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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 로펌 '장관급' 5명 지원··· 협상 달인 GM에 맞서려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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협상의 달인, GM이 짠 프레임에서 빨리 벗어나야만 한다. [중앙포토]

협상의 달인, GM이 짠 프레임에서 빨리 벗어나야만 한다. [중앙포토]

“협상할 땐 먼저 자신의 제안을 내놓는 것이 더 유리하다. 첫 번째 제안은 협상의 출발점을 정하고, 문제점을 평가하고, 의제와 시작점을 정한다. 첫 번째 제안에 담긴 숫자는 구체적이어야 한다.”  (마거릿 닐, 토머스 리스 『당신이 원하는 것을 (더) 얻는 협상법』)

[8년 전 산은·GM 협상 복기해보니] #2009년 정부 지원 압박하며 GM 회장 방한 #벼랑 끝 전술로 요구 무력화, 협상판 주도 #"국내에서 'GM에 너무 심하다' 지적까지" #"GM, 대형로펌에서 장관급 5명 지원 받아" #조급함 버리고 국익 차원 냉정한 판단할 때 #

협상의 달인, GM은 협상의 공식을 너무나 잘 안다. 한국에서도 ‘군산공장 폐쇄+총 1조7000억원 어치의 정부 지원(증자, 신규 대출, 세제혜택 포함)이라는 카드를 먼저 던졌다. 국내 정치권과 노조, 심지어 정부조차 군산공장을 닫느냐 마느냐, 산은이 신규자금을 투입하느냐 마느냐, 외투기업세제혜택을 주느냐 마느냐를 두고 옥신각신하고 있다. 어느새 GM이 짜놓은 협상의 틀에 들어와 버렸다.

이항구 산업연구원 연구위원은 “한동안 GM이 내놓은 것을 쫓아가는 모습이었는데, 절대 거기에 끌려가면 안 된다”고 말한다. 그는 “조급해할 필요 없다. GM에 요구할 것은 요구하면서 계속 원칙을 밀어붙이는 ‘초지일관’을 지켜야 한다”고 조언했다. 협상의 판을 뒤집어 우리가 주도권을 찾아야 한다는 뜻이다.

배리 앵글(가운데) GM 총괄 부사장 겸 해외사업부문 사장이 20일 국회를 방문해 여야 원내지도부와 면담에 앞서 인사하고 있다. 임현동 기자

배리 앵글(가운데) GM 총괄 부사장 겸 해외사업부문 사장이 20일 국회를 방문해 여야 원내지도부와 면담에 앞서 인사하고 있다. 임현동 기자

2년 끌었던 2009~10년 산은-GM 협상 

실제 그렇게 했던 경험도 있다. 2009~2010년 산업은행과 GM 사이의 협상이 그랬다. 2년 가까이 끌어온 지루한 밀고 당기기 끝에 GM의 자금 지원 요구를 무력화하는 데 성공했다. 2010년 12월 체결된 산은과 GM의 최종 합의서(GM대우 장기발전 합의서)가 우리 측에 유리했느냐 불리했느냐에 대한 평가는 아직 확실치 않다. 다만 한국 정부와 산은이 끝까지 신규자금 지원을 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참고할 만 하다.

당시에도 GM은 선수를 쳤다. 2009년 2월 GM은 산은과 정부에 총 2조원(1조원 증자+1조원 대출) 자금 지원을 먼저 요청했다. GM 본사마저 휘청이던 시기여서 그 압박 강도는 지금 못지않았다. 협상이 지지부진하자 그해 10월 프리츠 핸더슨 GM 회장이 직접 한국을 찾았다. 당시 이명박 대통령을 직접 만나기까지 했다.

그러나 한국 측은 적어도 겉으로는 조급해하지 않았다. 산은은 되레 GM에 “GM대우(현 한국GM)를 법정관리에 넣어 GM의 경영권을 회수하겠다”고 큰소리쳤다. 산은이 GM대우에 빌려준 대출금을 회수해 파산시키겠다는 일종의 협박이었다. 실제 대출금 일부는 만기가 되자 바로 회수함으로써 실행의지도 보여줬다. 아울러 “GM대우의 5년간 생산물량과 채권단의 경영참여도 보장하라”고 압박했다.

