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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성운의 역사정치] 1976년 7월, 올림픽에서 대만의 국기가 내려지던 날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평창 동계올림픽에 참가한 대만 선수단. 국기인 청천백일기 대신 대만올림픽위원회기를 들고 입장하고 있다. [연합뉴스]

평창 동계올림픽에 참가한 대만 선수단. 국기인 청천백일기 대신 대만올림픽위원회기를 들고 입장하고 있다. [연합뉴스]

유성운의 역사정치⑬

지난 9일 평창동계올림픽 개막식을 두고 중국에서는 논란이 일었습니다.

대만이 입장할 때 일부 방송사가 ‘타이완’이라는 자막을 달자, 중국 누리꾼들이 ‘차이니즈 타이베이(Chinese Taipei)라고 적지 않았다며 반발한 것입니다. 일부는 수도를 타이베이라고 적시한 것도 문제 삼았습니다. 즉, 대만은 국가가 아니라는 이야기죠.

‘하나의 중국(One China)’ 정책을 고수하는 중국이 대만 문제에 민감하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입니다. 중국 측의 압력 때문에 대만이 국제경기에서 자국의 국기인 청천백일기 대신 오륜기를 들고 입장하는 것도 이제는 익숙한 풍경입니다.

지난해 한 TV 예능 프로그램에서 태극기와 대만 국기인 청천백일기를 들고 있다가 논란이 된 트와이스의 쯔위 [사진 MBC 캡쳐]

지난해 한 TV 예능 프로그램에서 태극기와 대만 국기인 청천백일기를 들고 있다가 논란이 된 트와이스의 쯔위 [사진 MBC 캡쳐]

지난해 초에는 한국까지 불똥이 튄 적이 있었습니다. 인기 걸그룹 트와이스의 멤버 쯔위가 한 예능프로그램에서 대만과 한국의 국기를 함께 들고 있다가 논란이 일파만파 퍼진 일입니다. 각종 CF에서 하차 위기까지 처한 쯔위는 사과 동영상까지 띄워야 했습니다.

쯔위가 청천백일기를 든 것에 대해 사과하는 동영상 [유투브 캡쳐]

쯔위가 청천백일기를 든 것에 대해 사과하는 동영상 [유투브 캡쳐]

스포츠 행사는 표면적으로 비정치성을 표방하지만 실제로는 국가 경쟁 구도로 인한 내셔널리즘의 작용 때문에 정치·사회적 속성과 떼기 어렵습니다.
우리 국가대표 선수를 ‘태극전사(太極戰士)’라고 부르거나 일본이 월드클래식베이스볼에 출전한 대표팀을 ‘사무라이 저팬(Samurai Japan)’이라고 명명하는 것이 좋은 예입니다.

특히 국제 스포츠 행사의 대표 격인 근대 올림픽의 역사를 따라가 보면 올림픽 스타디움이 얼마나 정치 외교의 무대로 활용되어 왔는지 확인하는 것이 어렵지 않습니다.

'정치'라는 영양분을 먹고 자란 올림픽

제1회 아테네 올림픽(1896년)의 개최엔 오스만튀르크(지금의 터키)로부터 독립한 지 얼마 안 되는 데다 국왕 게오르기오스 1세마저 덴마크 출신인 그리스의 정치적 배경이 크게 작용했습니다. 국가적 통일성을 갖기 위해 강력한 촉매제가 필요했던 상황에서 올림픽은 좋은 호재가 됐습니다.

미국의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도 올림픽(제3회 세인트루이스) 개최를 ‘대선용’으로 활용했죠. 대회장 곳곳에 하켄크로이츠(Hakenkreuz)가 나부끼며 독일 나치의 선전장이 됐던 제11회 베를린 대회는 최악의 올림픽으로 남아있습니다.

1936년 열린 제11회 베를린 올림픽의 성화봉송 장면. 나치는 독일 국기 대신 나치를 상징하는 하켄크로이츠 문양이 담긴 깃발을 곳곳에 걸었다. [중앙포토]

1936년 열린 제11회 베를린 올림픽의 성화봉송 장면. 나치는 독일 국기 대신 나치를 상징하는 하켄크로이츠 문양이 담긴 깃발을 곳곳에 걸었다. [중앙포토]

심지어 ‘올림픽의 꽃’이라 불리는 마라톤조차도 국제정치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고대 아테네가 페르시아 제국을 상대로 대승을 거둔 ‘마라톤 전투’에서 유래됐기에 페르시아의 후예를 자처하는 이란에서는 마라톤이 금지되어 있습니다. 이란에게 마라톤은 수치스러운 역사의 흔적일 뿐이거든요. 이런 이유로 이란의 수도 테헤란에서 열린 제7회 아시안게임에서는 사상 처음으로 마라톤이 사라지기도 했습니다. 반대로 제1회 아테네 대회에서는 같은 이유로 열광적인 환호 속에 마라톤이 열렸습니다.

