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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논설위원이 간다

여성 '혼행족' 피살된 제주 '파티형 게하'엔 男 33명, 女 3명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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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2면

장세정 기자 중앙일보 논설위원

설 연휴 직전 제주시 구좌읍 S게스트하우스에서 발생한 20대 여성 관광객(26) 피살 사건의 충격파가 좀처럼 가시지 않고 있다. 경찰에 따르면 유력한 살인 용의자였던 게스트하우스 관리인 H씨(32)가 목매 숨지면서 조만간 검찰이 '공소권 없음'으로 사건을 종결할 예정이다.

여성 피살 사건이 발생한 제주 구좌읍 S게스트하우스. 시신은 폐가에서 발견됐다. 장세정 기자

여성 피살 사건이 발생한 제주 구좌읍 S게스트하우스. 시신은 폐가에서 발견됐다. 장세정 기자

 '유네스코 3관왕'(세계자연유산·생물권보전지역·세계지질공원)과 '세계 7대 자연경관'에 뽑힌 제주의 자연을 사랑하고, 나홀로 제주 여행을 즐겨온 여성들뿐 아니라 딸을 둔 부모들은 이번 살인 사건으로 받은 충격이 특히 크다.

제주 성산 일출봉 인근은 자연 경관이 아름다워 게스트하우스가 많이 몰려 있다. 장세정 기자

제주 성산 일출봉 인근은 자연 경관이 아름다워 게스트하우스가 많이 몰려 있다. 장세정 기자

 이번 살인 사건의 무대는 젊은 '혼행족'(혼자 여행하는 사람)들이 즐겨 찾았던 파티형 게스트하우스였다. 제주 게스트하우스를 배경으로 한 영화 '올레'에서 묘사된 것처럼 주로 2030 젊은이들이 하룻밤에 1만5000원~2만원 정도의 숙박비만 내면 처음 만난 남녀들이 자연스럽게 파티를 하면서 어울릴 수 있어 인기였다.

자연 경관이 수려한 제주에는 혼행족들이 많이 몰린다. 사진은 제주 우도 올레길. 장세정 기자

자연 경관이 수려한 제주에는 혼행족들이 많이 몰린다. 사진은 제주 우도 올레길. 장세정 기자

 하지만 4050에 속하는 기자가 파티형 게스트하우스를 예약하는 것부터 어려움이 있었다.
 제주의 한 게스트하우스 관계자는 기자의 전화 목소리를 듣더니 나이를 묻지도 않은 채 "사장님, 죄송하지만 저희는 2030 손님만 받습니다"라고 말했다. 예약을 거절한 그는 "평소 남녀 비율이 비슷했는데 (살인 사건 이후) 여성 손님들이 무더기로 예약을 취소해 요즘 남녀 비율이 8 대 2가 됐다"고 영업 고충을 토로했다.
 수차례 예약 실패 끝에 마침내 연령 제한도 없고 예약 접수에도 적극적인 게스트하우스 관계자와 전화가 연결됐다. 조심스레 예약자 남녀 비율을 물어봤지만, 업주는 단호하게 "알려줄 수 없다"고 했다. 일단 예약하고 직접 눈으로 확인하라는 투였다.

제주의 게스트하우스와 민박 안내 표지판. 사진 속 업소들은 기사의 특정 내용과 무관함. 장세정 기자

제주의 게스트하우스와 민박 안내 표지판. 사진 속 업소들은 기사의 특정 내용과 무관함. 장세정 기자

 4인실 기준 하룻밤 숙박비로 2만원을 받은 이 게스트하우스는 성산 일출봉이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오후 7시가 되자 삼겹살 파티가 마련된 1층에 투숙객들이 모여들었다. 미리 자리를 잡은 남자 손님들은 현관문이 열릴 때마다 들어오는 손님에게 시선을 보냈으나 줄줄이 남자 손님들이 몰려들자 실망한 눈빛이었다. 이날 36명의 손님 중에 남자는 33명, 여자는 3명뿐이었다. 그마저 3명 중 뒤늦게 도착한 여자 손님 2명은 최근의 살인 사건 때문에 불안했는지 파티에 불참했다. 결국 1차 파티는 남자 33명 대 여자 1명의 비율로 이뤄졌다.

