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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속으로] 추사 김정희는 뛰어난 과학자였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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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0면

조선시대 과학의 순교자

조선시대 과학의 순교자

조선시대 과학의 순교자
이종호 지음, 사과나무

대표작 ‘세한도’의 바탕은 정밀수학 #천문·지리 모르면 금석학도 불가능 #풍속학자 최부, 어류연구 정약전 등 #시대를 앞서간 선각자 13명 불러내 #‘과학의 날’ 처음 선포한 김용관 조명 #당대 수난받은 과학의 그늘도 짚어

시대를 막론하고 과학은 변화를 이끌었다. 인공지능이 우리 시대를 혁명적으로 바꾸고 있는 것처럼, 돌도끼·모닥불도 그때에는 경천동지할 사건이었다. 돌도끼·모닥불을 발견한 사람들은 과연 대우 받았을까. 주목할 것은, 과학이 기득권층의 입지를 흔들고 종국에는 선각자들의 생사를 좌우하기도 했다는 사실이다.

멀리 갈 필요도 없이 조선시대 수많은 과학자들이 정치적 희생양이 됐다. 과학저술가 이종호의 『조선시대 과학의 순교자』는 당쟁에 휘말리고, 서학을 공부한다는 이유로 탄압 받고, 서얼이라 불이익을 받는 등 여러 악조건에서도 과학에 헌신한 13명의 인물을 조명한다. 그들의 과학적 통찰과 고난에 더해 시대 상황을 세심하게 포착함으로써 13명의 인물이 ‘과학의 순교자’가 된 이유를 설명한다.

맨 먼저 거론한 인물은 『표해록』의 저자 최부(崔溥)다. 제주에 추쇄경차관으로 파견되었다가 부친상을 당해 고향 나주로 돌아가던 그는 기상악화로 표류, 14일 만에 중국 저장성(浙江省) 한 섬에 다다랐다. 중국을 종단하여 황제를 알현하고 장장 6개월 만에 조선으로 돌아온 최부는, 성종의 명에 따라 단 8일 동안 5만 자 분량의 일기체 서술로로 『표해록』을 완성한다.

『표해록』은 중국에서 보고 듣고 느낀 기행문에 가깝지만 과학적 사고를 바탕으로 중국의 실상을 재현한다. 중국 양자강 이북과 이남의 풍속에 대한 놀라운 비교와 분석으로 당시 상황을 정확히 파악했기에 중국 3대 여행서로 꼽힌다. 하지만 ‘시원적 비교풍속학자’인 최부는 상중(喪中)에 책을 쓴 것이 문제가 되어 연산군 때 갑자사화의 칼끝을 피하지 못하고 참형을 당했다. 저자는 남극·북극을 탐험한 논문을 제출한 사람들을 과학자로 인식하듯, 중국 역사와 문화는 물론 자연과 지리를 예리한 관찰력으로 짚어낸 최부 역시 과학의 순교자로 평가되는 게 마땅하다고 강조한다.

서유구는 『임원경제지』를 완성하고도 끝내 간행하지 못하고 생을 마쳤다. 조선·중국 서적 900여 종을 참고했고 이해를 돕는 삽화를 넣었다. [사진 사과나무]

서유구는 『임원경제지』를 완성하고도 끝내 간행하지 못하고 생을 마쳤다. 조선·중국 서적 900여 종을 참고했고 이해를 돕는 삽화를 넣었다. [사진 사과나무]

최부가 ‘과학적 사고’에 충실한 사람이라면 유배지 흑산도에서 『자산어보』를 완성한 정약전은 명백한 과학자다. 정약전은 서학·천주교를 신봉했다는 이유로 흑산도로 유배를 갔고, 거기서 “당대의 실학사상이 거둔 가장 중요한 성과”인 『자산어보』를 써냈다. 정약전은 『자산어보』 서문에 스스로를 ‘박물자(博物者)’라고 적었다. 당대에는 ‘과학’이라는 말조차 없었지만 현대적 의미의 과학 개념을 알고 있었던 셈이다.