그리스 마라톤전투의 아테네 전사자 192인의 묘. [중앙포토]

그리스 마라톤전투의 아테네 전사자 192인의 묘. [중앙포토]

때로는 올림픽을 통해국제정치의 갈등을 무마하려는 시도도 있었습니다.
강대국들의 갈등이 고조되던 1912년엔 전쟁의 기운을 억제하기 위해 1916년 제6회 대회 개최지를 독일 베를린으로 선정했습니다. 하지만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는 것을 막지는 못했습니다. 대신 영국과 프랑스는 교전국이었던 독일과 오스트리아를 1920년 열린 제7회 앤트워프 대회에 참가하지 못하게 막는 방법으로 ‘응징’했죠. 이런 분위기는 훗날 제2차 세계대전의 촉매제로 작용하기도 했습니다.

제7회 벨기에 앤트워프 올림픽에서 미국의 찰스 패독 100m육상선수가 손을 번쩍 들고 골인하고 있다. 독일과 오스트리아 등 제1차 세계대전의 패전국은 참가가 거부됐다.

제7회 벨기에 앤트워프 올림픽에서 미국의 찰스 패독 100m육상선수가 손을 번쩍 들고 골인하고 있다. 독일과 오스트리아 등 제1차 세계대전의 패전국은 참가가 거부됐다.

물론 성공 사례도 있습니다. ‘핑퐁 외교’로 알려진 미국과 중국의 수교입니다.

1971년 4월 일본 나고야에서 열린 세계탁구선수권대회에서 자국 버스를 놓친 미국의 글렌 코완 선수가 우연히 중국팀 버스를 얻어 타면서 실타래가 풀렸던 ‘핑퐁 외교’는 스포츠 외교의 가장 성공적인 사례로 남아있습니다.

1972년 중국 베이징에서 열린 중국과 미국 선수단의 탁구경기. '핑퐁외교'의 시발점이 됐다. [중앙포토]

1972년 중국 베이징에서 열린 중국과 미국 선수단의 탁구경기. '핑퐁외교'의 시발점이 됐다. [중앙포토]

6·25 전쟁이래 적대적이었던 양국은 이듬해인 1972년 리처드 닉슨 대통령이 중국을 방문하면서 ‘데탕트’ 시대를 열었습니다. 그러자 당시 중국의 지도자 마오쩌둥은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작은 공(탁구공)이 큰 공(지구)을 움직였다”

하지만 평화와 화해의 시대를 여는 전환점이 된 ‘핑퐁 외교’가 악몽으로 돌아온 국가도 있습니다. 바로 대만입니다.

[유성운의 역사정치]

대만에겐 악몽이 된 핑퐁외교 

제21회 몬트리올 올림픽 개막식을 사흘 앞둔 상황에서 청천벽력같은 소식이 전해집니다.

자유중국, 즉 대만이 국호·국기·국가 사용을 금지한 주최국 캐나다의 조치에 반발해 보이콧을 선언한 것입니다.

대만의 올림픽 불참 소식을 알린 1976년 7월15일자 중앙일보 1면 기사

대만의 올림픽 불참 소식을 알린 1976년 7월15일자 중앙일보 1면 기사

“자유중국은 14일 그들의 국호·국기 및 국가의 사용을 금지한 캐나다 정부의 조치는 자유중국의 국가 위신을 손상하는 것이라는 이유로 오는 17일부터 몬트리올에서 열리는 제21회 올림픽 경기대회에 불참하기로 정식 결정했다.” (1976년 7월 16일 중앙일보 1면)

캐나다는 이보다 앞서 당시까지 중화인민공화국(PRC·People’s Republic of China)으로 불리던 대륙 쪽 국가를 중국의 유일한 합법 정부로 인정하겠다고 밝힌 상태였습니다. (참고로 당시 대만의 국호 및 국기 사용 금지를 결행한 것은 피에르 트뤼도 총리입니다. 현재 캐나다 총리인 쥐스탱 트뤼도 총리의 아버지입니다.)

캐나다는 불과 올림픽 2달을 앞둔 1976년 5월, 대만 측에 그간 써왔던 국호인 중화민국 (The republic of China)를 쓸 수 없다고 통보했고, 대만은 이를 무시하고 선수단을 파견한 뒤 결정을 뒤집으라고 요구했습니다.