제주의 게스트하우스 외부에는 렌트카들이 주차돼 있다. 사진은 기사의 특정 내용과 무관함. 장세정 기자

제주의 게스트하우스 외부에는 렌트카들이 주차돼 있다. 사진은 기사의 특정 내용과 무관함. 장세정 기자

 신하균 주연 영화 '올레'에 나오는 짝짜꿍 게스트하우스 장면처럼 남자가 압도적으로 많은 '극단적 성비 불균형' 상황이 빚어졌다. 이에 대해 업주는 "살인 사건 때문에 그런지 오늘은 완전히 '남탕'이라 죄송하다"고 했다. 그는 2030들에게 "다음에 오면 1대1로 짝을 맞춰주겠다"고 달랬다. 한 참석자는 "살인 사건 이전에는 파티형 게스트하우스가 2030 혼행족들을 커플로 맺어주는 역할을 많이 했다"고 전했다.
 파티 참가자에게는 1인당 1만5000원(여자 손님은 무료)을 추가로 받았다. 소주와 맥주는 각자가 원할 경우 한 병에 3500원을 주고 따로 사야 했다. 예상대로 기자가 최고령이었고 나머지 손님은 모두 2030이었다. 파티가 시작되자 젊은이들은 기자에게 질문을 많이 했다. "아버님, 왜 혼자 오셨어요?" "선생님, (젊은 사람들 노는)이런 곳에 혼자 오시다니 멋져요." "사장님, 댁에 무슨 일 있으세요?"
 나름 예의를 갖춘 질문들이었지만 '아재' 또는 '꼰대'가 왜 끼어서 물을 흐리느냐고 채근하는 듯해 솔직히 좀 미안하고 불편했다.

제주의 한 게스트하우스는 삽겹살 파티에 1인당 1만5000원을 받았다. 장세정 기자

제주의 한 게스트하우스는 삽겹살 파티에 1인당 1만5000원을 받았다. 장세정 기자

 일부 적극적인 남자 손님들은 30대 초반의 홍일점 여자 손님에게 소주잔을 건네고 삼겹살을 챙겨 주는 호의를 보이기도 했다. 대략 이런 문답이 오갔다.
 -혼자 여행 왔나요? =예. 2박 3일 정도 놀려고요.
 -대학생이세요? =직장을 그만두고 쉬는 동안 제주 여행을 왔어요.
 -오늘 여기 여자는 혼자뿐인데 불편하거나 불안하지 않으세요? =처음엔 좀 어색했지만, 대화를 나누다 보니 괜찮아요.

게스트하우스 투숙객들이 파티하며 마신 제주 특산 한라산 소주병이 수북하게 쌓여 있다. 장세정 기자

게스트하우스 투숙객들이 파티하며 마신 제주 특산 한라산 소주병이 수북하게 쌓여 있다. 장세정 기자

 성비 불균형 때문인지 이날 파티는 노래도 춤도 장기자랑도 없이 대화 중심으로 진행됐다. 군대와 취업·결혼 등을 주제로 대화가 이어지면서 2030들은 '죄 없는' 제주 특산 한라산 소주만 계속 비웠다. 파티가 무르익던 오후 9시쯤 업주는 "공식적인 파티는 9시 30분까지 마치고 이후에는 술을 팔지 않는다. 희망자는 알아서 놀면 된다"고 안내했다. 잠시 후 홍일점 여자 손님이 자리를 떴다. 일부는 편의점에서 사 온 술을 마시며 밤 11시까지 2차 파티를 했다. 술주정이나 고성방가 등 눈에 거슬릴 일탈적 행동은 보이지 않았다. 이튿날 들어보니 3~4명이 새벽 1시까지 밖에서 3차 음주 모임을 했다고 한다.

게스트하우스가 많이 몰려 있는 제주 성산읍 일대에 핀 유채꽃과 돌하르방. 장세정 기자

게스트하우스가 많이 몰려 있는 제주 성산읍 일대에 핀 유채꽃과 돌하르방. 장세정 기자

 파티형 게스트하우스에 여러 번 묵은 적이 있다는 한 남자 손님이 살인 사건 이전의 분위기를 들려줬다. "1차에서 술을 마시고 분위기가 달아오르면 삼삼오오 2차를 하고 그다음엔 클럽으로 직행한다. 성산읍에서 택시로 1시간 거리인 서귀포 중문단지 쪽 클럽까지 총알 같이 내달린다. 마음만 맞으면 밤새워 신나게 놀 수 있다."

제주의 한 게스트하우스 남녀공용화장실은 여자 투숙객들에게 불안감을 준다는 지적이다. 장세정 기자

제주의 한 게스트하우스 남녀공용화장실은 여자 투숙객들에게 불안감을 준다는 지적이다. 장세정 기자

 살인 사건 이후 제주 게스트하우스 영업이 다소 위축됐다지만 흥청망청할 때를 고려하면 각종 안전사고 위험 요인이 눈에 많이 들어왔다. 기자가 묵은 게스트하우스의 경우 1층과 2층 화장실은 모두 남녀공용이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면 남자용과 여자용이 나란히 배치돼 있어 여성들은 불안감과 불쾌감을 느낄 듯했다. 서울 강남역 여성 살인사건도 남녀공용 화장실에서 발생했다. 남녀 샤워장도 2층에 나란히 배치돼 있었다. 이날 한 남자 손님이 여자 샤워장에 잘못 들어가 샤워를 하고 나오자 이어서 다른 남자 손님도 여자 샤워장에 들어가는 '사건'도 벌어졌다.