그러자 GM은 강수를 던졌다. 2009년 10월 말 일방적인 GM대우 유상증자를 통해 산은 지분율을 28%에서 17%로 떨어뜨렸다. 25% 이상 주식 보유를 이유로 산은이 갖고 있던 거부권과 사외이사 임명권을 박탈했다. 이에 산은도 맞불을 놨다. 일방적인 GM대우 증자는 무효라며 국제상업회의소(ICC) 산하 국제중재재판소에 GM을 제소했다. 이러한 전략이 먹혀 GM은 다시 협상에 응했다.

한국지엠 직원이 지난 21일 인천 부평구 한국지엠 부평공장에서 근무를 마치고 퇴근하고 있다. [뉴스 1]

한국지엠 직원이 지난 21일 인천 부평구 한국지엠 부평공장에서 근무를 마치고 퇴근하고 있다. [뉴스 1]

"GM은 엄청난 백그라운드 가진 회사"

당시 협상을 총괄했던 전직 산은 임원 A 씨는 본지와의 전화 통화에서 당시 상황을 “벼랑 끝의 협상이었고, 판이 깨지기 일보 직전까지 갔다”고 회상했다. “GM은 만만한 기업이 결코 아니다. 미국의 엄청난 백그라운드를 가진 GM을 상대하기란 쉽지 않았다”고도 털어놨다. 그는 “당시 GM은 사실상 산은을 넘어가는 조직하고 협상했다”며 “협상할 때 (한국) 정부 쪽 사람으로부터 ‘GM을 그렇게 몰아붙이다니, 산은이 너무 심한 게 아니냐’는 얘기가 들어올 정도였다”고 했다. 마침 시기적으로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협상과 맞물려 있다 보니 협상 여건이 녹록하지 않았다.

미국 현지에서 GM과의 협상을 이끌었던 또 다른 전직 산은 임원 B 씨는 산은이 썼던 법정관리 카드에 대해 “협상의 전략, 일종의 레버리지(지렛대)였다”고 회고했다. 실제 법정관리에 넣으려는 의지가 있었다기보다는 전략적으로 선택한 압박 수단이었다는 뜻이다. 아마도 GM은 산은의 법정관리 타령이 지긋지긋했던 듯하다. 최종 합의서에 서명하기 불과 며칠 전, 산은의 남은 대출금을 전액 조기 상환한다고 발표했으니 말이다.

2009년 10월 한국을 찾은 프리츠 핸더슨 당시 GM 회장이 인천 GM대우 부평공장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기자들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중앙포토]

2009년 10월 한국을 찾은 프리츠 핸더슨 당시 GM 회장이 인천 GM대우 부평공장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기자들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중앙포토]

당시 산은이 벼랑 끝 협상으로 관철하려고 했던 것 중 하나는 GM대우가 기술이 하나도 없는 깡통 공장으로 전락하지 않게 하는 것이었다. 혹시 GM이 철수해버리더라도 다른 기업에 GM대우를 매각해서 공장을 계속 가동하려면 자체 기술을 건져야 한다는 절박함이 컸다. 그래서 산은은 협상에서 집요하게 GM대우가 개발에 참여한 차종에 대한 ‘기술 소유권’을 내놓으라고 GM에 요구했다. 그때나 지금이나 한국GM이 기술 개발에 참여했더라도 소유권은 GM글로벌이 가져간다. 한국뿐 아니라 다른 해외 법인도 마찬가지다.

GM은 끝내 기술 소유권만은 양보하지 않았다. 대신 산은은 ‘기술 무상 사용권’을 얻어냈다. 당시 GM대우가 개발해 생산 중이던 소형차(라세티 프리미어, 마티즈 크리에이티브)는 설사 GM이 떠나더라도 7년간 계속 기술을 이용해 생산·판매할 수 있는 권리였다.

물론 7년여가 지난 지금, 라세티와 마티즈는 모두 단종됐으니 그때 체결한 무상사용권은 큰 의미가 없다. 만약 지금 GM이 한국에서 완전 철수한다면 한국GM엔 남는 기술이 있겠느냐는 질문에 정부 고위관계자는 “남을 것이 없을 듯하다. 모든 기술은 글로벌 차원에서 하고 있다”고 말한다.

