사해 17명이 사망하는 참사가 발생했습니다. 미국 사회는 비통에 빠졌죠.
그럼에도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제대로 된 대책 대신 “교사들을 무장시키겠다”는 등의 발언을 해 사람들의 분노를 자극했습니다.

특히, ‘총기 난사 세대’(1999년 미국 사회를 충격에 빠뜨린 ‘콜럼바인 고교 총기 난사 사건’ 이후 일상적인 총기 공포 속에서 자라난 세대)로 불리는 10대가 폭발했죠. 이들은 “전미총기협회(NRA)의 로비를 받는 정치인들은 부끄러운 줄 알라”며 총기 규제 강화 시위를 주도하기 시작했습니다.

다큐멘터리 '볼링 포 콜럼바인'

다큐멘터리 '볼링 포 콜럼바인'

다큐멘터리 '볼링 포 콜럼바인'

다큐멘터리 '볼링 포 콜럼바인'

사실 총기 제작ㆍ판매업체들의 막강한 자금력으로 전미총기협회가 정치인들에 엄청난 로비를 하고 있으며, 이 때문에 미국에서 총기 규제가 어렵다는 사실은 우리에게도 꽤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유독 미국에 총기 난사 사건이 많은 건, 오직 이 문제 때문일까요?
개인 총기 소유가 가능한 나라는 캐나다ㆍ스위스ㆍ프랑스 등 여러 곳인데 말입니다.

[임주리의 영화로운 세계] 네 번째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영화 '케빈에 대하여'

영화 '케빈에 대하여'

‘케빈에 대하여’(2011)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성공한 여행 작가 에바(틸다 스윈튼)는 미국 교외 지역에서 여느 평범한 백인 중산층 가정과 크게 다르지 않은 삶을 살고 있죠. 아니, 그 일이 있기 전까진 그랬습니다.
그러나 아들 케빈(에즈라 밀러)이 학교에서 무차별적 학살을 저지른 후, 에바의 삶은 지옥이 되고 맙니다. (케빈이 사용한 무기는 활이었지만 ‘총기 난사’가 자연히 연상되죠.)  

극심한 죄책감과 고통 속에서 에바는 매일같이 과거를 떠올립니다.

출산과 육아가 전혀 행복하지 않았던 에바, 어렸을 적부터 엄마에게 적개심을 보였던 케빈. 혹여 자신의 잘못으로 케빈이 그렇게 된 것은 아닐까. 생각하고 또 생각해 봐도 여전히 아이가 왜 그랬는지 에바는 알 수 없습니다.

케빈은 혹, 사이코패스였던 걸까요? .
이 영화가 개봉했을 당시 관련 기사와 리뷰 상당수가 ‘사이코패스(혹은 소시오패스)를 둔 엄마’란 표현을 썼던 것처럼 말이죠.
그러나 영화는 쉽게 답을 내리지 않습니다

영화 '케빈에 대하여'

영화 '케빈에 대하여'

가만있자 … 사이코패스, 정신 병력, 우울증, 외톨이라.
눈치채셨겠지만 미국에서 이런 사건이 일어날 때마다 언론이 총격범을 묘사하는 데 거의 빠뜨리지 않고 쓰는 말들이죠. 이번 플로리다 사건도 그랬습니다. 총격범 니콜라스 크루스가 “정신적 문제가 있었다”는 보도가 쏟아졌습니다.

종합하면 ‘탐욕스런 총기 업자들의 로비로 규제는 힘들고, 때문에 누구나 총을 가질 수 있는 미국에선 사이코패스의 꼭지가 돌 때마다 이런 사고가 일어난다’는 겁니다.

그러나 문제는 이렇게 간단치가 않습니다.

백악관 앞에서 총기 규제 시위를 벌이며, 드러눕는 퍼포먼스를 벌인 시위자들. [AP=연합뉴스]

백악관 앞에서 총기 규제 시위를 벌이며, 드러눕는 퍼포먼스를 벌인 시위자들. [AP=연합뉴스]

미국 저널리스트 마크 에임스는 『나는 오늘 사표 대신 총을 들었다』에서 광범위한 사례를 분석해 ‘총기 난사 범인들을 프로파일링하긴 힘들다’고 밝힙니다. 한마디로 사이코패스만 이런 일을 벌이는 건 아니란 얘기죠.

그리고 이렇게 주장합니다.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1981~89 재임)이 ‘레이거노믹스’로 통칭하는 신자유주의 정책을 밀어붙인 1980년대 이후 과도한 경쟁과 불안정한 일자리 문제가 미국인의 일상에 깊이 침투했다. 양극화는 점점 심해졌고 극한에 다다른 업무량과 경쟁, 직장 내 스트레스는 견딜 수 없을 지경이 됐다. 이런 문화는 학교에도 스며들었다. 1990년대 후반 전염병처럼 번진 ‘사무실 총기 난사’와 이어진 ‘학교 총기 난사’ 사건들은 이런 맥락에서 살펴야 한다.”

전미총기협회 대변인 다나 로에시가 미국 보수주의연맹 연차총회 '보수정치행동회의'에서 발언하고 있다. [EPA=연합뉴스]

전미총기협회 대변인 다나 로에시가 미국 보수주의연맹 연차총회 '보수정치행동회의'에서 발언하고 있다. [EPA=연합뉴스]

그러면서 “폭력적인 미디어나 전미총기협회도 그 이유의 한 부분일 뿐”이라고 강조합니다.
근본적인 원인은 신자유주의에서 파생한 문화 그 자체라는 거죠. 심지어 그는 민영화 이후 1980년대 우체국에서 시작된 일련의 총기 난사 사건들을 두고 “레이거노믹스에 맞선 최초의 봉기들”이란 다소 과격한(?) 표현까지 씁니다.

