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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오래 인생샷] 베를린 장벽 붕괴에 유탄 맞은 독일 유학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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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년 개띠, 내 인생의 다섯 컷 (46) 민병길

한국 사회에서 '58년 개띠'는 특별합니다. 신생아 100만명 시대 태어나 늘 경쟁에 내몰렸습니다. 고교 입시 때 평준화, 30살에 88올림픽, 40살에 외환위기, 50살에 글로벌 금융위기까지. 고도성장의 단맛도 봤지만, 저성장의 함정도 헤쳐왔습니다. 이제 환갑을 맞아 인생 2막을 여는 58년 개띠. 그들의 오래된 사진첩 속 빛바랜 인생 샷을 통해 우리가 걸어온 길을 되짚어봅니다.

초등학교 6학년 때 모습이다. 당시 강촌(江村)의 여느 아이들처럼 빡빡머리에 형이 입던 잠바를 입고 있다. 초등학교 예비 소집에 갔더니, 키가 작다고 내년에 오라고 했다. 입학 정원이 너무 넘쳐서 그랬던 것 같다. 다음 날 큰누나가 ‘삼학소주’ 큰 거로 사 들고 나와 함께 교장실로 찾아가 해결했다. 소주 한 병으로 나의 장래가 크게 달라지기도 하던 시절이었다.

식량뿐 아니라 모든 물자가 늘 부족했다. 아침마다 양말 전쟁, 누룽지 전쟁이었다. 아침부터 비가 오면 우산이 없어 학교에 안 갔다. 오후부터 비 온 날은 흠뻑 젖은 책 보자기 풀어 뜨뜻한 아랫목에 말리던 기억도 난다.

육성회비 못 내서 일 년 내내 시달렸지만, 일제고사 본 다음 날엔 분 냄새 나는 여선생님이 다가와 머리 만져주는 바람에 영 어색하고 기분 좋은 날도 있었다. 그 때문일까. 괜히 시험 보는 날만 기다리기도 했다.

고1 때 놀러 온 친구와 텃밭에서 찍은 사진이다. 우리 세대 전후에 신설 학교와 정원이 많아졌다. 운동장을 가득 메운 까만 교복의 수컷들을 보고 다소 위기감을 느낀 적이 있다. ‘저 많은 개떼들(개띠들)과 머지않아 식량, 예쁜 여자를 놓고 경쟁해야 하는 건가.’라고 말이다.

고1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곧 큰형이 군에 입대하고, 다섯이 학생이었다. 누나들은 출가외인. 고난의 행군이었다. 아슬아슬하게 한 학년씩 올라갔는데, 나중에 보니 누나 셋 빼고 6남매 모두 대학을 마쳤다. 어머니는 윗돌 빼서 아랫돌 괴는 기술이 있었고, 아들 셋은 입대 시기를 조절했는데 그게 둘 다 좋은 수였다.

막내 여동생이 학교에서 어머니날 ‘장한 어머니상’ 표창한다는 소식을 갖고 흥분해서 뛰어왔지만, 어머니는 지아비 일찍 여윈 게 무슨 장한 일이고 상 받을 일이냐며 끝내 고사하셨다. 아버지의 간 경화는 절제하지 않은 과음 습관 탓 같았는데도 말이다.

건축 관련 동아리에서 고건축 답사하며 찍은 사진이다. 나는 둘째 줄 가운데 장발을 하고 있다. 대학 3학년 때까지 현대 문명의 건너편에 살았다. 동네에 전기가 들어오지 않았다. 동떨어진 데다가 모두 일곱 가구밖에 안 된다는 게 이유였다.

등잔불로 생활했다. 우리 동네에서 백제 시대 문명과 다른 게 있다면 고무신 정도였다. 건축설계 과제 할 때는 빈 맥주병 네 개에 촛불 꽂아 놓고 그렸다. 그래도 낮에 보면 선들이 아귀가 안 맞고, 빠진 선이 많았다.

아랫동네 개띠들과 친목계 만들어 스무 명 넘게 떼 지어 다니며 늦은 밤에 송창식의 <왜 불러>를 부르며 동네 사람 다 깨우고 다녔다.

입대자가 넘쳐나 멀쩡해도 방위로 빠지기 일쑤였다. 나는 현역으로 가기는 했는데, 남는 병력이라고 자꾸 다른 부대로 밀어내는 바람에 강원도 최전방 향로봉까지 밀려 올라갔다. 거기서도 한동안 대기병 생활을 했다.

공부에 미련이 조금 있었다. 형들이 군대 간 동안 공부보다 농사일이 먼저였고, 등잔불도 좀 침침했다. 독일은 학비도 없고, 교과서도 그냥 빌려줬다. 베를린 공대에 다니며 방학 때 일해서 생활했다. 행복하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면서 엉뚱하게 나를 불쌍하게 만들었다. 동독 사람들이 서독으로 몰려들었고, 일자리를 동독 동포에게 주자는 운동이 독일 전국으로 퍼졌다. 외국 유학생에게는 아무리 밑바닥 일도 기회가 없었다. 베를린 겨울은 영하 20도를 넘나드는데 난방을 체온으로 했다. 부엌 식탁에서 물컵이 얼어 깨질 때, 나의 꿈도 깨졌다.

사진 속 뒤는 베를린 장벽이다. 당시 시대 상황과 고뇌, 해학 등을 풍자한 그림이다. 통일되자 시민들이 망치와 정으로 모두 쪼개어 기념으로 가져갔다.

빈털터리로 한국에 돌아와 허름한 회사에 다니며 밤에는 건축사 공부했다. 드디어 건축사가 되어 열정적으로 일을 시작했는데, 얼마 못 가서 IMF를 정통으로 맞고 또 넘어졌다.

아무런 성취 없이 세월 다 털리고, 낯선 땅에 가서 처음부터 다시 시작했다. 공인 빌더 자격증에 집중했다. 캐나다 현지인들은 일을 많이 안 한다. 나는 한국에서 하던 대로 했다. 12년 만에 가족들이 좋아하는 지역에 ‘비바람 들이치지 않는 새집 지어줄 게’ 했던 <약속의 집>을 지었다.

어릴 적 생긴 좁은 공간 콤플렉스가 집을 키웠다. 대지 700평, 건물 200평에 수영장도 크게 지었다. 낡은 연립주택 월세에서 이 집으로 점프할 때 스릴 있었다.

아이들이 많이 컸으니 잠시 한숨 돌렸다가도 혹시나 가족들이 난처(難處)해질까, 아직도 마냥 물어다 놓기만 한다. 변화와 굴곡이 심했던 시대에 만고(萬苦)를 헤치며 살아온 우리 개띠들이 집을 지키는 방식인 듯하다.

한국에 가서 동네 친구들과 막걸리 마시며 <그건 너> 부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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