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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택희의 맛따라기]한식 최전선 35년 경륜 펼치고 맛 뵌다…조희숙의 한식공방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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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년간 최고급 한식당 주방을 지키며 현대 한식의 역사를 일궈온 조희숙 선생. 그 동안 쌓은 경험을 후진들과 공유하고 극소수에게만 차려내던 음식을 일반인도 맛볼 수 있게 하려고 교육과 체험 공간인 ‘조희숙의 한식공방’을 지난해 12월 열었다. 주방에선 여전히 현역이다. [사진=임상진 SL안과 원장]

35년간 최고급 한식당 주방을 지키며 현대 한식의 역사를 일궈온 조희숙 선생. 그 동안 쌓은 경험을 후진들과 공유하고 극소수에게만 차려내던 음식을 일반인도 맛볼 수 있게 하려고 교육과 체험 공간인 ‘조희숙의 한식공방’을 지난해 12월 열었다. 주방에선 여전히 현역이다. [사진=임상진 SL안과 원장]

설날 아침이다. 집집마다 고전적 한식으로 차례상을 차렸겠다. 내친 김에 한식을 잠시 돌아보면 어떨까 하여 35년간 현대 한식의 최전선을 누비며 새 역사를 열어온 ‘한식의 장인’ 조희숙(60) 선생을 만났다. 그의 음식도 맛보고 ‘한식 현대사’의 증언도 들었다. 35년 세월이 응축된 음식이고 사연이어서 기사가 길다. 독자의 양해를 구한다.

조리 현장 경험 후배들과 공유하는 공방
공유·공방. 몇 차례 대화하면서 살피니 그의 사람됨을 알 수 있는 두 단어가 있었다. 사람들은 그를 선생님 또는 교수님이라 부르지만 본인은 누구를 가르친다는 생각을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다고 한다. 경험을 공유할 뿐이라고 했다. 그는 한식을 연구하고 경험을 공유하는 공간을 만들고 ‘조희숙의 한식공방’이라 이름했다. 공방(工房)은 공예품을 만드는 곳이다. 공예품은 예술적 가치가 있게 빚은 실용품이다. 한식을 그렇게 만들겠다는 의지가 담긴 작명이다. 입구 벽에 쓴 취지문이 그런 생각과 기대를 담고 있는 듯하여 전문을 옮긴다.

“우리 음식에 대해 함께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35년 동안 현장에서의 경험을 후배들에게 공유하고자 합니다. 한국의 사계절이 담긴 식재료를 찾아 메뉴를 만듭니다. 장인의 손길이 깊이 배인 전통 음식을 제품으로 개발합니다. 우리의 음식을 좋아하고 만드는 사람들이 모이는 공방입니다.”

‘한식의 대가’ ‘셰프들의 셰프’ 같은 영예로운 수식어가 그를 따라다니지만, 그는 늘 자신을 드러내기 어려운 자리에 있었다. 공방을 내면서 “숨어있던 사람이 밖으로 나온 것”이라고 스스로 말하는 이유다. 전반 20년은 호텔 주방을 지켰고, 후반 15년은 공개할 수 없는 자리의 음식을 주로 담당했다. “돈 많은 사람의 식사”라고 했다. 짐작하건대 한국인의 0.01%, 만의 하나에 속하는 사람들일 것이다. 우리나라 인구는 올 1월 행정안전부 기준 5177만9148명이다. 그는 올림픽 개막일인 지난 9일에도 강원도 강릉에서 열린 문재인 대통령과 안토니오 구테흐스 유엔 사무총장의 오찬회담 음식을 차렸다.


극소수 위해 하던 음식 일반인에게 선봬
공방 취지문 내용을 구체화하면 ▷35년간 현장에서 몸으로 익힌 한식 경험의 전수장 ▷특수한 일부에게만 차리던 한식을 일반인에게 맛 보이고 피드백을 받아 새로운 한식의 틀을 모색하는 창구로 활용해 ‘한식 발전소(發展所)’가 되도록 하려는 것이다. 그는 “조직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일할 곳이 필요했다. 지난 세월 일을 너무 많이 해서 쉬고 싶기도 하지만 쉬는 것도 마음대로 안 된다. 여기가 인생 마무리 장소라고 생각한다. 사람을 남겨야 하니까, 요리는 기술이니 실무 훈련으로 남겨야 해서 만든 작업공간”이라고 했다.

경험을 전수하는 강의는 오너셰프·일반인 두 과정으로 시작했다. 진행하면서 한 가지로 정리할 계획인데 전문가 쪽일 가능성이 크다. 큰 줄기만 가르쳐주고 나머지는 자신의 색깔을 넣어 자기 요리가 탄생하도록 여백을 두는 강의를 하려고 한다. 현장 사례를 들어보고 클리닉 식으로 의견을 제시하면서 경험을 전수하는 방식이다. 성격이 다른 6개 클래스를 열고, 4개월간 4~5회 강의를 한 과정으로 한다. 식사는 한 달에 5팀 정도만 가능할 듯하다. 시간은 원하는 대로 할 수 있다. 값은 1인 15만~20만원(미정). 술을 팔지 않지만 가지고 오면 코키지 없이 잔은 준비해준다.