미국의 제37대 대통령 리처드 닉슨. 1972년 중국을 방문해 데탕트 시대를 열었다는 평가를 받는다.[중앙포토]

미국의 제37대 대통령 리처드 닉슨. 1972년 중국을 방문해 데탕트 시대를 열었다는 평가를 받는다.[중앙포토]

사실 대만은 믿는 구석이 있었습니다. 우방국인 미국이었습니다. 미국은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습니다. 대만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올림픽에서 철수할 수도 있다고 엄포를 놓았습니다.
하지만 1972년 역사적인 데탕트 무드를 만들어낸 지 겨우 4년이 지난 상황이었습니다. 중국과 간극을 좁혀나가려던 미국의 역할도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고 캐나다나 다른 서방 국가도 이를 모르지 않았습니다.

캐나다가 올림픽에 참가한 대만에 국호는 바꾸되 국기와 국가만 허가한다는 내용의 1976년 7월 17일자 1면 기사. 왼쪽 하단에는 대만과 함께 하기로 했던 미국이 선수단을 철수하지 않기로 했다는 기사도 보인다.

캐나다가 올림픽에 참가한 대만에 국호는 바꾸되 국기와 국가만 허가한다는 내용의 1976년 7월 17일자 1면 기사. 왼쪽 하단에는 대만과 함께 하기로 했던 미국이 선수단을 철수하지 않기로 했다는 기사도 보인다.

상황은 갈수록 대만에 불리해졌습니다. 트뤼도 총리가 국기는 사용하되 국호는 ‘타이완’으로 한다는 협상안을 내놓자 대만은 수용을 거부했지만 미국은 “어쩔 수 없다”며 올림픽 참가로 선회했습니다. 대만으로서는 전세계에 '고립무원'의 상황을 선포한 악수가 됐습니다.
결국 대만 정부는 올림픽에서 철수했고, 몬트리올 올림픽 스타디움에서 대만의 국기는 조용히 사라졌습니다.

“중화민국 국호사용금지에 항의, 몬트리올 올림픽을 ‘보이콧’한 자유중국 올림픽선수단 58명은 19일 ‘영웅’의 대접을 받으면서 귀국했다.” (1976년 7월 20일자 중앙일보 6면)

1976년 7월 17일 몬트리올 올림픽에서 철수한 채 대만으로 돌아가는 비행기를 기다리는 대만 선수단. 기록에 따르면 당시 공항 직원이 "Welcome, Republic of China"라며 안내하자 이들은 울음을 터뜨렸다고 한다. 이후 이들은 자신들의 국호를 내걸고 국제경기에서 다시는 뛰지 못했다.

1976년 7월 17일 몬트리올 올림픽에서 철수한 채 대만으로 돌아가는 비행기를 기다리는 대만 선수단. 기록에 따르면 당시 공항 직원이 "Welcome, Republic of China"라며 안내하자 이들은 울음을 터뜨렸다고 한다. 이후 이들은 자신들의 국호를 내걸고 국제경기에서 다시는 뛰지 못했다.

자존심을 지킨 덕분에 국내에선 영웅의 대접을 받았지만 대가는 만만치 않았습니다.
이후 대만이 하계 올림픽에 복귀한 것은 서방 국가들이 단체로 불참한 1980년 모스크바 대회를 건너뛴 1984년 로스앤젤레스 올림픽입니다. 이때는 ‘타이완’이라는 명칭과 국기마저 박탈당했습니다.
대만은 '타이완' 대신 ‘차이니즈 타이완(Chinese Taiwan)’이라는 명칭에다 청천백일기 대신 대만올림픽위원회기를 사용하게 됐습니다.
국제사회에서 자신과 함께 싸워줄 우군이 없는 대만으로서는 8년 전 보다 훨씬 열악한 조건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미국은 몬트리올 올림픽이 끝난 뒤인 1979년 중국과 공식 수교를 맺었습니다.

평창 동계올림픽에 날아올 청구서 

문재인 정부는 평창 동계올림픽을 남북 화해의 무대로 연출하기 위해 많은 공을 들이고 있습니다.
여자아이스하키 단일팀 구성에 이어 예술 공연단을 초청했고, 김정은 북한 노동당 위원장의 동생인 김여정과 만찬을 갖기도 했습니다. 여기에 23일 천안함 폭침의 주모자로 알려진 김영철 노동당 부위원장까지 방한하면서 논란도 적지 않습니다.

