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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인 경제, 승자 독식의 구조 인터넷 경제 대체할 것”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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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3면

지난달 20일 서울 강남구 삼성동에서 싱가포르 블록체인 ‘카이버 네트워크’ 창업팀과 국내 개발자들이 만났다. 세미나에 이어 블록체인 기술을 활용한 스타트업들의 경진대회도 열렸다. [박수련 기자]

지난달 20일 서울 강남구 삼성동에서 싱가포르 블록체인 ‘카이버 네트워크’ 창업팀과 국내 개발자들이 만났다. 세미나에 이어 블록체인 기술을 활용한 스타트업들의 경진대회도 열렸다. [박수련 기자]

지난달 20일 서울 강남구 삼성동의 한 컨벤션홀. 소프트웨어 개발자·디자이너·기획자 등 100여 명이 모인 이곳에선 세미나가 한창이었다. 싱가포르의 유명 블록체인 재단 ‘카이버 네트워크’와 국내외 5개 블록체인 기업들이 무대에 올라 각자 개발 중인 프로젝트를 소개했다. 주로 20~30대인 이들은 파티 같은 분위기에서 자유롭게 묻고 토론했다. 카이버 네트워크의 로이 루 대표는 “한국에 올 때마다 블록체인 분야에 뛰어드는 개발자들이 빠르게 늘고 있는 걸 느낀다”고 말했다.

2030, 왜 블록체인·ICO에 열광하나 #구글·페북 등 인터넷 공룡 됐지만 #플랫폼 참여자에게는 보상 없어 #코인으로 기업·참여자 윈윈 가능 #“코인 가치 널뛰면 ICO 지속 불가”

행사에 참가한 보안기술 기업 ‘웁살라’의 패트릭 김 대표는 “집단 지성을 통해 보안 정보를 공유하고 그들에게 보상(코인·토큰)을 주는 블록체인 생태계가 현재보다 디지털 보안 위협을 막아내는 데 더 효과적”이라고 말했다. 영국계 보안기술 기업에서 일하던 그는 한국인 동료와 지난해 싱가포르에서 창업했다.

국내 2030 테크 엘리트들이 블록체인을 중심으로 뭉치고 있다. 이달 초 연세대학교 공과대생들은 ‘연세대 블록체인 연구회(연블)’을 만들었다. 이현제(24·전기전자공학부 2학년)씨는 “미국·중국에선 대학생들의 연구가 활발하다던데 우리는 이제부터 시작”이라며 “서울을 찾는 글로벌 유명 블록체인재단 창업자들과 만나 블록체인의 미래에 대해 토론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2030 블록체인 지지층은 공통적으로 블록체인 기반의 ‘코인 경제’가 현 인터넷 경제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대안이라고 주장한다. 현재의 인터넷은 초기의 개방성은 사라지고 구글·페이스북·아마존 같은 거물 기업이 정보와 기술을 독식하는 폐쇄적인 시장이 됐다는 비판이다. 블록체인 기업인 체인파트너스의 표철민 대표는 “구글이나 네이버가 너무 커져 각 나라의 시장을 독과점해버렸다”며 “현재의 인터넷은 더는 대안이 될 수 없다”고 비판했다. 표 대표는 은행·포털 같은 거간꾼(중개 업체)들이 많은 수수료를 챙기는 현재의 인터넷 경제에 회의적이다.

웁살라 박해민 공동창업자도 “똑똑하던 사람도 구글에 들어가면 바보가 된다는 말이 있다”며 “조직에 기대지 않아도, 개인이 능력만 발휘하면 (공동체가 인정해주는) 코인이나 토큰으로 보상받는 블록체인 시스템이 (기존 인터넷보다) 더 오래 갈 것”이라고 말했다.

특히 이들은 “블록체인이 주주 자본주의를 이어갈 다음 모델”이라고 보고 있다. 지난해 블록체인 투자펀드 해시드를 창업한 김서준(34) 대표는 “현재의 주식회사 모델은 기업이 아무리 성공해도 초창기부터 제품·서비스를 쓰면서 입소문을 내주던 소비자들에게 어떤 보상도 공유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우버의 기업 가치가 수십조원이 돼도 우버 택시기사의 삶은 여전하고, K팝 스타가 아무리 잘나가도 소속사만 이익을 챙길 뿐”이라며 “무명 때부터 열심히 응원한 팬들에겐 음원 파일 하나 돌아가지 않는다”고 말했다. 김 대표는 “상품(우버·K팝 스타)을 믿고 거래에 참여한 이들이 주주가 될 수 있고, 보상받을 가능성을 열여주는 게 공정한 모델 ”이라고 주장했다.

