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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 살 전 죽는다 했지만 웹디자이너 꿈 이뤘어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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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근육에 힘이 빠지는 ‘척수성 근위축증(SMA)’을 앓고 있는 곽희진씨. 전남대 문화사회과학대학 시각정보디자인학과를 졸업한 곽씨는 두 달 전 애견용품 업체 ‘멍멍닷컴’의 웹디자이너가 됐다. [사진 강남세브란스병원]

근육에 힘이 빠지는 ‘척수성 근위축증(SMA)’을 앓고 있는 곽희진씨. 전남대 문화사회과학대학 시각정보디자인학과를 졸업한 곽씨는 두 달 전 애견용품 업체 ‘멍멍닷컴’의 웹디자이너가 됐다. [사진 강남세브란스병원]

“1분 말하기도 숨이 차요.”

전남대 시각정보디자인과 곽희진씨 #척수성 근위축증 … 1분 말해도 숨차 #긍정적 성격 덕에 재활치료 이겨내 #친구 도움 받아 5년 만에 우수 졸업

27일 서울 강남세브란스병원에서 만난 곽희진(24·여)씨가 전동 휠체어에 앉아 말했다. 하지만 얼굴에는 웃음꽃이 가득했다. 그는 근육에 힘이 빠지는 ‘척수성 근위축증(SMA, Spinal Muscular Atrophy)’ 환자다. 척수성 근위축증은 뇌에서 보내는 운동 신호를 받는 기능이 손상돼, 근육을 사용하지 못하면서 근위축과 근손실이 진행되는 병이다.

이날 곽씨가 병원을 찾은 것은 희귀 난치성 신경근육 질환 환우들의 입학·졸업을 축하하는 ‘한국의 호킹들, 축하합니다!’ 행사에 참석하기 위해서였다. 몸은 힘든 상태였지만 그에게선 시종일관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곽씨는 희귀질환자가 아닌 디자이너로서 새 삶을 이제 막 시작한 참이다.

그는 전남대 시각정보디자인학과를 졸업하고 애견용품 업체 ‘멍멍닷컴’에 디자이너로 두달 전 입사했다. 웹페이지 디자인을 도맡아 하는 그는 재택근무를 하며 새 일에 적응 중이다. 곽씨는 “회사가 정말 배려를 많이 해준다”며 “지금 하는 일을 잘 해내고 싶다”고 했다.

곽씨의 자신감과 웃음 이면에는 생존을 위한 치열한 싸움이 있었다. 생후 15개월 때 기고 앉고 서는 게 늦어지자 찾아간 보건소에서는 ‘큰 병원에 가 보라’고 했다. 처음엔 뼈의 문제인 줄 알았는데 희귀한 근육병이었다. 여섯 살 때 첫 진단을 내린 의사는 “열 살 전에 다 죽는 병”이라고 말했다. 곽씨의 어머니 오은이(49)씨는 그 때를 회상하며 고개를 떨궜다.

예전만 해도 척수성 근위축증 환자는 근육이 약화돼 호흡에 지장이 생겨 결국 사망에 이르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2000년 국내에서도 호흡재활 치료가 시작됐다. 2008년 생명보험사들이 만든 사회공헌재단의 후원으로 강남세브란스병원에 처음으로 전문센터가 설립되는 등 관련 분야가 발전하면서 호흡부전으로 죽는 일은 많이 줄었다.

곽씨도 오랜 재활치료 기간을 거쳤다. 여수에 있는 집 근처에서 매주 2회씩 물리치료 위주의 재활치료를 받고, 방학 때마다 서울에 올라와 사지 근력 훈련, 손 근육 훈련 등을 진행했다. 성장이 급격히 진행되는 중2 때는 근육이 지탱하지 못해 자꾸 구부러지는 척추를 바로 펴는 수술을 했다. 그 뒤 강남 세브란스병원 호흡재활센터에서 본격적인 치료를 시작했다.

예전보다 많이 좋아졌지만 그래도 자발적으로 기침을 하는 건 힘들다. 기침 유발기로 가래를 주기적으로 빼낸다. 곽씨는 “매일 연습을 안 하면 점점 숨 쉬는 양이 떨어진다”면서 “작고 가느다란 목소리로 말하는데도, 조금만 길게 얘기하면 숨이 찬다”고 말했다.

감기만 걸렸다 하면 폐렴으로 번졌기 때문에 초등학교 절반은 병원에서 살았다. 공부를 제대로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지만 그래도 상위권을 유지했다. 어머니는 ‘공부 하기 보다는 친구 사귀라’고 매일 곽씨를 업어 교실까지 등교시켰다. 어릴 때부터 좋아했던 미술로 대학을 가고 싶었다. 그렇지만 손 힘이 약하고, 손을 쓸 수 있는 범위가 제한돼 있어 실기가 없는 전남대 시각정보디자인학과에 진학했다. 집에서 다닐 수 있다는 점도 큰 장점이었다.

남들은 10분 만에 끝낼 과제를 느린 손으로 천천히, 몇 시간에 걸쳐 완벽하게 해냈다. 졸업전시회 준비 기간에는 남들처럼 밤늦게까지 작업하며 고생하기도 했다. 그 결과 곽씨는 26일, 5년간 다닌 대학교의 졸업식에서 성적우수자로 총장상을 받았다.

디자이너란 꿈을 향해 첫발을 내딛은 곽씨. 그는 또 다른 도전도 준비 중이다. 요즘 박막례 할머니의 유튜브 영상을 즐겨본다는 그는 “저도 여행이라든지, 안 해본 일들에 도전해보고 싶다”고 말했다.

김정연 기자 kim.jeongyeo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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