제주의 한 게스트하우스에 남녀샤워장이 바로 붙어 있어 개선이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장세정 기자

제주의 한 게스트하우스에 남녀샤워장이 바로 붙어 있어 개선이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장세정 기자

 다중이용시설 화재 대비 미흡 등 불안한 요소들이 많이 잠복해 있다 보니 게스트하우스를 둘러싸고 크고 작은 사건·사고가 잇따르고 있다. 제주에서 상호에 게스트하우스를 사용하는 민박·펜션 등의 업소는 모두 240여 곳이다.

제주지방경찰청 청사 정문에 나붙은 경찰청의 주요 지명 피의자 공개수배 전단. 장세정 기자

제주지방경찰청 청사 정문에 나붙은 경찰청의 주요 지명 피의자 공개수배 전단. 장세정 기자

 제주지방경찰청에 따르면 민박으로 신고한 3471곳 중에서 지난 1년간 성범죄가 발생했거나 음주 파티 등으로 1회 이상 112신고가 접수된 곳은 171곳이다. 특히 제주에서 여성을 겨냥한 강간·강제추행 사건은 2007년 236건에서 지난해 464건으로 급증했다.

제주 올레1길안내판. 2012년 이곳에서 약 1.5 km 떨어진 올래길에서 여성이 살해됐다. 장세정 기자

제주 올레1길안내판. 2012년 이곳에서 약 1.5 km 떨어진 올래길에서 여성이 살해됐다. 장세정 기자

 중국인 관광객의 제주 A성당 여신도 살인 사건(2016년 9월), 제주 올레1길 여성 관광객 피살 사건(2012년 7월) 등 강력 범죄가 잇따르면서 범죄·사고·공해가 없는 '신 삼무도(三無島)'를 만들겠다던 제주도의 이미지가 크게 실추됐다.

제주의 한 성당에서 2016년 중국인 관광객이 여성 신도를 흉기로 살해했다. 장세정 기자

제주의 한 성당에서 2016년 중국인 관광객이 여성 신도를 흉기로 살해했다. 장세정 기자

 이번 살인 사건을 계기로 게스트하우스 안전장치 마련이 시급하지만, 당국이 검토 중인 대책을 보면 여성 혼행족과 부모들을 안심시키엔 미흡해 보인다. 성범죄자의 숙박업소 취업을 제한하자는 청원도 청와대에 제기됐지만, 헌법재판소는 이미 2016년 직업선택의 자유를 과도하게 제한한다고 판단해 실현 가능성이 낮아 보인다.

제주도는 4 ·3 70주년을 맞아 2018년을 '제주방문의 해'로 지정했지만 강력사건이 늘고 있다. 장세정 기자

제주도는 4 ·3 70주년을 맞아 2018년을 '제주방문의 해'로 지정했지만 강력사건이 늘고 있다. 장세정 기자

 제주도와 경찰은 합동 단속 및 지도점검과 별도로 게스트하우스 안전인증제 도입을 검토 중이다. CCTV 설치 여부, 여성 객실 출입문 보안 상태 등 일정한 안전 요건을 갖추면 A등급 안전인증마크를 발급하고 그렇지 못한 곳은 도태되도록 유도하겠다는 취지다.

 제주에서 여성 살해 사건 등 강력 범죄가 늘면서 종합대책이 절실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장세정 기자

제주에서 여성 살해 사건 등 강력 범죄가 늘면서 종합대책이 절실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장세정 기자

 제주지방경찰청 관계자는 "파티 자체를 금지할 수는 없겠지만, 음주 사고를 예방하기 위해 술을 파는 게스트하우스에는 안전인증을 내주지 않을 방침"이라고 말했다. 이제라도 당국이 좀 더 실질적인 종합대책을 내놔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돌·바람·여자가 많아 삼다도로 불리는 제주의 해녀상. 최근 제주에서 강력범죄가 늘고 있다. 장세정 기자

돌·바람·여자가 많아 삼다도로 불리는 제주의 해녀상. 최근 제주에서 강력범죄가 늘고 있다. 장세정 기자

 제주·서귀포=장세정 논설위원 zhang@joongang.co.kr

[논설위원이 간다] #장세정의 사사건건 #불안감 느낀 여성들 예약 줄 취소 #남초 현상에 업주 "남탕이라 죄송" #2030 자연스런 만남의 공간 역할 #"파티하다 마음 맞으면 클럽 직행" #성범죄· 음주파티 등 171곳 신고돼 #남녀 공용화장실 등 안전사고 우려

※기사 관련 영상 편집 작업에 윤가영 인턴이 참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