[그래픽=김경진 기자 capkim@joongang.co.kr]

[그래픽=김경진 기자 capkim@joongang.co.kr]

최배근 건국대 경제학과 교수는 “데이터를 독점하는 거대 IT기업의 선의나 정부가 공정한 중개자일 것이라는 믿음에 대한 의문을 가지는 젊은 세대들이 블록체인에 공감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해시드는 현재까지 전 세계 30개 프로젝트에 투자하는 글로벌 크립토펀드(암호화폐에, 또는 암호화폐로 투자하는 펀드)가 됐다.

이런 블록체인 기업들은 ICO를 통해 프로젝트 운영 자금을 마련한다. 보통 스타트업이 벤처캐피탈(VC)에 지분을 떼어주고 오랜 기간 협상을 거쳐야 투자금을 받을 수 있지만, ICO를 하면 프로젝트에 동의하는 전 세계의 개인들에게서 자금을 조달할 수 있다.

지금까지 수천억, 수백억 단위의 자금이 ICO를 통해 모였다. 기존 크라우드펀딩 사이트들이 많아야 10억원 정도 모았던 데 비해 VC 수준의 투자가 이뤄지는 것이다. 미국 블록체인기업 프로토콜랩스는 ‘파일코인’이라는 자체 코인을 팔아 지난해 2억5700만 달러(2751억원)을 모았다. 지난해 ICO 중 최대 규모였다. 프로토콜랩스는 개인 PC의 남는 저장공간(스토리지)을 타인과 P2P(개인간 거래) 방식으로 공유하는 일종의 ‘데이터 에어비앤비’ 프로젝트를 추진하고 있다. 코인스케줄닷컴에 따르면 지난해 ICO를 통해 37억 달러(약 4조원)가 조달됐다. 지난해 전 세계 벤처캐피탈의 투자금(1550억 달러)에는 아직 못 미치지만 미국 뉴욕증시 지난해 IPO 규모(356억 달러)의 10분의 1 수준으로 늘었다. 돈이 ICO로 몰리면서 실체가 없는 사기성 프로젝트들도 나타나고 있다. 자신들이 발행하는 암호화폐를 사면 1~2년 후에 막대한 시세 차익을 얻을 수 있다며 수백억을 모집하는 다단계 사기를 치는 식이다.

전문가들은 ICO를 제도권으로 흡수해야 한다고 말한다. 현재는 ICO가 어디까지 합법이고 어디까지 불법인지 따질 수 있는 법적 근거가 없다. 『블록체인 혁명』의 저자인 돈 탭스콧은 최근 방한해 “신생 기업에 ICO는 훌륭한 자금 조달 방법”이라며 “일부 ICO는 사기일 수도 있고 망할 수도 있지만, VC의 투자를 받은 회사도 망하는 것은 마찬가지”라고 말했다. 문규학 소프트뱅크벤처스 대표도 “IPO가 자본시장의 오페라라면 ICO는 뮤지컬에 가깝다”며 “오페라의 경직성을 깬 뮤지컬이 새로운 시장을 만들어 냈듯 ICO가 제도적으로 정착해 새로운 대안이 될 수 있게 연구해야 한다”고 말했다.

일각에서는 암호화폐 가치가 급등락한다는 면에서 ICO의 한계를 지적하는 목소리도 있다. 김영식 서울대 경제학과 교수는 “ICO를 통해 조달된 자금의 가치가 하루가 멀다 하고 널뛰기한다면 여러 면에서 역할을 제대로 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말했다. 김 교수는 “안정적으로 자금을 확보하려고 ICO를 했는데 하루 지나고 나니 그 가치가 반 토막으로 줄어든다면 자금 조달 수단으로서 지속하기 어렵다”고 덧붙였다.

박수련 기자 park.suryo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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