공방은 지난해 12월 본격적으로 가동했다. 조리실과 카운터 바 형식의 좌석(6~7석)이 있는 47㎡(14.2평) 공간과 19㎡(5.8평)의 별실이 있다. 서울 삼성동 아메리칸스탠더드빌딩(서울 강남구 영동대로112길 66) 1층에 있다. 문의·예약은 010-4594-7361.

조희숙 선생이 손으로 쓴 지난달 25일 만찬의 10코스 차림표. [사진=임상진 SL안과 원장]

조희숙 선생이 손으로 쓴 지난달 25일 만찬의 10코스 차림표. [사진=임상진 SL안과 원장]

익숙한 새로움…10코스 한식 2시간 진행
공방을 열었다는 소식을 듣고 설날 아침에 한식에 대한 생각을 나눌 수 있는 기사를 기대하면서 어렵게 자리를 얻어 지난달 25일 저녁을 먹었다. 넓지 않은 공간에 각종 조리기구와 수많은 기물이 4면 벽의 절반을 채운 공방에 들어서자 화이트보드에 조 선생이 손으로 쓴 10가지 코스 차림표가 보였다. 카운터 바 자리에 앉으니 주방의 일거수일투족이 한눈에 보이고, 보조 요리사 2명과 조리하는 조 선생의 숨소리가 들릴 만큼 가까웠다. 그는 “일본의 스시 바 형식이 한식에도 괜찮지 않을까 싶어서 열린 주방으로 꾸몄더니 요리하는 사람에게는 별로 좋지가 않다”고 했다. 하지만 보면서 먹는 사람은 좋았다. 2시간 동안 진행된 식사의 음식을 순서대로 사진과 함께 소개한다.

코스 시작으로 나온 4종류 13가지 ‘한 입 거리’. 서양 식사의 오르되브르 격이다.

코스 시작으로 나온 4종류 13가지 ‘한 입 거리’. 서양 식사의 오르되브르 격이다.

김·방풍·메뚜기·감자(왼쪽부터 시계방향) 부각.

김·방풍·메뚜기·감자(왼쪽부터 시계방향) 부각.

수십 년 만에 맛본 메뚜기 부각에 틈이 벌어져 메뚜기가 보인다.

수십 년 만에 맛본 메뚜기 부각에 틈이 벌어져 메뚜기가 보인다.

말린 대추·귤·방울토마토.

말린 대추·귤·방울토마토.

①식전 한입: 한 입이 아니었다. 크고 작은 칠기 바리때 2개와 12각 백자 합 2개에 13가지 한 입 거리가 차려져 있었다. 저 작은 것들을 어떻게 일일이 손으로 빚었는지, 하나하나가 정성이 깃들어 ‘작품’이라 해야 할 것 같았다. 공방이라 이름한 뜻도 체감이 됐다. 큰 바리때에는 김·방풍·메뚜기·감자 부각이 있었다. 메뚜기는 정말 수십 년 만에 구경한다. 자연농법으로 벼를 재배하는 지인의 논에서 잡아 보내준 것이라고 한다. 싫어할 사람도 있으니 모양이 보이지 않게 전체를 찹쌀풀 입혀 튀겼다. 작은 바리때에는 말린 과일 세 가지(귤·방울토마토·대추)가 들어있다. 대추는 씨를 뺐는데 겉모양은 멀쩡하고 바삭했다. 충북 보은의 전문 생산자 제품이라고 했다.

감태 다식(연두색), 어란·잣 가루 다식(두 가지 색), 육포를 빻아 고추장 섞어 빚은 경단(노란색).

감태 다식(연두색), 어란·잣 가루 다식(두 가지 색), 육포를 빻아 고추장 섞어 빚은 경단(노란색).

한치(왼쪽)와 잣육포쌈, 패주포.

한치(왼쪽)와 잣육포쌈, 패주포.

한 백자 합에는 엄지손톱 크기의 두 가지 다식과 완자를 담았다. 연두색 감태 다식과 어란을 살짝 구워 빻은 가루를 바닥에 깔고 잣가루로 위를 덮은 다식이다. 완자는 다진 육포에 고추장을 약간 넣고 버무린 뒤 빚어서 피스타치오 가루에 굴린 경단 모양이었다. 다른 백자 합은 건포 종류를 담았다. 구워서 찢은 뒤 매듭지어서 모양을 낸 한치 세 조각을 나란히 놓고, 잣 두 알을 육포로 감싸 빚은 육포잣송편과 저며서 말린 패주포를 번갈아 한 줄로 뉘어 놨다. 공방에서 쓰는 백자 그릇들은 도예가 이기조 교수의 작품이다.

