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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시선 2035

당신이 버텨낸 시간의 의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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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이현 기자 중앙일보 기자
이 현 경제부 기자

이 현 경제부 기자

유치원생인 큰 조카는 겨울왕국 ‘덕후’다. 개봉한 지 4년이 넘었으니 질릴 법도 한데 여전히 롤모델은 엘사다. 남동생과 역할 놀이를 할 때면 동생에게 안나 역할을 준다. 사사건건 싸움을 벌이는 남매인데 남동생도 이럴 땐 순순히 받아들인다. 겨울왕국은 디즈니의 공주 이야기 중에 드물게 ‘사랑 타령’이 뒷전이다. 영화를 이끌어가는 건 엘사와 안나 자매의 우애다. 조카 남매의 눈에도 주인공이 여성인지 남성인지보다 둘이 형제라는 게 더 중요해 보였던 모양이다.

겨울왕국을 연출한 제니퍼 리는 디즈니 애니메이션 스튜디오 최초의 여성 영화감독이다. 디즈니가 준비 중인 영화 4편이 여성 감독 작품이다. 다음 달 개봉하는 ‘시간의 주름’과 실사판 ‘뮬란’, ‘겨울왕국 2’, ‘캡틴 마블’ 등이다. 겨우 4개뿐이지만 할리우드 메이저 영화 제작사 중에서 제일 많다.

할리우드 애니메이션 영화가 여성 감독을 받아들인 건 불과 7년 전의 일이다. 드림웍스의 ‘쿵푸팬더2’를 만든 한국계 미국인 제니퍼 여 넬슨 감독이 최초다. 2012년 개봉한 애니메이션 ‘메리다와 마법의 숲’을 공동 연출한 브랜다 챕먼은 픽사 최초의 여성감독으로 기록됐다. 부스스한 곱슬머리를 풀어헤치고 활을 쏘는 주인공 메리다 공주는 공주 수업과 결혼을 강요하는 엄마(왕비)한테 화가 난 나머지 마녀를 찾아가 엄마를 곰으로 만들어버리는 ‘대형 사고’를 친다.

지난해 샌디에이고 주립대학의 TV·영화 속 여성에 대한 연구 센터 조사에 따르면 2016년 할리우드 흥행 250위권 영화 중 여성감독이 연출한 작품은 고작 7%였다. 할리우드에서는 이를 ‘셀룰로이드 천장’이라 부른다. 그나마 이렇게 가물에 콩 나듯 이라도 여성 감독이 메가폰을 잡으니 조카에게 보여줄 만한 공주 영화가 나온다.

결국은 머릿수가 답이 아닐까 한다. 별 더러운 일을 다 겪으며 버텨본 이가 많았기에 공감의 “미투(#MeToo)”가 들불처럼 번질 수 있었다. 여성단체, 여성학자들의 절절한 외침만으로는 어려웠을 변화다. 통계청에 따르면 2015년 법조인 중 여성 비율은 2000년의 8배다. 이렇게 말하면 대단해 보이지만 24.1%에 불과하다. 한 줌 늘었는데 파문이 이 정도다. 외무고시 합격자, 금융감독원 입사자, 신입 기자도 요즘 절반 이상이 여성이다. 냉혹하지만 조직은 마땅히 지켜야 할 가치보다 힘과 이해관계에 더 쉽게 반응하는 법이다.

그래서 1년 더, 한 직급 더 버텨내려 안간힘을 쓴 모든 ‘언니들’에 감사한다. 그리고 그 ‘존버정신(존X 버티는 정신)’을 진심으로 응원한다.

이 현 경제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