정약전은 물고기 관찰에 그치지 않고, 오징어 먹물은 글씨를 쓰는 데, 기름상어의 간에서 짜낸 기름은 등잔 기름으로 썼다. 굴을 먹고 남은 껍질은 갈아서 바둑알을 만들었다. 이론으로서의 과학만 연구하지 않고 삶으로 살아내는 과학을 추구했기에 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정약전은 16년이 지나도록 흑산도를 벗어나지 못 하고 생을 마감했다.

추사체로 유명한 김정희도 사실에 의거해 진리를 찾고자 했던 과학자였다. 실제로 추사는 금속이나 돌에 새긴 글씨나 그림을 해석하는 금석학의 태두로, 당시까지 ‘무학대사비’로 알려진 북한산 ‘진흥왕순수비’의 실체를 밝혀냈다. 금석학 연구에는 역사지식 외에도 천문과 지리 등 다양한 과학지식이 필요하다. 김정희의 과학적 사고는 ‘세한도’에서도 발견된다. ‘세한도’를 연구하는 현대 학자들은 “철저한 수학적 구도에 관한 지식 없이는 나올 수 없는 그림”이라고 입을 모은다. “그림과 글씨, 화폭 등 여러 요소들의 수적 관계에 바탕해 주도면밀한 구상으로 계획된 그림”이 바로 ‘세한도’라는 것이다.

조선의 과학자 하면 정약용이 빠질 수 없다. 수원 화성의 설계와 시공을 도맡은 그는 조선 최고의 과학자이자 공학자였다. 정약용은 실학자답게 서양 기술 도입을 적극 주장하면서도 “서양 기술을 배워오기 위해 제도적인 뒷받침이 이뤄져야 한다”고 생각한 선각자였다. 그는 서양 기술 도입을 위한 전문 국가기관의 필요성을 역설하면서 ‘이용감’(利用監)이라는 이름을 지어놓기도 했다. 그런 정약용도 유배를 피하지 못했는데, 오히려 유배기간 방대한 저술을 남김으로써 실학과 과학 발전의 뒷배가 되었다.

이 밖에 허준·박제가·서유구·김정호·최한기·지석영 등을 조선시대 과학의 순교자로 소개한 저자가 마지막으로 선택한 김용관은 널리 알려진 인물은 아니다. 김용관은 1897년 유기도매상의 아들로 태어나 1967년 세상을 떠나기까지 ‘과학은 진보주의’라는 신념 아래 과학기술운동을 펼치는데 진력했다. 1924년 발명학회 설립에 앞장섰고, 과학이라는 말조차 생소하던 1933년에 최초의 과학잡지 ‘과학조선’을 창간했다. 김용관은 동인들과 함께 다윈 사망 50년이 되는 1934년 4월 19일을 ‘과학의 날’로 선포했다. 과학의 날이 선포되고 서울과 평양에서 각종 과학강연회와 좌담회를 잇달아 개최하고 라디오에도 출연해 과학지식 보급에 앞장섰다. 덧붙이자면 현재 과학의 날은 1967년 4월 21일 과학기술처 발족을 기념해 1968년 제정된 것이다.

『조선시대 과학의 순교자』에 이름을 올린 13명 중 몇몇은 진정한 과학자냐고 ‘딴지’를 걸 수도 있다. 하지만 저자의 주장처럼 그들의 ‘과학적 사고’가 없었다면 더디기만 했던 조선 사회의 변화는 한층 더 지난했을 것이다. 불과 100년 전만 해도 과학은 배척 받는 학문이었다. 유배와 탄압, 불이익을 감수하면서도 그 길을 간 순교자들이 오늘날의 눈부신 과학 발전을 본다면 어떤 마음일까. 저자는 “만일 그들의 삶에서 유배가 없었다면 우리나라가 좀 더 근대화를 빨리 이루고, 과학기술이 좀 더 발전하지 않았을까” 아쉬움을 토로한다.

장동석 출판평론가(‘뉴필로소퍼’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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