앞서 말한 다큐멘터리 ‘볼링 포 콜럼바인’에도 비슷한 얘기가 나옵니다.
무어 감독이 인터뷰한 한 콜럼바인 고교 졸업생이 이런 말을 합니다.

“학교는 괴로울 정도로 정상적이고 끔찍하게 평범하죠. 한 번 낙오자는 영원한 낙오자다는 말을 주입해요. 한 번 망치면 영원히 끝장이라고요. 왕따 따윈 신경 쓰지 않아요.”

콜럼바인 총기 난사범 에릭과 딜란은 학교에서 따돌림을 당한 아이들이었습니다. “캠퍼스에서 벌어지는 총기 사건은 단순히 개인의 행위이기보다는 개인이 속한 사회적 환경에 더 큰 원인이 있다고 볼 수 있다”(『미국의 총기 문화』에서)는 분석이 나온 이유죠.

콜럼바인 고교 총격범 중 한 명인 딜런의 엄마 수 클리볼드가 사건 발생 17년 후 펴낸 책.

콜럼바인 고교 총격범 중 한 명인 딜런의 엄마 수 클리볼드가 사건 발생 17년 후 펴낸 책.

신자유주의는 미국에만 퍼진 것이 아니지만, 마크 에임스 등 이 문제를 파고든 저널리스트들은 “그럼에도 미국 만큼 양극화가 심한 곳은 드물다”고 입을 모읍니다.

총기 소유가 합법인 다른 나라들에서 엄격한 등록제 등을 시행하는 것과는 달리, 미국에선 총을 너무 쉽게 구할 수 있다는 것도 심각한 문젭니다.
콜럼바인 고교의 에릭과 딜란도 마트에서 총알을 구입했죠.

“미국은 총기 등록제를 실시하지 않으며 총기 구입 시 신원 조회도 형식적이다. ‘총기 쇼’나 벼룩시장에서는 신분 조회조차도 하지 않는다”(『미국의 총기 문화』에서)
여기에 부시 전 대통령 시대에 강화한 군수 산업체들의 ‘공포 마케팅’도 한몫한다고 무어 감독은 지적하고 있죠.

그렇다고 모든 것을 총기 관련 업체들의 탓으로 돌릴 수도 없습니다.

미국의 역사적ㆍ문화적 맥락을 짚어보면 감이 오실 겁니다.

서부극 '리버티 벨런스를 쏜 사나이'의 한 장면.

서부극 '리버티 벨런스를 쏜 사나이'의 한 장면.

‘총기 문화’의 출발은 1775년 식민지 미국이 영국에 맞서 독립전쟁을 벌였던 때였습니다. 총을 든 민병대의 활약이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죠. 이후 연방 정부가 꾸려졌을 때, 각 주(州) 정부들은 연방 정부의 독재를 막기 위해 ‘총기를 보유하고 간직하는 국민의 권리를 침해하지 못한다’는 내용을 아예 헌법에 박았습니다. 그 유명한 ‘수정헌법 제2조’입니다.

서부 개척 시기 남성들에게 총기 소유는 더욱 중요해집니다. 오로지 자신의 힘으로만 가족을 지켜야 했거든요. 미국에서 총기 소유는 이렇게 ‘개인의 소중한 권리’로 인식되기 시작합니다. 노예제 폐지를 둘러싸고 벌어진 남북전쟁(1861~65년)에서 총기의 수요와 공급은 폭발합니다. 미국인에게 총은 ‘자유를 지키기 위한 가장 소중한 수단’으로 뗄레야 뗄 수 없는 것이 되고 말죠. 이 신념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강준만 교수는 『미국은 세계를 어떻게 훔쳤는가』에서 “미국의 발달사는 시민의 무기 소지가 필요한 정도를 넘어서 ‘영광스러운 일’로 여겨지게 만들었다”고 정리하죠.

그러면서 “전미총기협회가 막강한 건 사실이지만 그런 측면만을 강조하면 미국의 총기 문제가 체제 차원의 이념 투쟁이라는 큰 그림을 놓치게 된다”고 지적합니다. 미국에서 ‘총’은 독재에 맞서는 힘, 자유라는 “미국의 건국 이념과 맞닿아 있는 것”이란 얘깁니다.

19일(현지시간) 백악관 앞에서 10대 주도로, 총기 규제를 주장하는 시위가 열렸다. [AP=연합뉴스]

19일(현지시간) 백악관 앞에서 10대 주도로, 총기 규제를 주장하는 시위가 열렸다. [AP=연합뉴스]

그럼에도 평균적으로 한 해 1만 명 넘는 사람들이 총격으로 목숨을 잃는 미국에서 총기 규제 논의는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때가 온 것 같습니다. 물론 지금까지 그래왔듯, 쉽지는 않아 보입니다. 트럼프 대통령이 최근 입장을 바꿔 “신원 조회 강화 등 포괄적인 총기 규제 강화안을 마련해야 한다”고 밝히긴 했지만, 미 언론 대부분은 여전히 관련 법안 마련이 난항을 겪을 것이라 내다보고 있죠.

바야흐로 ‘미투’의 시대, 미국의 10대들은 ‘#미넥스트(Me Next)’라는 해시태그를 달며 “내가 다음 차례인가요?”라고 묻고 있습니다. ‘미넥스트’의 힘이 ‘미투’만큼 커지기를 바라면서요.
임주리 기자 ohmaju@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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