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박정호의 사람 풍경] 일제가 망친 석주 할아버지 생가, 옛 모습 찾는 날 진정한 독립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16면

독립운동의 명가 경북 안동 ‘임청각’ 지킴이 이창수씨

임청각은 한국독립운동사의 산증인이다. 이창수씨가 나라를 위해 헌신한 할아버지들의 사진이 걸린 임청각에 서 있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임청각은 한국독립운동사의 산증인이다. 이창수씨가 나라를 위해 헌신한 할아버지들의 사진이 걸린 임청각에 서 있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여기를 보세요, 상자, 동자 할아버지의 이름이 있네요.” 이창수(53)씨가 광장 바닥에 박힌 동판을 가리켰다. ‘안동장터 3·1운동지’라고 쓰여 있다. 서울로 치면 안동의 명동쯤 된다. 그 아래 설명을 읽었다. ‘이곳은 안동에서 처음으로 3·1운동이 일어난 안동장터이다. 1919년 3월 13일 이상동의 단독 시위를 시작으로 18일 2500여 명, 23일 3000여 명이 독립만세를 외쳤으며…’가 들어온다.

한 집안서 독립운동가만 9명 #고조부 이상룡 재산 팔아 만주로 #신주도 없어 광복절에 합동 제사 #99칸 기와집, 50여 칸만 남아 #일제가 마당 가운데로 중앙선 놓아 #2020년 철로 걷어내고 복원 시작 #글·재물·아들 안 빌리는 전통 깨져 #500년 가문에 내가 첫 양자 종손 #현충원 임정요인 묘역 관심 가져야

‘안동 독립운동 사적지 안내도’도 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령 석주 이상룡 생가- 임청각’이 맨 위에 표기됐다. 석주(石洲) 이상룡(1858~1932)은 이상동(1865~1951)의 형이다. 당시 국무령은 국가수반이었다. 1919년 발족한 임시정부는 1925년 개헌을 하면서 대통령 중심제에서 국무령 중심의 내각책임제를 채택했다. 석주는 짧게나마 첫 국무령을 맡았다.

이창수씨는 석주의 현손(玄孫·증손자의 아들)이다. 석주가 그의 고조부다. 이씨와 함께 장터에서 자동차로 5분여 떨어진 임청각(보물 182호)을 찾았다. 영남산을 뒤로, 낙동강을 앞에 둔 고성 이씨 종택이다. 500년 세월을 끌어안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살림집이다. 원래 99칸짜리 기와집이었으나 일제가 마당에 중앙선 철도를 놓으면서 50여 칸만 남게 됐다. 20세기 한국사의 상처다.

임청각은 한국 독립운동의 명소다. 석주는 1911년 대대로 내려온 임청각 재산을 처분해 만주로 건너가 항일 무장투쟁을 이끌었다. 그는 물론 형제·자손 9명이 독립운동가 서훈을 받았다. 그들의 독립투쟁 기간을 다 더하면 300년이 넘는다. ‘노블리스 오블리주’의 표본으로 꼽힌다. 3·1절을 맞는 이씨의 감회가 각별할 수밖에 없다.

