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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민호의 레저터치] 봄, 산수유꽃, 그리고 컬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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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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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 ‘지난겨울’을 한자로 ‘객동(客冬)’이라 한다. ‘객(客)’이란 낱말에 ‘손님’과 ‘과거’란 뜻이 포개져 있다. 사람이든, 계절이든 곁을 파고드는 무언가는 언젠가 떠나게 마련이어서인가 보다. 아무튼 우리는 지난겨울을 떠나보냈다.

겨울을 지냈으니 봄이다. 마침내 봄이다. 아침 바람은 여전히 맵지만, 숫자 ‘3’이 박힌 달력만 믿고 일단 봄이라고 우긴다. 그래야 움츠렸던 어깨 펼 수 있을 것 같고, 얼었던 가슴 조금이나마 열 수 있을 것 같다. 지난 계절이 그만큼 유별났다.

들뜬 마음에 남도의 묵은 인연들에게 안부를 물었다. 이맘때마다 그들에게 묻는 안부는 죄송하게도 봄에 관한 것이다. “봄이 왔느냐?”는 물음에 아직은 “시원치 않다”는 대답이 대부분이다. 이를테면 지리산 남쪽자락 악양의 인연은 “살짝, 겨우 꽃망울 움트고 있다”고 말했다. ‘살짝’과 ‘겨우’가 지금 이 시절 지리산의 춘신(春信)이다. ‘바야흐로’와 ‘완연’을 거쳐 ‘화사’라고 부르기에는 이르다는 뜻이지만, ‘살짝’과 ‘겨우’의 미미한 기동(起動)에서도 우리는 설렌다.

기실 봄은 먼곳으로부터 오는 기척과 같은 것이다. 희미하고 아스라한 기운 같은 것이다. 이 무렵이면 으레 봄을 찾아 나서곤 하는데, 어지간하면 전남 구례 산동마을은 꼭 들른다. 이달 중순에서 하순 사이 산동에 가면, 그러니까 이른 아침 양지바른 돌담길 모퉁이를 돌아서면 노란 기운 자욱한 장면을 맞닥뜨리기 때문이다. 산수유꽃이 바람에 흔들리는, 이 어지럽고 아른거리는 풍경 앞에서 나는 “봄이 왔다”고 선언한다.

산수유꽃 피고 나면 봄은 이윽고 완연해진다. 전남 광양의 매화도 구례 산수유꽃과 비슷한 시절을 살다 가지만, 춘신 1신(一信)은 산수유꽃이 마땅하다. 산수유꽃이 아지랑이처럼 몽개몽개 피어난다면 매화는 사태라도 난 양 산야를 덮어버려서이다. 벚꽃은 그 다음이다. 매화 난장이 끝나고 여남은 날이 지나면 섬진강 건너편 경남 하동은 벚꽃 세상이 된다. 벚꽃 지는 밤, 아니 점점이 벚꽃 흩날리는 봄밤, 우리의 가슴은 무너진다. 속절없이 허물어진다. 벚꽃 지면 봄도 진다. 객춘(客春). 봄도 객이 되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나의 꽃놀이는 좀처럼 지리산 자락을 벗어나지 못했다. 방방곡곡에서 허다한 꽃이 피고 지지만 지리산만 한 정취는 아무래도 덜해서였다. 그래도 이번 봄은 방향을 틀어볼까 한다. 영남에도 산수유꽃 하면 떠오르는 고장이 있다. 경북 의성에도 봄이면 산허리 따라 노란 꽃띠를 두르는 마을이 있다. 마을 이름도 꽃밭동네, 화전리(花田理)다. 한동안 잊고 지냈던 산수유 고장인데, 평창 올림픽이 일깨워줬다. 의성은 마늘 못지않게 산수유도 유명하다. 지금은 물론 컬링이 훨씬 유명하지만.

올봄에는 의성으로 꽃놀이를 가야겠다. 어쩌면 의성은 평창 올림픽이 낳은 유일한 관광 유산일지 모른다. 참, 마늘꽃을 아시는지. 꽃 피기를 기다리지 못하고 마늘을 뽑아서 그렇지 마늘꽃도 예쁘다. 산수유꽃도 좋지만 이번 봄, 문득 마늘꽃이 보고 싶다. 한참을 기다려 봄을 맞은 것처럼 마늘꽃도 참고 견뎌야 볼 수 있으므로.

손민호 레저팀장 ploveso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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