그는 13가지 한 입 거리에 대해 “제철 재료로 음식을 하는 게 맞지만, 꼭 그럴 수만은 없는 형편도 있다. 35년 동안 한식을 하면서 고민 가운데 하나였다. 환자에게 필요하면 겨울에도 수박을 주듯이 다른 계절 재료도 필요하면 쓸 수 있게 하려는 시도를 많이 했다. 오늘 이 음식은 계절마다 준비해 ‘시간을 저장한’ 재료 또는 보존이 가능한 재료들로 만들었다”고 했다.

죽을 쑤려고 냄비에 재료를 담는 조희숙 선생. 주방에 보조요리사가 있지만 직접 한다.

죽을 쑤려고 냄비에 재료를 담는 조희숙 선생. 주방에 보조요리사가 있지만 직접 한다.

황잣으로 쑨 해물잣죽.

황잣으로 쑨 해물잣죽.

해물잣죽에는 관자·새우·표고 등이 들어갔다. [사진=임상진 SL안과 원장]

해물잣죽에는 관자·새우·표고 등이 들어갔다. [사진=임상진 SL안과 원장]

②해물잣죽: 관자·새우·표고를 볶다가 잣가루·쌀가루를 넣고 쑨 죽을 그릇에 담고 위에 잣가루를 뿌렸다. “코스의 하나가 아니라 메인에 가까운 단품 요리도 될 수 있게 하려고 고민한 음식이고, 국물이나 소스로도 활용할 수 있게 만들었다”고 설명했다. 잣은 보늬(속껍질)를 벗기지 않은 황잣을 썼다. 보늬를 벗기려면 삶아야 하는데 이때 맛이 많이 빠진다. 황잣은 그 과정을 거치지 않아 맛이 고소하고 눈도 살아있다. 그래서 황잣을 구해 보늬를 삶지 않고 직접 벗겨서 쓴다. 사진에서 보이듯 잣가루 색이 여느 것보다 진하다.

전통적인 숙회를 재해석해 재료 구성과 담기를 혁신한 ‘겨울 초회’.

전통적인 숙회를 재해석해 재료 구성과 담기를 혁신한 ‘겨울 초회’.

③겨울 초회: 초고추장 소스를 담은 오목한 백자에 매듭지은 곰피·미역 두 가닥씩, 데친 시금치(비금섬초) 두 포기, 데친 피조개 살 2개, 데친 산 낙지 다리 3~4가닥을 차례로 올리고 거칠게 빻은 잣가루를 뿌렸다. 재료마다 익힌 정도가 맞춤해 감탄이 나왔다. 소스는 고추장·고춧가루·조핏가루(초피나무 열매껍질로 만든 가루)·막걸리식초·사과즙(밀양 얼음골)을 넣어 만들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신맛이고, 단 음식을 싫어하는 입에도 전혀 거슬리지 않은 단맛이다. 간은 짜지도 싱겁지도 않은 접점을 기가 막히게 찾아갔다. 설탕은 전혀 쓰지 않았다고 한다.

겨울 초회에 고추장·고춧가루·조핏가루·막걸리식초·사과즙으로 만든 초장을 붓고 있다. [사진=임상진 SL안과 원장]

겨울 초회에 고추장·고춧가루·조핏가루·막걸리식초·사과즙으로 만든 초장을 붓고 있다. [사진=임상진 SL안과 원장]

다른 날 만찬의 겨울 초회는 내용이 약간 다르다. [사진=임상진 SL안과 원장]

다른 날 만찬의 겨울 초회는 내용이 약간 다르다. [사진=임상진 SL안과 원장]

그는 “한 상 차림으로 나가면 반찬도 하나하나가 다 같은 요리인데 젓가락 한번 가지 않고 버릴 때가 많다. 독립요리로 만들어 코스에 포함하면 다 먹게 돼 낭비를 줄이고 음식 수준도 높아지지 않을까 생각했다. 초회도 반찬이 아니라 독립된 요리로 낼 수 있게 디자인했다. 늘 그런 고민 속에 산다. 뭔가 다르게 해보려고 늘 생각한다”고 음식의 탄생 배경을 설명했다.

전복 매생잇국. 국물은 전복 데친 물에 굴을 볶아서 뽑았다.

전복 매생잇국. 국물은 전복 데친 물에 굴을 볶아서 뽑았다.

④전복 매생잇국: 매생잇국에 데친 전복을 얇게 저며 올렸다. 보기에도 예쁘고 비단결처럼 부드럽겠다는 느낌이 들었다. 매생이를 참기름에 볶다가 전복 데친 국물에 굴을 볶아서 낸 육수를 부어 끓였다. 국물을 낸 굴은 건져냈다. 굴 향이 너무 강해 맛의 균형이 깨질까 저어해 뺀 듯하다. 떠먹으면 눈이 절로 감기는 맛이다.

뚜껑을 닫은 백자 합에 다소곳이 나온 음식. 내용이 궁금하다.