이씨와 임청각을 지켜온 그의 다섯째 삼촌 항증씨.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이씨와 임청각을 지켜온 그의 다섯째 삼촌 항증씨.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임청각 복원이 추진되고 있죠.
“중앙선 복선 전절화가 마무리되는 2020년 시작된다고 들었어요. 지금 있는 철로가 걷히고 옛 모습을 찾게 되는 날에 진정한 독립이 이뤄진다고 생각합니다. 18세기 임청각 그림을 보면 낙동강에 배를 대는 선착장도 있었어요.”
조상의 후광이 부담스럽겠어요.
“아무래도 언행이 조심스럽죠. 어릴 때는 종손이 뭔지도 몰랐어요. ‘너는 종손이 돼야 한다’는 말을 듣고 컸습니다. ‘그래야 되나 보다’ 하고 살았죠. 차남이면 편하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을 잠깐 한 적도 있습니다.”
양자로 종손이 됐다고 합니다.
“아버님 형제가 6남 1녀입니다. 생부는 네 째 아들이죠. 맏형이 아들 없이 타계해서 제가 초등 6학년 때 양자로 갔습니다. 둘째 삼촌은 6·25 때 행방불명이 됐고, 셋째 삼촌은 67년 돌아가셨죠. 막내 삼촌과 고모는 대구 고아원에서 학교를 다녔고요. 수백 년 가문에서 양자는 제가 처음입니다. 오랜 ‘삼불차(三不借)’ 전통이 깨졌다고 합니다.”
3불차라니, 무슨 뜻입니까.
“첫째 글을, 둘째 재물을, 셋째 아들을, 즉 3가지를 빌리지 않는다는 겁니다.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모두 다 무너졌어요. 후손들은 가난했고, 교육을 받지 못했고, 직계(直系)도 끊겼으니까요. 생부께선 평생 울분 속에 사셨습니다. 술을 많이 드시다 78년 돌아가셨는데 제가 종손이 된지 1년 후였죠. 어머니께서 삯바느질, 사과 따기, 보험영업 등 갖은 고생을 2남 3녀를 키우셨어요.”
그래도 자부심은 살아 있겠죠.
“생부의 말씀이 지금도 생생해요. 생활은 궁색했지만 ‘어떤 경우에도 친일파에게 져서는 안 된다. 공부해서 이겨내라’ ‘독립운동가 긍지를 가져라’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어머니도 매우 강인하셨고요.”
예를 든다면요.
“도둑질과 개가(改嫁), 두 가지를 빼고 다한다고 하셨어요. 아버님 술에 물리셨는지 제겐 술을 금하셨습니다. 제사상에도 감주를 올리라고, 만약 술을 올리면 ‘모자의 정을 끊겠다’ ‘귀신이 돼서도 돌아가겠다’고 하셨죠. 그 때문이지 주량이 딱 소주 한 잔입니다. 석주 할아버지도 경술국치 이후 술 한 잔 입에 대지 않으셨다고 해요.”
허주(虛舟) 이종악이 1763년에 그린 임청각 풍경. 그림 왼쪽과 오른쪽의 ‘ㅁ’자형 건물 세 채가 일제강점기에 유실됐다.

허주(虛舟) 이종악이 1763년에 그린 임청각 풍경. 그림 왼쪽과 오른쪽의 ‘ㅁ’자형 건물 세 채가 일제강점기에 유실됐다.

임청각 사당에 들어갔다. 사방이 텅 비었다. 신주(神主·죽은 사람의 위패)와 감실(龕室·신주를 모시는 곳)이 없다. 석주가 “광복이 될 때까지는 절대 돌아오지 않겠다”며 조상의 신주를 땅에 묻었다는 이야기가 내려온다. 이씨는 “임청각이 복원돼도 없던 신주를 새로 만들 수는 없고, 감실이라도 마련하고 싶다”고 했다. 이어 “조상의 신주가 없기에 매년 광복절에 합동 기제사를 드린다”고 말했다.

이씨는 서울에서 은행에 다니고 있다. 조상 묘소를 지키려 안동에서 보험영업을 했지만, 살림이 어려워 1994년 서울로 올라왔다. 매달 두 차례 안동에 내려가 집안 대소사를 살피고, 다른 종가 행사에도 참여한다. 추석 성묘만 20여 곳을 다녀야 한다. 몸도 마음도 바쁜 종손의 길이다.