이 부분은 앞으로 있을 산은과 GM 간 협상에서도 반드시 요구해야 한다는 것이 전직 산은 임원 B 씨의 설명이다. 그는 “한국GM이 기술이 하나도 없는 회사가 돼서는 안 된다”며 “협상에서 첨예하게 대립하겠지만 적어도 현재 생산 차종에 대한 기술 소유권 또는 기술 무상 사용권은 얻어내야 하는 부분”이라고 강조했다. 아울러 “지금까지는 GM이 주장했을 뿐이다. 거기에 끌려가서는 안 된다”고 당부했다.

군산지역 시민들이 24일 오후 이낙연 국무총리 주재로 '군산지역 지원대책 간담회'가 열린 전북 군산시 소룡동 자동차융합기술원 앞에서 한국지엠의 군산공장 폐쇄에 반대하고 있다. [연합뉴스]

군산지역 시민들이 24일 오후 이낙연 국무총리 주재로 '군산지역 지원대책 간담회'가 열린 전북 군산시 소룡동 자동차융합기술원 앞에서 한국지엠의 군산공장 폐쇄에 반대하고 있다. [연합뉴스]

3월 초 GM의 신차배정, 믿을 수 있나

GM이 한국GM을 살릴 유일한 구제책으로 제시하고 있는 신차 배정에 대해서도 너무 믿어서는 안 된다는 지적도 나온다. 익명을 원한 업계 관계자는 “GM은 2015년 인도에서 신차 개발·출시 계획을 밝혔지만 지난해 5월 인도 철수를 발표했다”며 “GM이 이번에 신차를 배정한다 해도 조건부로 할 것이고, 그 계획 역시 추후에 얼마든지 뒤바꿀 수 있다”고 말했다. 자동차 공장이 살아남기 위해 신차 배정이 꼭 필요한 건 맞지만, 3월 초 GM의 발표가 절대적 약속이라고 보는 것은 순진한 생각일 수 있다. 또 “신차 2종을 투입해 연간 생산량 50만대 수준을 유지하겠다”는 베리 앵글 GM 해외사업부문 사장의 약속이 과연 근거가 있고 가능한 얘기인지도 따져볼 문제다.

GM과의 협상에서 승기를 잡으려면 무엇보다 조급해하지 않아야 한다. 물론 어렵다. 당장 생존권이 달린 노조는 다급하고, 지방선거가 코앞인 정치권은 초조하다. 게다가 지금은 산업은행이 지렛대로 쓸 대출금도 없다. 한국GM은 2010년 12월 기존 대출금을 전액 갚은 뒤로는 국내 금융권에 빚진 게 없다. 한국GM의 자금줄은 GM 미국 본사, 한곳이다.

게다가 상대는 협상의 달인, GM이다. 한 정부 관계자는 “대형로펌 김앤장에 장관급 출신 5명이 달라붙어 GM을 지원하고 있다고 한다”며 “국회가 정부를 압박하고, 자기네 패(지원 요구안)가 국회를 통해 공개되도록 한 것 역시 다 GM의 전략”이라고 지적했다. 이 관계자는 “GM이 원하는 속도대로 끌려가서는 안 된다”며 “이미 우리 정부가 공(3대 원칙)을 상대방에 넘겼으니 지금부터 숨 고르기에 들어가서 냉정하게 판단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정 안 되면 협상을 깰 수 있다는 용단도 있어야 한다”고도 덧붙였다.

이항구 산업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우리끼리 분열하거나 조급해하는 것은 절대 도움이 되지 않는다”며 “전열을 정비하고 글로벌 경제와 GM, 국내 경제와 지역 경제라는 다양한 차원에서 이 문제를 들여다보고 경제적인 해법을 찾아야 한다”고 말했다.

 전국금속노동조합 한국GM 지부가 23일 인천 부평공장 민주광장에서 GM의 군산공장 폐쇄 철회를 요구하는 결의대회를 열고 있다. [연합뉴스]

전국금속노동조합 한국GM 지부가 23일 인천 부평공장 민주광장에서 GM의 군산공장 폐쇄 철회를 요구하는 결의대회를 열고 있다. [연합뉴스]

한애란 기자 aeyani@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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