뚜껑을 닫은 백자 합에 다소곳이 나온 음식. 내용이 궁금하다.

서리태 되비지를 얹은 항정살 묵은지 찜.

서리태 되비지를 얹은 항정살 묵은지 찜.

묵은지 잎을 헤치자 속에는 비슷한 넓이의 항정살과 묵은지 줄기를 어울려 찐 주인공이 나타났다. 되비지까지 3가지 다른 맛이 잘 어울렸다.

묵은지 잎을 헤치자 속에는 비슷한 넓이의 항정살과 묵은지 줄기를 어울려 찐 주인공이 나타났다. 되비지까지 3가지 다른 맛이 잘 어울렸다.

⑤항정살 묵은지 찜: 뚜껑을 덮은 백자 대접이 나왔다. 뚜껑을 여니 색이 짙은 묵은지 겉대 잎 부분으로 감싼 뭉치에 노란 콩즙을 다소곳이 얹었다. 껍질 벗긴 서리태를 갈아서 되비지 스타일로 끓이고 새우젓 간을 했다. 콩즙을 끓일 때는 젓지 않고 뭉근하게 가열해 거품이 나지 않도록 한다. 간은 불을 끈 다음에 한다. 간을 하고 가열하면 콩 단백질이 두부처럼 엉기기 때문이다. 묵은지 잎 뭉치를 펼치니 속에 한입 크기의 고기 석 점이 들어있다. 항정살과 묵은지 줄기를 비슷한 길이로 잘라 사이사이 끼우고 잎으로 감싸서 쪘다. 옆자리에서 먹던 젊은 미식가는 맛에 감동하여 “눈물 나는 맛”이라고 했다.

조 선생은 “한식은 누구나 아는 재료로 하고, 누구나 안다고 생각하고, 누구나 한마디씩 참견을 한다. 이런 문화에서 남다르게 하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생각을 조금만 달리 하면 다양한 변주와 조합이 가능하다. 퓨전과는 다르다”며 한식의 어려움과 가능성 양면을 짚었다.

석쇠에 올려 구운 금태(표준명 눈볼대) 살.

석쇠에 올려 구운 금태(표준명 눈볼대) 살.

상에 나가기 전 마지막 점검을 받는 금태 양념구이 밥.

상에 나가기 전 마지막 점검을 받는 금태 양념구이 밥.

밥과 구이에서 기름이 자르르 흐르는 금태 양념구이 밥.

밥과 구이에서 기름이 자르르 흐르는 금태 양념구이 밥.

⑥금태 양념구이 밥: 가늘게 채 친 김을 그릇 바닥에 깔고, 소금 간을 해서 참기름에 비빈 밥과 포 떠서 양념해 석쇠에 구운 금태(표준명 눈볼대) 한 토막을 차례로 올렸다. 금태 양념은 고추장·고춧가루·간장·파·마늘·생강으로 만든 유장을 발랐다고 한다. 유장이 고루 밴 금태 살이 입 안에서 녹는 듯했다. “한식을 코스로 풀다 보니 밥 없이 반찬만 먹는 상황이 된다. 그걸 보완하기 위해 밥이 들어가는 코스로 넣은 음식”이라고 했다. 밥을 먹어야 식사했다고 생각하는 한국인의 식성을 참작한 순서다.

불고기와 능이죽순채를 준비하는 주방. 능이죽순채 담기가 끝나가자 여자 보조요리사가 불고기가 구워진 진도를 살피고 있다.

불고기와 능이죽순채를 준비하는 주방. 능이죽순채 담기가 끝나가자 여자 보조요리사가 불고기가 구워진 진도를 살피고 있다.

석쇠에 구운 등심 불고기.

석쇠에 구운 등심 불고기.

마늘·대파와 고추장 양념한 더덕 꼬치구이를 얹어 완성한 불고기와 능이죽순채.

마늘·대파와 고추장 양념한 더덕 꼬치구이를 얹어 완성한 불고기와 능이죽순채.

⑦불고기와 능이죽순채: 일정 기간 보존이 가능한 재료인 담양 죽순과 철원 능이를 나물로 무쳐 바닥에 깔고 불고기를 올린 다음 꼬치구이 2개를 고명으로 얹었다. 불고기는 얼리지 않은 등심을 덩어리로 사와서 직접 얇게 저며 재웠다. 고기가 한번 얼었다가 녹으면 원래 맛을 내기 어렵기 때문이다. 등심에 좋은 재료로 양념해서 석쇠에 올려 직화로 구웠으니 시중에서는 꿈꾸기 어려운 맛이다. 꼬치 하나는 고추장 양념한 더덕구이인데 고기 뒤끝의 느끼한 맛을 깨끗하게 씻어줬다. 다른 꼬치는 흑마늘·대파·마늘을 차례로 꿰어 구웠다.

계란 물 입혀 삶을 준비를 마친 파만두.

계란 물 입혀 삶을 준비를 마친 파만두.