내년이면 3·1절 100주년입니다.
“지금으로 치면 촛불혁명과 태극기 집회를 합쳐 놓은 셈입니다. 좌우대립, 남녀노소 없이 온 나라가 하나로 뭉쳤죠. 석주 할아버지는 영남 지역 최초로 노비를 해방시킨 다음 만주로 가셨어요. 선각자셨죠. 하지만 후손으로써 아쉬움도 있습니다.”
사람들 관심이 부족하다는 거죠.
“3·1절이나 광복절에 정치인들이 동작동 현충원에 있는 전직 대통령 묘소에 참배하면서도 왜 임시정부 요인 묘역은 빠뜨리는지 안타까워요. 석주 할아버지가 그곳에 계셔서가 아니에요. 헌법에도 ‘대한국민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잇는다고 써 있지 않습니까. 내년 임시정부 수립 100년을 맞아 애국 선열들의 묘역도 정비했으면 합니다.”
100년 전 집안이 대단했겠죠.
“당시 분재기(分財記)가 남아 있지 않아 정확히 알 순 없지만 임청각 고문서를 보면 18세기 초 노비 수가 371명이나 됐어요. 막대한 재산이죠. 그것을 팔아 의병·독립운동에 썼으니 쉬운 결단은 아니었을 겁니다. 다행히 임청각은 문중에서 되샀지만요.”
당신이라면 어떻게 했을까요.
“능력은 부족하지만, 또 장담은 할 순 없지만 저도 만주로 갔을 것 같습니다. 고향에 계속 남았다면 후손들이 편안했겠지만 워낙 어려서부터 항일운동 얘기를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으니까요.”
임청각은 끝까지 지킬 건가요.
“은퇴 후 안동으로 내려가야죠. 지금까진 다섯 째 삼촌께서 애를 쓰셨습니다. 집안 문집도 정리하셨고요. 무엇보다 한문공부를 더 해서 ‘3불차’ 중 글자라도 빌리지 않았으면 합니다. 최소한 신주는 쓸 줄 알아야 하지 않겠어요. 또 아들과 함께 만주 유적지를 순례하려 합니다. 먹고 산다는 것을 구실로 아직 한 번도 가보지 못했습니다.”

[S BOX] 머리가 베일 망정 일제의 종은 되지 않으리라

석주 이상룡 선생의 거국음.

석주 이상룡 선생의 거국음.

‘보배로운 우리 강산 삼천리, 의젓한 유교문화 오백 년. (중략) 잘 있거라 고향 동산 근심하지 말거라, 태평한 훗날 다시 돌아와 머무르리다.’

임청각 마루에 붙은 시구다. 석주 선생이 1911년 고향을 떠나며 읊은 ‘거국음’(去國吟·사진)의 일부다. 나라를 잃은 선비의 슬픔과 기개가 느껴진다. 첫 이름이 상희(象羲)였던 선생은 만주로 건너가 상룡(相龍)으로 개명했다. 선생은 비록 이역만리에서 타계했지만 임청각을 찾는 이들은 ‘거국음’의 큰 뜻을 돌아보게 된다.

이창수씨와 함께 ‘거국음’ 앞에 섰다. 100여 년의 비통한 심정에 고개를 숙였다. 이씨가 평소 좌우명처럼 마음에 새긴 시구도 있다. ‘차라리 머리가 베일망정 무릎 꿇어 (일제의) 종은 되지 않으리라’다. 석주가 압록강을 건너며 다진 각오다. ‘누구를 위해서 발길 머뭇머뭇하랴. 돌아보지 않고 호연히 가리라’고도 했다. 이씨는 ‘공자와 맹자는 나라를 되찾은 뒤 읽어도 늦지 않다’는 대목도 꺼냈다. 석주가 1905년 을사늑약 직후 가야산에서 의병을 일으켰을 때 한 말이다.

“석주 할아버지는 퇴계의 학통을 잇는 동시에 근대 서구문물에도 눈을 뜨셨어요. 제가 딱히 내세울 건 없지만 그 가르침만은 잊지 않고 있습니다.”

박정호 문화·스포츠 담당 jhlogos@joongang.co.kr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