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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도, 인맥도 없는 무작정 광대..영화 '흥부' 연희감독 문정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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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흥부' 속 연희 연출을 맡은 문정수(39)씨가 종로구 북촌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영화 '흥부' 속 연희 연출을 맡은 문정수(39)씨가 종로구 북촌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어이구, 우리 새가 어디 갔나. 내가 품고 있던 우리 새가 어디 갔나.” 때는 세도정권의 수탈이 극에 달한 조선 헌종 14년. 저잣거리 놀음판에서 “뻐꾹뻐꾹” 새를 찾는 광대에게 다른 광대가 묻는다. “그 새가 뭔 새여?” “그 새가 말이여, 조세(租稅)일세. 조세!”

 14일 개봉한 사극 영화 ‘흥부’(감독 조근현) 한 장면이다. '흥부'는 작자 미상인 고전 『흥부전』의 탄생 비화를 상상한 작품이다. 음란 소설을 쓰던 연흥부(정우 분)가 글로 세상을 바꾸는 민초의 작가로 거듭난다는 이야기다.

영화 '흥부' 한 장면. 지난해 작고한 배우 김주혁이 주인공 흥부(정우 분)를 변화시키는 민중 지도자 조혁 역을 맡았다. [사진 롯데엔터테인먼트]

영화 '흥부' 한 장면. 지난해 작고한 배우 김주혁이 주인공 흥부(정우 분)를 변화시키는 민중 지도자 조혁 역을 맡았다. [사진 롯데엔터테인먼트]

주인공 흥부의 여정에 곁들여지는 연희 장면이 예사롭지 않다. 광대들의 풍자적 언어유희와 간드러진 익살이 웃음을 더한다. 극 중 연희를 총지휘한 문정수(39) 연희 감독을 개봉 전 만났다. ‘18대 품바’로 알려진 그는 “왕도 갖고 놀던 광대정신”을 노자 삼아 팔도를 방랑하는 타고난 광대였다.
-'흥부'는 어떻게 참여했나. “제작진이 자문 구하려고 수소문하니 몇 군데서 내 이름이 나왔다고 하더라. 기존 영화에서 연희는 풍경으로 끝난 적이 많다. 조근현 감독님이 본격적으로 해보자 하셨다. 백미경 작가의 시나리오를 바탕으로 영화 주제를 압축한 새로운 연희극을 창작해 나갔다.”

 영화 '흥부'에서 고전 『흥부전』에 신선한 해학을 불어넣은 연희극 장면. [사진 롯데엔터테인먼트]

영화 '흥부'에서 고전 『흥부전』에 신선한 해학을 불어넣은 연희극 장면. [사진 롯데엔터테인먼트]

-창작의 중점은 어디에 뒀나. “광대들의 목소리로 조선시대와 이 시대를 직설적으로 연결시킬 방법을 찾으려고 재담 하나, 음절 하나까지 무수히 부수고 재창조했다. 정권의 횡포는 현대에도 이어진다. 전 정권도 ‘싱글세’를 매긴다는 둥 했잖나. 권력에 대한 격한 대치나 폭력을 넘어, 광대적인 웃음으로 동시대를 아우르려 했다.”
 가장 공들여 세공한 것은 영화 마지막 궁중 연희 장면이다. 그가 직접 헌종의 아버지 효명세자 꼭두각시 역으로 나섰다. 그는 “탈춤, 판소리, 연희 전문 배우 등 최고만 모인 20여명 연희꾼 덕에 족히 1년은 걸릴 연희 준비를 지난해 3~8월 6개월 만에 해냈다”며 “한국영화에서 새로운 창작 연희를 엮어낸 건 ‘흥부’가 처음”이라고 자부했다.

문정수 연희 감독이 가장 공들인 마지막 궁중 연희. 고관대작을 목숨 걸고 풍자하는 재담과 춤사위가 극의 긴장감을 바짝 조인다. [사진 롯데엔터테인먼트]

문정수 연희 감독이 가장 공들인 마지막 궁중 연희. 고관대작을 목숨 걸고 풍자하는 재담과 춤사위가 극의 긴장감을 바짝 조인다. [사진 롯데엔터테인먼트]

 그의 고향은 대전이다. 아버지 고향인 충남 청양 시골을 오가며 자란 덕에 어려서부터 농악이나 상여소리 등에 익숙했다고 한다.  “내가 다섯 살 때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 다섯 살 꼬맹이가 곡소리를 땅을 치며 따라했다더라. 우리네 삶이 녹아난 여러 소리들이 자연스레 내 안에 흘러들었던 것 같다.”
 고등학교를 마치고 열여덟 살에 무작정 대전의 작은 극단에 들어가 허드렛일부터 시작했고, 스무 살에는 전통 연희를 배우러 무작정 전국을 떠돌기 시작했다. 그는 “돈도 빽도 인맥도 없으니 나는 삶 자체가 그저 ‘무작정’이었다”고 돌이켰다.

