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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택 “더러운 욕망 억제 못했다” … 또 다른 거물 연출가도 도마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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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연출가 이윤택(66) 전 연희단거리패 예술감독이 성추행 관련 논란 끝에 결국 고개를 숙였다. 이 감독은 19일 서울 명륜동 30스튜디오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피해자들에게 진심으로 사죄드린다. 부끄럽고 참담하다. 법적 책임을 포함해 어떤 벌도 받겠다”고 공개 사과했다. 지난 14일 김수희 극단 미인 대표가 페이스북에 그의 성추행 사실을 폭로한 지 닷새 만이다. 그는 “극단 내에서 18년 가까이 관습적으로 한 나쁜 행태라고 생각한다”며 “어떤 때는 나쁜 죄인지 모르고 저질렀고 어떤 때는 더러운 욕망을 억제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연희단거리패 전직 단원이 지난 17일 온라인 커뮤니티 디시인사이드 연극·뮤지컬 갤러리에 올린 성폭행 폭로 글에 대해서는 “성관계를 한 것은 맞지만 폭력적이거나 물리적인 제압은 없었다”고 부인했다.

“어떤 벌도 받겠다” 폭로 5일 만에 사과 #“성관계 했지만 폭력적 제압 없었다” #SNS 등선 “사과 진정성 없다” 비판 #“성폭행 당해 임신·낙태” 추가 폭로도

성폭행 논란에 휩싸인 이윤택 전 연희단거리패 예술감독이 19일 오전 서울 종로구 30스튜디오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나쁜 죄였는지 모르고 저질렀을 때도 있고, 죄의식이 있으면서도 더러운 욕망을 억제하지 못했다“며 ’법적 책임을 지겠다“고 성추행 폭로 5일 만에 공개 사과했다. [김경록 기자]

성폭행 논란에 휩싸인 이윤택 전 연희단거리패 예술감독이 19일 오전 서울 종로구 30스튜디오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나쁜 죄였는지 모르고 저질렀을 때도 있고, 죄의식이 있으면서도 더러운 욕망을 억제하지 못했다“며 ’법적 책임을 지겠다“고 성추행 폭로 5일 만에 공개 사과했다. [김경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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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연출가의 지속적인 성추행은 극단 연희단거리패 내부에선 이미 알고 있었던 것으로 드러났다. 이 연출가는 “연희단거리패 선배 단원들이 항의할 때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고 매번 약속했는데 번번이 내가 그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고 말했다. 김소희 연희단거리패 대표 역시 “성추행 문제가 불거졌을 때 범죄로 인식하고 가해자·피해자 입장에서 봤어야 했는데, 선생님과 배우 사이의 일로 생각하고 사과와 재발 방지를 다짐받는 선에서 마무리지었다”고 했다. 김 대표는 “그런 구시대적인 인식이 지금의 엄청난 결과를 빚었다”며 “오늘부터 연희단거리패를 해체한다”고 발표했다. 연희단거리패는 1986년 이 연출가가 창단한 극단으로, 경남 밀양연극촌·김해 도요창작스튜디오·부산 가마골소극장 등을 운영하고 있다.

이 연출가의 공개 사과에도 불구하고 진정성이 없다는 비판이 일고 있다. 연극계 ‘미투’ 운동도 확산되는 양상이다. 연희단거리패 전직 단원 김지현씨는 19일 기자회견 이후 페이스북에 글을 올려 이 연출가에게 성폭행을 당해 임신·낙태한 사실을 폭로했다. 김씨는 “기자회견장에 갔다가 성폭행에 강제성이 없었다는 말을 듣고 뛰쳐나왔다. 2005년 안마를 하다 성폭행을 당했다. 지금도 공황장애 치료를 받고 있다”고 밝혔다. 추은경 극단 바보광대 대표, 이승비 극단 나비꿈 대표 등도 개인 SNS에서 이 연출가의 성추행 사실을 추가 공개했다.

이날 회견장에서 한 시민이 ‘사죄는 당사자에게 자수는 경찰에게’라고 적힌 종이를 들고 시위하고 있다. [김경록 기자]

이날 회견장에서 한 시민이 ‘사죄는 당사자에게 자수는 경찰에게’라고 적힌 종이를 들고 시위하고 있다. [김경록 기자]

한편 황이선 연출가는 또 다른 연출가로부터 당한 성추행 사실을 고발했다. 황 연출가는 “서울예대 교수”이자 “극단을 운영하는 연극계 대가”가 “2003년 학교에서 남산까지 가던 차 안에서 무릎 담요를 같이 덮자면서 허벅지에 손을 올렸고, 점점 중요 부위로 손이 다가왔다”고 적었다. 배우 출신인 박영희씨 역시 페이스북에 글을 올려 대학로 갈비집에서 공연계 ‘선생님’에게 당한 성추행 사실을 폭로하고, “실명을 공개하지 않는 까닭은 당신을 하늘처럼 모시며 청춘을 오롯이 바친 선배들, 동료들, 후배들이 상처받지 않기를 바랐던 마음 때문이다. 예술가로서, 어른으로서 책임 있는 행동으로 답해달라”고 요구했다.

연극계 내부에선 “터질 일이 터졌다”는 반응이다. 익명을 요구한 한 극단 스태프는 “극단에서 연출자에게 찍히면 배우가 살아남을 수 없어 문제제기가 어렵다”며 “연기가 몸을 쓰는 일이어서 신체 접촉이 일상적으로 이뤄지는 데다, 대형 뮤지컬과 달리 연극은 소수가 폐쇄적인 공간에 모여 작업하기 때문에 ‘보는 눈’이 적다는 것도 성추행 문제를 일으키는 요인”이라고 말했다. 이영미 대중예술평론가는 “조직 내 상하 관계에서 일어난 권력의 문제”라고 해석했다. 그는 “극단 대표와 연출가 등 권력을 가진 쪽이 주로 남성인 연극계는 성범죄 문제에 취약한 구조”라며 “가해자가 성범죄를 저지르면 어마어마한 대가를 치른다고 생각해야 근절된다”고 말했다. 한국여성연극협회 이사를 맡고 있는 최은옥 극작가는 “이미 알려져 있던 일인데도 쉬쉬하며 방관·묵인해온 연극계의 교수·평론가 등도 자성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날 서울연극협회는 “긴급이사회에서 이윤택 회원의 성폭력 사실을 묵과할 수 없는 심각한 범죄행위로 정의하고 최고 징계 조치인 제명을 결정했다”고 발표했다. 아시테지(국제아동청소년연극협회) 한국본부도 성명서를 내고 이윤택 연출과 연희단거리패의 회원 자격을 박탈한다고 밝혔다. 한국연극연출가협회·한국극작가협회 역시 이 연출가의 제명을 공지했다. 한국여성연극협회는 이 연출가가 그동안 받은 모든 상의 취소와 사법절차 병행 등을 요구했고, 연희단거리패에 밀양연극촌 위탁 운영을 맡긴 밀양시는 19일 극단 측에 계약해지를 통보했다.

이지영 기자 jyle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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