파만두에 계란 물을 입혀 삶기 위해 육수가 끓는 냄비에 넣기 직전. [사진=임상진 SL안과 원장]

파만두에 계란 물을 입혀 삶기 위해 육수가 끓는 냄비에 넣기 직전. [사진=임상진 SL안과 원장]

파만두 떡국은 파만두를 따로 삶아 떡국에 얹는다. 조희숙 선생은 떡국을 나누면서 ’배식에 실패하면 큰일인데“라고 했는데 실제 실패에 재분배했다. 손님들에게 추억을 남겨주려는 설정으로 보였다.

파만두 떡국은 파만두를 따로 삶아 떡국에 얹는다. 조희숙 선생은 떡국을 나누면서 ’배식에 실패하면 큰일인데“라고 했는데 실제 실패에 재분배했다. 손님들에게 추억을 남겨주려는 설정으로 보였다.

⑧파만두 떡국: 떡국에 삶은 파만두를 올렸다. 이제껏 음식 좀 먹어봤다고 생각했는데 파만두는 처음이다. 밀가루 피 없이, 대파 흰 줄기를 5㎝ 정도로 잘라 세로로 칼집을 깊게 내서 벌리고 소를 채운 만두다. 양지머리와 갈비 마구리 뼈로 따로 국물을 내 섞은 육수에 떡국을 끓이고, 파만두는 계란 물 입혀 따로 삶아서 떡국 그릇마다 2개씩 올렸다. 만두소가 하나는 닭 안심(흰색), 하나는 대게 살(불그스름)이다. 대파는 1월에 가장 맛이 좋은 진도 파를 썼다. “움파(겨울에 움 속에서 자란 빛이 노란 파)로 해야 부드럽고 단맛이 있어서 맛있는데 부탁을 해놨더니 키우는 데 실패했다”며 아쉬워했다.

떡국에 앞서 상에 나온 4가진 반찬. 한우고기 장조림. 순무 장아찌, 총각김치, 보리굴비찜(왼쪽 아래부터 시계방향).

떡국에 앞서 상에 나온 4가진 반찬. 한우고기 장조림. 순무 장아찌, 총각김치, 보리굴비찜(왼쪽 아래부터 시계방향).

떡국보다 먼저 4가지 반찬(쇠고기 장조림, 보리굴비, 순무 장아찌, 총각김치)을 차렸다. 흔히 보는 찬품이지만 흔한 맛은 아니었다. 장조림은 씹을수록 고기 맛이 물씬했다. 보리굴비는 내가 집에서 해 먹던 것보다 부드러웠다. 물어보니 쌀뜨물에 불리고 두드려서 쪘다고 했다. 두드리는 과정이 더 들어갔다. 총각김치는 잘 익어 시원한데, 무는 아삭함이 살아있다. 무를 고를 때부터 안목이 다르니 이런 맛이 나올 것이다. 처음 먹어본 순무 장아찌도 색다른 맛이다. 남다르게, 새롭게, 뭐라도 해보려고 애쓴 태가 나는 반찬들이었다.

앞앞이 차려진 파만두 떡국과 4가지 반찬.

앞앞이 차려진 파만두 떡국과 4가지 반찬.

 파만두 소가 옅은 주황색인 것(위)은 대게 살이고, 하얀 것은 닭 안심이다. [사진=임상진 SL안과 원장]

파만두 소가 옅은 주황색인 것(위)은 대게 살이고, 하얀 것은 닭 안심이다. [사진=임상진 SL안과 원장]

그는 조리하면서도 하고 싶은 말이 많은 듯 묵직한 주제의 얘기를 이어갔다. “토종 호텔에 근무하다 글로벌 체인 호텔에 갔더니 한식은 찬밥이고 변방이었다. 이래선 안 되겠다, 뭔가 고쳐야겠다, 변화를 주면서 새롭게 해야겠다는 생각이 오랫동안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정부가 한식 세계화한다고 나섰을 때는 정작 낄 자리가 없었다. 세계로 나가기 전에 저변을 다져야 하는데 그게 안 돼 있다. 현장에서 평생 한식을 한 사람이 별로 없다. 한식은 서서히 가라앉은 게 아니라 갑자기 푹 꺼진 분야다. 정부가 한다기에 잘 되겠구나 생각했는데 하는 걸 보니 얘기가 다르더라. 태국의 성공사례를 자꾸 얘기하는데 문화를 알리고 파는 일을 정책으로 이끌고 가기는 어렵다”

고구마 맛탕을 올린 단팥죽.

고구마 맛탕을 올린 단팥죽.

⑨단팥죽: 팥 앙금에 유기농 마스코바도 원당과 계핏가루·생강청을 넣어 맛을 낸 단팥죽에 주사위 크기로 만든 고구마 맛탕 7쪽을 올렸다. 부드러우면서도 가는 앙금 알갱이가 혀에서 굴러다니는 듯한 식감이다. 일행 중 누군가가 “여기가 서울에서 첫째로 잘하는 집”이라고 말했다.