20일 강원도 강릉시 관동하키센터에서 열린 2018 평창동계올림픽 여자 아이스하키 7~8위 순위 결정전 남북 단일팀 대 스웨덴 경기. 남측 신소정(오른쪽), 북측 김향미(왼쪽), 북측 황충금(가운데)이 서로를 격려하고 있다.[연합뉴스]

20일 강원도 강릉시 관동하키센터에서 열린 2018 평창동계올림픽 여자 아이스하키 7~8위 순위 결정전 남북 단일팀 대 스웨덴 경기. 남측 신소정(오른쪽), 북측 김향미(왼쪽), 북측 황충금(가운데)이 서로를 격려하고 있다.[연합뉴스]

 10일 강원도 강릉시 관동하키센터에서 열리는 평창동계올림픽 여자 아이스하키 조별리그 B조 남북단일팀-스위스 경기에서 북한 응원단이 가면을 이용한 응원을 펼치고 있다. [연합뉴스]

10일 강원도 강릉시 관동하키센터에서 열리는 평창동계올림픽 여자 아이스하키 조별리그 B조 남북단일팀-스위스 경기에서 북한 응원단이 가면을 이용한 응원을 펼치고 있다. [연합뉴스]

일부 정치인들은 ‘핑퐁 외교’를 언급하며 극적인 남북 화해의 달콤한 결실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대만 사례에서 나타나듯 ‘핑퐁 외교’가 주는 또 하나의 교훈은 세계 각국의 움직임과 주변국과의 관계 입니다.

대만이 그랬듯이 우리도 주변국의 이해와 도움없이 국제사회를 뜻대로 움직일 수 있는 힘은 없습니다. 또한 세계가 어떤 흐름으로 돌아가고 있는지 제대로 파악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때문에 힘있는 우군의 확보가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최근에는 전통적인 우군이었던 미국과의 관계를 놓고 우려가 나오고 있습니다.
정부는 대북 정책에 대해 “트럼프 대통령으로부터 100% 지지를 받고 있다”고 자신하지만 일부 외교 채널에서는 삐걱거린다는 신호음도 적지 않습니다.
평창 동계올림픽에 참석한 마이크 펜스 미국 부대통령이 천안함 기념관을 방문하거나 북한과의 회담이 불발되자 이를 숨기지 않은 것에 대해서도 가볍게 넘겨서는 안 된다는 목소리도 나옵니다. 때맞춰 터진 미국의 각종 통상압박도 마찬가지입니다.

평창동계올림픽 개회식 참석차 미국 대표단을 이끌고 방한한 마이크 펜스 미국 부통령이 방한 이틀째인 9일 평택 2함대 사령부를 방문해 천안함을 둘러보고 있다.[연합뉴스]

평창동계올림픽 개회식 참석차 미국 대표단을 이끌고 방한한 마이크 펜스 미국 부통령이 방한 이틀째인 9일 평택 2함대 사령부를 방문해 천안함을 둘러보고 있다.[연합뉴스]

하지만 문재인 정부의 시도가 예외적인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과거 올림픽 사례를 살펴보면 정치적으로 활용되지 않은 경우를 찾는 것이 더 어려울 정도니까요.

지난 2번의 세계대전을 막지 못했던 올림픽이 이번만큼은 세계에서 가장 지독한 독재자가 다스리는 나라의 꽁꽁 얼어붙은 문을 녹일 수만 있다면, 훗날 역사에서는 1988년 서울올림픽 못지않은 성공적인 개최로 기록되지 않을까요.

천안함 폭침을 주도한것으로 알려진 북한 김영철 노동당 중앙위원회 부위원장 겸 통일전선부장이 방한한 23일 오후 천안함 46용사가 안장된 국립대전현충원을 찾은 참배객들이 고인들의 묘역을 둘러보고 있다. 천안함 유족들은 김영철 부위원장의 올림픽 폐막식 참석을 위해 방한하는 것을 공개 반대하고 있다. 김성태 기자

천안함 폭침을 주도한것으로 알려진 북한 김영철 노동당 중앙위원회 부위원장 겸 통일전선부장이 방한한 23일 오후 천안함 46용사가 안장된 국립대전현충원을 찾은 참배객들이 고인들의 묘역을 둘러보고 있다. 천안함 유족들은 김영철 부위원장의 올림픽 폐막식 참석을 위해 방한하는 것을 공개 반대하고 있다. 김성태 기자

이제 올림픽을 마치면 문재인 정부에게는 청구서가 날아올 것입니다. 청구서의 적힌 금액을 보며 과연 우리는 웃게 될까요, 탄식하게 될까요.

유성운 기자 pirate@joongang.co.kr

※이 기사는 양순창 『중국의 스포츠 외교- 대만의 명칭문제를 중심으로』, 이동률 『1972년 중국의 대미 데탕트 배경과 전략』, 송병록 『전쟁, 스포츠 그리고 (국제)정치의 상관성에 관한 연구』, 이한혁 『올림픽의 정치화에 관한 연구』를 참고해 작성했습니다.

[유성운의 역사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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