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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이하경 칼럼

능구렁이 김영철은 한 발 더 들어가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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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이하경 기자 중앙일보 대기자
이하경 주필

이하경 주필

어느 날 아침 조지 W 부시 대통령이 조깅을 하다 자동차에 치일 뻔했다. 지나가던 고등학생이 밀어내 사고를 면했다. 고마운 마음에 “나는 미국 대통령인데 소원이 있으면 들어주겠다”고 했다. 학생은 빤히 쳐다보면서 “내가 구해 줬다는 얘기를 제발 우리 아버지에게는 하지 말아 주세요. 맞아 죽습니다”고 통사정했다.

지도자에 할 말 못하는 북과 달리 #한국은 대통령도 여론 거역 못해 #비핵화에 전향적 의지 보여야만 #북·미 대화, 남북 관계 개선 가능해

2007년 5월 판문점에서 열린 남북 장성급 군사회담 북측 대표 김영철이 던진 블랙유머다. 동맹국 대통령에 대한 조롱이어서 정승조 한국 측 수석대표는 순간적으로 기지를 발휘해 응수했다. “최고지도자를 상대로 입도 벙긋하지 못하는 나라도 있다는데 미국은 진짜 민주주의를 하는 나라가 맞나 보네요.”

1989년부터 18년째 북측 대표를 해 온 노련한 김영철이 처음 대면한 왕초보 남한 대표의 기를 꺾으려다 보기 좋게 카운터펀치를 맞은 셈이다. 합참의장을 지내고 전역한 정승조는 김영철 방한 소식이 알려지자 “미군 장성들이 편지를 보내와 자기 나라 대통령을 잘 보호해 줬다며 고마워했다”고 회고했다.

김영철은 68년 미국 푸에블로호 나포 사건 당시부터 군사정전위 연락장교로 판문점을 들락거린 능구렁이다. 노동당 부위원장인 데다 남북 관계를 총괄하는 통일전선부장이어서 문재인 대통령-김정은 노동당 위원장 대화의 메신저 역할을 하는 데 최적임자라는 시각도 있다. 하지만 김영철은 천안함 폭침, 연평도 포격, 목함지뢰 도발의 배후로 지목되고 있다. 정전협정 백지화를 거론하면서 ‘불바다’ 발언을 쏟아낸 인물이다. 대화 상대를 배려한다면 북이 최악의 기피 인물을 굳이 보내야 했을까.

의도와는 무관하게 남남 갈등을 유발하려는 것으로 오해받을 수 있다. 실제로 의도했다면 북은 김영철 방한을 수용한 문 대통령을 상대로 야당에서 “젊은 장병들에 대한 국군통수권자의 배신행위”라는 공격이 나오는 것을 보면서 쾌재를 부를 것이다. 대북제재에 구멍을 내고 한·미 동맹을 흔드는 효과까지 거둘 수 있으니 일석삼조쯤 된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중대한 오판이다.

이하경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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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년 전 정승조가 김영철에게 폐쇄된 독재국가의 한계를 일깨워 줬듯이 최고지도자 한마디에 모든 것이 결정되는 나라는 북한 말고는 없다. 불쾌한 상황이 계속된다면 여론은 이를 수용한 문 대통령에게 등을 돌리게 된다. 어떤 대통령도 견딜 재간이 없다. 민주주의 국가에는 언로가 열려 있고, 공론장이 작동하고, 집단지성이 살아 있다. 한쪽으로 기울었던 배가 평형수가 있어 다시 중심을 잡듯이 잘못된 결정도 시정되는 유연한 복원력이 작동하고 있다는 사실을 북한은 알아야 한다.

문 대통령은 한·미 동맹과 남북 관계의 복잡한 함수 관계 속에서 고심을 거듭해 왔다. 미국의 노골적인 불만에도 불구하고 평창올림픽 기간 중 대북제재 예외를 성사시키고 김영남과 김여정을 예우했다. 올림픽 이후에는 한·미 연합군사훈련 규모를 줄이려는 움직임도 감지된다. 이 과정에서 야당으로부터 몰매를 맞고 보수 지지층의 이탈이라는 불이익도 감수하고 있다. 끔찍한 전쟁을 막고 평화의 전기를 마련하기 위한 필사적인 노력이다.

그런데도 북이 핵을 가졌다고 어떤 배려도 없이 남을 마음대로 끌고 가겠다면 대화 국면은 지속될 수 없다. 다행히 어제 문 대통령과의 평창 접견에서 김영철은 “북·미 대화를 할 충분한 용의가 있다”고 했다. 남북 관계와 북·미 관계가 같이 발전해야 한다는데도 문 대통령과 생각을 같이했다.

이제 남은 것은 비핵화에 대한 전향적 의지를 보여 주는 것이다. 일단 핵과 장거리 탄도미사일 발사 실험 동결을 생각할 수 있다. 최소한 “한·미가 원하는 어떤 것도 협상 테이블에 올려놓을 수 있다” 정도는 김영철이 언급해야 한다. 그래야 남북 정상회담의 전제인 북·미 간 탐색적 대화가 이뤄질 수 있다.

지금 미국의 분위기는 심상치 않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주 사상 최대 규모의 대북 추가 제재 발표 직후 “효과가 없으면 매우 거친 2단계 조치가 있을 것”이라고 했다. 군사옵션을 경고한 것이다. 게다가 중국까지 가세한 제재에 고통을 느끼기 시작하면서 누이동생과 국가수반에 이어 대남 책임자까지 보내야 하는 것이 북한의 절박한 처지다. 그렇다면 북한은 달라진 상황 인식과 태도를 분명하게 보여주지 않으면 안 된다.

이제 평창올림픽 성화는 꺼졌다. 3월의 패럴림픽이 끝나고 4월부터 한·미 연합군사훈련이 재개되면 한반도의 긴장 수위는 예전처럼 높아질 것이다. 기적처럼 만들어진 평화의 기회를 흘려보내선 안 된다. 김정은에게도, 문 대통령에게도 그리 많은 시간이 주어져 있지 않다.

이하경 주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