곶감쌈과 유자말이는 색이 고와 쉽게 손이 가지 않는다. [사진=임상진 SL안과 원장]

곶감쌈과 유자말이는 색이 고와 쉽게 손이 가지 않는다. [사진=임상진 SL안과 원장]

곶감쌈 속을 열어보니 여러 가지 견과류와 색이 다른 곶감이 들어있다. 호두를 말아 만드는 전통의 곶감쌈을 새롭게 해석했다.

곶감쌈 속을 열어보니 여러 가지 견과류와 색이 다른 곶감이 들어있다. 호두를 말아 만드는 전통의 곶감쌈을 새롭게 해석했다.

⑩곶감쌈·유자말이: 곶감쌈을 『두산백과』는 “곶감 속에 호두를 넣어 호두의 단면이 보이도록 자른 전통 숙실과”라고 설명했다. 그게 우리 상식이다. 상식을 깨는 곶감쌈이 나왔다. 합천 곶감을 썼다는데, 모양은 말리기 전 감 같고, 꼭지가 매달렸던 감나무 가지 토막까지 달려 있다. 예전 허리에 차던 복주머니가 떠올랐다. 곶감에 가지 토막이 달린 것은 장대로 감을 일일이 따서 깎아 곶감을 말렸다는 증거다. 꼭지 바로 아래 곶감에 칼집을 내고 속에 호두·아몬드·캐슈너트·피스타치오와 잘게 자른 다른 지역 곶감까지 넣어 두둑하게 채웠다.

숙성 통에서 잠깐 건진 유자말이.

숙성 통에서 잠깐 건진 유자말이.

유자말이는 옛 기록의 유자단자를 변용했다. 원방에는 밤·대추·석이편을 넣어 만들게 되어 있지만, 여기서는 사과·배를 채 썰어 말랭이로 만들어 대추 채와 함께 넣었다. 단자는 보통 유자에 4등분 칼집을 내고 속을 파낸 다음 준비한 재료들로 채워 통째 실로 묶어서 시럽에 담가 숙성한다. 하지만 여기는 유자를 네 조각으로 자르고 하나씩 속을 채워 말은 다음 실로 묶어서 숙성했다. 그래서 이름이 단자가 아니고 말이다. 유자단자는 손이 많이 가는 음식이다. 한식을 하는 다른 이에게 들으니 완성품 하나에 5만~6만원쯤 하고, 이름있는 이가 만든 건 10만원을 받기도 한다.

"성격은 소심해도 음식 실험할 때는 과감"
10가지 코스를 먹고 되짚어보니, 이름으로는 모르는 음식이 없지만 앞서 먹은 같은 이름의 음식과 같은 것은 하나도 없다. 같은 이름의 음식이라도 재료의 조합과 조리법을 혁신했다. 그는 혁신의 역정을 “기존 틀을 조금씩 깨는 요리를 많이 했다. 한식의 새로운 세계 열려고 노력했다. 소심한 성격이라 과감한 시도를 못 하는데 음식만큼은 과감하게 저질렀다. 아이디어가 끊임없이 샘솟는다. 하느님이 주신 달란트인 것 같다. 늘 새롭게 시도한다. 유지-파격의 균형이 맞아야 사회가 건강하다. 요리의 세계도 마찬가지다”라고 설명했다.

자신의 요리인생을 정리한 ‘CORECHEF/한식사랑’ 제목의 파일을 보니 ‘메뉴 개발 포인트’ 5가지가 있다. ①맛은 유지하되 썰기∙담기 등을 다르게 해 형태에 변화를 준다. ②식재료·식기 사용을 다양하게 시도한다. ③반찬을 메인 음식으로 만든다. ④재료∙조리법의 조합을 다각적으로 모색한다. ⑤한식 고유의 정식 코스를 정립한다. 그는 “정보가 넘쳐나는 인터넷이나 SNS가 없던 시절에 순전히 개인의 생각·경험·느낌을 토대로, 가만히 있을 수만은 없어서, 새로운 시도를 지속해서 해왔다. 아무도 시키지 않고, 관심도 없지만, 독립운동이라도 하는 양, 그렇게 해야 하는 직성(直星)을 타고난 것 같다”고 덧붙였다.

제철인 대게 다리 살과 매생이로 전을 부치고 있다. [사진=임상진 SL안과 원장]

제철인 대게 다리 살과 매생이로 전을 부치고 있다. [사진=임상진 SL안과 원장]

대게 매생이 전과 연근전. 연근전에는 밥이 들어갔다. 밥과 반찬을 한 상에 차리는 반상문화가 특장점인 한식을 코스로 전개할 때 반찬만 차례로 먹게 되는데 밥은 언제, 어떻게 먹게 해야 좋을지를 조희숙 선생은 늘 고민한다. [사진=임상진 SL안과 원장]

대게 매생이 전과 연근전. 연근전에는 밥이 들어갔다. 밥과 반찬을 한 상에 차리는 반상문화가 특장점인 한식을 코스로 전개할 때 반찬만 차례로 먹게 되는데 밥은 언제, 어떻게 먹게 해야 좋을지를 조희숙 선생은 늘 고민한다. [사진=임상진 SL안과 원장]

교사 하다가 선배 권유 거절 못해 호텔로

굽이굽이 지난 세월의 사연과 한식에 대한 생각을 그는 토요일인 지난 3일 오후 5시간에 걸쳐 풀어놓았다. (※이후 내용은 그의 얘기를 정리한 것이다.)

