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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이별을 예감한 애잔한 음악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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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2호 20면

위게트 드레퓌스가 연주한 바흐 ‘프랑스모음곡’ 음반에 ‘BWV 992’가 수록되어 있다.

위게트 드레퓌스가 연주한 바흐 ‘프랑스모음곡’ 음반에 ‘BWV 992’가 수록되어 있다.

나의 어린 시절 환경은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와 거의 같다. 여러 형제의 막내로 태어나고, 아홉 살 때 어머니와 아버지를 연이어 여의고, 큰 형과 형수 아래서 지내다 탈출하듯 도시로 유학을 떠나는 것이 판박이다. 그래서 그런지 허연 가발을 쓰고 날카롭게 쏘아보는 바흐의 초상화를 볼 때마다 나는 그의 어린 시절을 떠올린다.

an die Musik: #바흐 ‘사랑하는 형제와의 작별을 위한 카프리치오’

제바스티안은 여덟 형제의 막내로 태어났지만 얼굴도 보지 못한 형제들이 많다. 17세기의 유아사망률은 50%가 넘었고 전염병이 창궐하면 인구가 반 토막 났다. 첫째 루돌프가 여섯 달 만에 죽었고 넷째 요나스는 바흐가 태어나던 해에, 여섯째 유디타는 바흐가 한 살 때 죽었다.

여섯 살이 되어 철이 들자 셋째 형 발타자르가 열여덟 살로 죽었다. 바흐로서는 최초로 목격한 가족의 죽음이었다. 형제는 이제 자신을 포함해 넷만 남았다. 게다가 나이 차이가 많은 형 크리스토프는 일찍 집을 떠나 얼굴 보기 힘들었고 그 아래는 여덟 살 연상의 누이였다. 바흐는 세 살 터울의 형 야콥과 많은 시간을 보냈는데, 두 형제는 어려운 시기에 든든한 의지가 되었다.

바흐의 작품 중 이 야콥 형을 위해 지은 것으로 추정되는 것이 하나 있다. ‘사랑하는 형제와의 작별을 위한 카프리치오’ BWV 992가 그것이다. 야콥은 1704년 스웨덴 왕 근위대의 오보에 연주자로 취직을 했다. 바흐 집안의 음악가들이 주로 고향 튀링겐 지방에 뿌리를 내린 반면 야콥은 먼 외국으로 진출했다. 당시 스웨덴 왕 칼 12세는 전쟁을 수행하고 있었는데, 폴란드와 멀리 터키까지 원정했다. 바흐는 그런 험지로 떠나는 형을 배웅하는 음악을 지은 것이다. 그 해 열아홉 살이 된 바흐는 고향 근처 아른슈타트에서 오르가니스트로 첫 직장생활을 하고 있었는데, 형을 위해 쓴 이 건반음악은 초기 작품 중에서 가장 뛰어난 곡으로 꼽힌다.

분위기는 감상(感傷)적이다. 연주시간 10여분으로 그리 길지 않은 작품은 모두 여섯 악장인데 악장마다 자세한 제목을 붙였다. ‘떠나지 못하게 말리는 친구들’ ‘여행 중 신상에 생길 수 있는 여러 위험’ ‘친구들의 슬픔’ ‘어쩔 수 없는 석별’ 등이 절절하게 이어진다. 마지막에는 먼 길 떠나는 마차의 들뜬 분위기를 묘사하고 이윽고 울리는 마부의 나팔 소리를 빰빠빠~ 흉내 낸다. 젊은 바흐의 애틋한 마음, 이별의 안타까움이 생생하게 전해져 코끝이 시큰해진다.

3년이 지난 1707년 바흐는 육촌 누이 마리아와 결혼한다. 식장은 아른슈타트에서 가까운 도른하임의 교회였다. 신랑신부와 하객들은 3km쯤 떨어진 식장까지 너른 들판을 행진했다고 한다. 그 아름다운 모임에 형 야콥도 참석했을까? 아마도 불가능했을 것이다. 전선을 누비는 왕을 수행하는 음악가가 먼 조국의 가족 모임에 어찌 가겠는가.

야콥은 1722년 40세로 스톡홀롬에서 죽었다. 1704년의 이별은 두 형제의 영원한 이별이었는지도 모른다. 바흐는 그걸 예감했기에 그렇게 애잔한 음악을 지었을 것이다.

바흐처럼 막내인 나도 네 살 터울의 형이 있다. 지난 설 연휴는 형님 가족과 함께 지냈다. 고교 국사 선생님인 조카는 형님 내외를 모시고 전국의 문화유산 일주에 나섰다. 바흐 시절과 달리 고속도로가 사통팔달이라 형님네는 한나절 만에 충주의 중원탑, 여주 신륵사를 거쳐 남한산성에 도착했다. 병자호란의 현장에서 하룻밤을 같이 보내고 다음날엔 수원 화성, 서산 개심사와 태안 마애불을 같이 둘러보고 헤어졌다. 형님 가족은 익산의 미륵사와 전주를 거쳐 대구로 귀환했다. 날씨는 내내 좋았다. 설날 아침 맑은 햇살 속에서 빙그레 웃던 ‘백제의 미소’는 한 해를 헤쳐 갈 용기를 주었다. 무엇보다 형제가 함께 새해를 맞이해서 행복했다.

글 최정동 기자 choi.jeongdo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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