문정수 연희 감독은 "어릴 적부터 막걸리 술기운에 거칠게 울려 퍼지던 동네 어른들의 농악이 신명났다"며 웃었다. 인터뷰 도중에도 그는 흥겨운 즉흥 재담을 펼쳐내곤 했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문정수 연희 감독은 "어릴 적부터 막걸리 술기운에 거칠게 울려 퍼지던 동네 어른들의 농악이 신명났다"며 웃었다. 인터뷰 도중에도 그는 흥겨운 즉흥 재담을 펼쳐내곤 했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각종 연희는 어떻게 익혔나. “배낭 하나 매고 무전 여행식으로 이 지역, 저 지역 풍물꾼들을 귀동냥했다. 민족극패 우금치에는 몇 번을 거절당하면서도 찾아가 마당극의 시대정신을 배웠다. 기차표만 달랑 끊고 제1회 안동국제탈춤페스티벌에 간 적도 있다. 축제장에서 설거지 알바로 열흘을 버티며 전국 10여개 문화재 탈춤 전 과장을 봤다. 전용 노트에 다 기록해 놨다.”
 2009년에는 무형문화재 남사당놀이 전수자가 됐고, 오디션을 거쳐 18대 품바로도 뽑혔다. 각설이가 주인공인 '품바'는 1981년 초연 이래 5000회 이상 공연된 연극이다. 그는 “뉴욕 공연도 다녀왔지만, 정규수 선배님의 초대 품바와 흡사하단 칭찬이 제일 뿌듯했다”고 했다.

2014년엔 단돈 20원만 갖고 갓신에 도포 자락 펄럭이며 서울에서 부산을 다녀온 16박17일 여행기를 『이십원 쁘로젝뜨 미친방랑』란 책으로 엮어 냈다. 사진은 책 속 이미지. [사진 북하우스]

2014년엔 단돈 20원만 갖고 갓신에 도포 자락 펄럭이며 서울에서 부산을 다녀온 16박17일 여행기를 『이십원 쁘로젝뜨 미친방랑』란 책으로 엮어 냈다. 사진은 책 속 이미지. [사진 북하우스]

 영화는 ‘왕의 남자’(2005)가 시작이다. “조선팔도 광대가 모여 공연하는 장면에서 사자탈춤 추는 광대”가 바로 그다. “탈이 벗겨져서 놀란 얼굴이 감사하게도 그 큰 화면에 혼자 2초쯤 나온다”고 했다. 이준익 감독과의 인연은 지금도 이어져 영화 ‘박열’(2017)에도 잠깐 등장했다. 독립자금 횡령을 의심받는 언론사 주필 역이다.
 지난 연말에는 가수 김완선의 콘서트 무대에서 각시탈과 흰 한복 차림에 부채를 들고 '삐에로는 우릴 보고 웃지'에 맞춰 춤을 선보이기도 했다. 영상‧디자인‧극작‧연희 등 다방면 또래 예술가와 뭉친 ‘경복궁 프로젝트’도 있다. 서울 효자동을 아지트 삼아 새로운 형태의 연희를 만드는 것을 목표로 활동중이다. 그는 “언젠가 전통 연희를 담은 뮤지컬 영화도 만들어보고 싶다”고 했다.

김완선 연말 콘서트에서 '삐에로는 우릴 보고 웃지'에 맞춰 전통 연희를 선보인 문정수 감독. [사진 문정수]

김완선 연말 콘서트에서 '삐에로는 우릴 보고 웃지'에 맞춰 전통 연희를 선보인 문정수 감독. [사진 문정수]

 이 지칠 줄 모르는 에너지의 원천은 뭘까. “부모님이 일흔이 다 되셨는데 흥이 넘치고 건강하시다. 방직공장, 자동차 정비공장에서 일하며 척박한 세월을 견디고도 마음은 광대인 분들이다. 올해 설에도 가족이 모이면 광대 노는 듯 즐거울 것이다. 아내의 한결같은 응원도 힘이 된다.”
 나원정 기자 na.wonjeo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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