그는 광주광역시에서 태어나 조부모와 삼촌 슬하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고 초등학교에 입학하면서 부모님이 있는 서울로 왔다. 연희초등학교 1회 졸업생이다. 성장기에 부모님의 불화를 보면서 가정을 원만하게 꾸리는 지혜를 가르치는 선생이 되고 싶었다. 수도여사대(현 세종대) 가정교육과에 진학한 동기다. 졸업 후 고향인 전남지역 교사 임용고사에 합격해 고흥군 점암중앙중학교에 부임했다. 꿈꾸던 가정 선생님으로 2년을 보냈다. 겨울방학 무렵 서울 세종호텔 한식당 책임자로 일하는 선배가 함께 일할 생각 없느냐며 불렀다. 1983년 12월 방학하자마자 서울로 올라와 설명을 듣고 형식적으로 취업면접을 봤다. 연말이라 호텔이 바빠서 면접 끝나자마자 조리복 입고 일을 하라고 했다. 학교 동아리에서 ‘영적 성장’에 영향을 준 선배여서 거절하지 못하고 방학 동안 시간이 있으니까 해보고 결정하자는 생각으로 발을 담갔다.

‘한식사랑’ 파일을 보면 그는 숫자 3을 코드로 요리인생을 3기로 나눴다. ①1983~1993 세종호텔 근무. 열악한 여건 속에서도 개인 역량 집중적으로 성장. 그냥 10년이라 셈하면 손해 보는 느낌이 들 정도로 압축성장의 시간이었다. ②1993~2003 외국 체인 호텔을 포함해 3곳의 특급호텔에서 한식 책임자로 근무하면서 새로운 조리 환경과 다른 분야 음식을 접하게 돼 시야를 넓혔다. 한식의 현주소를 발견하고 한식 발전에 대한 사명감을 다졌다. 이 시기 호텔 한식은 소멸했다. ③2003~2011(53세) 호텔 생활을 마감하고 다양한 외식시장을 경험했다. 한식 세계화의 태풍이 불었다. 태풍권 변방에서 ‘내 생전에 이런 시대를 보게 되는구나’ 하는 격세지감의 감회에 젖었다.

요리를 처음 시작한 세종호텔은 1980년대 초 한식당 ‘은하수’ 뷔페가 유명했다. 그때 사람들은 얼마나 많이들 먹는지 음식을 만들어 부어놓고 돌아서면 바로 없어질 지경이었다. 밤마다 집에 가면 끙끙 앓았다. 어머니는 “왜 그런 고생을 사서 하느냐”고 지청구했다.

35년 전 요리는 그저 먹고살기 위한 노동
방학 동안 일단 해보기로 했는데 어느새 방학은 끝나고 있었다. 결단의 순간, 선배에게 NO라고 말하지 못했다. 일이 좋아서가 아니라 성격 탓이다. 요리에 대한 특별한 사명감이나 비전이 있는 게 아니었다. 거절을 못 해서 세종호텔에 몸을 담았고 1983년 12월부터 1993년 3월까지 10년 가까이 근무했다. 요리 인생의 출발점이자 기틀을 잡은 터전이다. 요즘처럼 한식이 화제가 되는 시대가 올 줄은 몰랐다.

그 시절 가정 선생님은 신붓감으로 인기가 좋았다. 부모님들이 더 선호하고, 선망했다. 더구나 공립학교 교사였다. 2년 만에 학교를 그만두자 다들 아까워했다. 하지만 거기서 평생의 반려를 만났다. 중학교 이웃 마을인 과역면의 과수원집 아들로, 서울 명문대를 나와 대기업에 근무하던 청년이었다. 1986년 결혼했다.

4년제 대학 나와 조리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지금 눈으로 그때의 셰프를 보면 안 된다. 조리사 일은 먹고 살려고 어쩔 수 없이 하는 것이고, 호텔에 근무해도 요리한다는 사실을 부끄러워서 숨기던 때다. 그런 의식에 사로잡힌 사람들과 함께 일을 시작했다. 대부분 초졸·중졸이었다.

