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투’에 무너지는 그들만의 왕국

중앙일보

입력 2018.02.22 01:20

업데이트 2018.02.22 19:10

지면보기

종합 01면

성폭력 피해를 알리는 미투(#MeToo·나도 당했다) 운동으로 문화계가 휘청이고 있다. 고은 시인과 연극연출가 이윤택·오태석씨, 배우 조민기씨, 하용부 인간문화재 등 문화권력을 누려온 명사들에 대한 폭로가 잇따르고 있다. 이씨의 성추행을 공개한 배우 이승비씨는 “그는 왕 같은, 교주 같은 존재였다”고 했다. ‘그들만의 왕국’에서 종교집단 교주처럼 군림해온 이들의 행각이 큰 충격을 주고 있다. 문화계 ‘미투’는 고은 시인의 성추행 고발로 시작됐지만 불을 붙인 건 연출가 이씨다. 지난 14일 김수희 극단 미인 대표가 페이스북에 이씨의 빗나간 욕망을 폭로한 이후 그간 숨겨졌던 사실이 쏟아지고 있다. 우리 문화계에서 전에 볼 수 없었던 현상이다.

‘문화계 권력’의 민낯 폭로 계속
가해자 반쪽 사과, 분노 부채질
“블랙리스트 때보다 더 충격적”
경찰, 이윤택·조민기 수사 착수
정부 “예술계 성추행 실태 조사”

특히 이씨의 19일 기자회견이 공분을 샀다. “성관계는 했지만 성폭행은 안 했다”는 ‘반쪽 사과’가 피해자들을 격분하게 했다. 연희단거리패 배우 출신 김지현씨는 이씨에게 성폭행을 당하고, 임신·낙태한 이후 또 성폭행을 당했다는 내용을 공개했다. 21일에는 연희단거리패 배우 오동식씨가 이씨의 기자회견 리허설 사실까지 폭로했다.

중견 연출가 심재찬씨는 “이들의 추행은 공공연한 비밀이었다. 하지만 이 정도 수위인지는 몰랐다”며 “블랙리스트가 알려졌을 때보다 더 충격적”이라고 말했다. 연극평론가 김미도씨도 “뿌리 깊은 위계 폭력의 적폐가 터져나온 것”이라고 했다.

관련기사

공연계 성추행 논란은 대학까지 확산됐다. 청주대는 20일 공연영상학부 조교수인 조민기씨를 면직처분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조씨는 성추행 사실을 강력히 부인했지만 이날 밤 졸업생 송하늘씨가 “도저히 견딜 수 없다”며 페이스북에 피해 사실을 공개하면서 분위기가 달라졌다. 21일 조씨는 이달 말부터 출연 예정이었던 드라마 ‘작은 신의 아이들’에서 하차하기로 했다.

경찰 수사도 시작됐다. 경남지방경찰청은 이윤택·하용부씨와 극단 번작이 대표 조증윤씨 사건과 관련한 피해 사례를 분석 중이다. 충북경찰청도 조민기씨의 성추행 의혹 조사에 나섰다. 현재까지 이씨를 둘러싼 성폭력 폭로는 총 11건에 달한다. 해당 사건이 모두 친고죄 폐지 이전인 2001∼2010년에 발생해 법적 처벌 가능성은 불투명하다. 하지만 ‘이씨에 의한 임신중절’ 피해가 사실로 확인될 경우 친고죄 규정이 적용되지 않아 형사처벌이 가능하다. 노영희 변호사는 “2013년 6월 이후 벌어진 추가 성적 피해 폭로가 나올 경우 형사처벌 가능성은 열려 있다”고 말했다.

정부도 대응책 마련에 나서고 있다. 이경숙 국가인권위원회 상임위원은 21일 국회 운영위 업무보고에서 문화예술계 성추행 실태 조사 계획을 밝혔다. 문화체육관광부는 다음달부터 신고·상담센터를 운영하고, 성폭력 예술인에 대한 작품 지원을 배제할 방침이다.

이지영·박사라 기자 jylee@joongang.co.kr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

Innovation Lab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