당시 세종호텔은 시설이 구식이었다. 식재료는 20㎏쯤 나가는 짝으로 왔다. 남자 직원이 지게로 4층 주방까지 져 올리면 주방 사람들이 그걸 쓰는 곳으로 들고 날랐다. 직접 손질해 요리했다. 지금 같은 시스템이 아니었다. 그 바람에 무릎이 다 망가져 지금도 불편하다. 직원식당도 없고 근로기준법도 몰랐다. 새벽에 출근해 식당일 끝나야 퇴근했다. 끼니는 짬밥통 옆에 쪼그려 앉아서 때웠다. 복지는 개념조차 없었다. 성취나 보람을 얘기할 상황이 아니었다. 오로지 먹고사는 것만이 목표였다.

다른 날 만찬의 후식으로 나온 경단 얹은 단팥죽과 곶감 배숙. [사진=임상진 SL안과 원장]

다른 날 만찬의 후식으로 나온 경단 얹은 단팥죽과 곶감 배숙. [사진=임상진 SL안과 원장]

가까이 본 곶감 배숙. 배를 익혀 일부는 갈고, 일부는 깍둑썰기 해 곶감을 받치고 꾸몄다. [사진=임상진 SL안과 원장]

가까이 본 곶감 배숙. 배를 익혀 일부는 갈고, 일부는 깍둑썰기 해 곶감을 받치고 꾸몄다. [사진=임상진 SL안과 원장]

첫 주방 세종호텔서 10년…아픔 안고 떠나

집안에서 큰딸이라 살림을 많이 돕고 동생들도 건사했다. 그런 오지랖 때문인지 하면 뭔가 개선하고 잘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때 두 가지를 결심했다. 내게 요리의 끼가 있다면 발휘해보자. 선생님 그만둔 걸 후회하지 않도록 살자. 다짐이자 자기 압박이었다.
손재주는 집안 내력이었다. 아버지는 옷 만드는 봉제공장을 했다. 시골에서는 새벽에 할아버지가 새끼 꼬고 망태기 만드는 기척에 잠이 깨곤 했다. 할아버지는 전라도 말로 ‘손끝 매시랍게’ 뭔가를 잘 만들었다. 그런 솜씨를 물려받았다. 돈 버는 일엔 솜씨가 없다. “손익만 맞춰도 뭘 벌여 보겠는데 그럴 자신이 없다”고 했다.

젊음을 바쳐 10년을 일한 세종호텔을 나오게 된 일은 그에게 아픔이었다. 호텔을 운영하는 대학재단(세종대)의 대물림 과정에 2세 형제간 알력이 생겼다. 동문 7~8명이 근무하는 한식당(뷔페)에서 요리한 지 5년 만에 한정식당 개점 준비 책임자 자리를 맡고 있었다. 2세 중 한 명이 사장으로 오면서 조직개편을 했다. 나이는 같지만 학교는 1년 후배인 동료를 한식당 총괄 책임자로 임명했다. 세상이 끝났다는 생각이 들어 “나는 분 갈이 하러 나간다”며 떠났다.

1993년 노보텔 앰배서더 강남 오픈 멤버로 가서 한식과장으로 1995년 말까지 3년 일했다. 프랑스 호텔 체인이어서 국내 토종호텔에서 배운 것과 전혀 다른 유럽호텔 시스템을 익힌 기회였다. 스위스 출신 총주방장 밑에서 한식을 담당했다. 한식이 최고이던 호텔에 있다가 글로벌 체인 호텔에 가니 한식의 현주소를 새롭게 깨닫는 계기도 됐다. 한식의 문제점과 개선책도 나름대로 생각했다.

외국 체인 호텔 일하며 한식 현주소 절감
1996년 1월부터 미국계 그랜드 인터컨티넨탈 호텔에서 한식과장으로 일했다. 총주방장 아래서 한식을 책임지는 자리다. 유일한 여자 과장이었다. 호텔 개업 이래 다른 호텔 출신이나 여자가 식당에 오기는 처음이라고 했다. 개업 10년이 넘은 한식당 주방은 텃세가 심했다. 총주방장이 지시해도 따르지 않았다. 그들을 지휘할 사람으로 한식과장을 새로 영입한 거였다. 기존조직에 지휘자만 바뀌니 바위 위에 작은 돌을 하나 얹은 불안한 형세였다. 작은 돌이 자신을 밀어낼지도 모른다는 의구심을 그들이 갖고 있다는 사실도 잘 몰랐다.

주방 책임자(차장)는 나이가 많아 할아버지 같았다. 그분이 안 움직이면 밑에서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당시 한식 조리사들은 고집(흔히 ‘곤조’라 하는)이 있어서 말을 잘 듣지 않았다. 스트레스가 심해 음식을 씹을 수 없을 정도로 이가 아팠다. 치과에 가면 이상 없다고 했다. 1년쯤 지나 얘기를 들으니 가방끈 긴 여자가 왔는데 사흘만 있다가 나가게 하자는 묵계가 있었다고 한다.

세종호텔에서 시작할 때부터 아무도 안 도와줘도 뚝심으로 일을 해내는 스타일이었다. 남녀 일 가리지 않고 달라붙어서 했다. 전동기계톱(절단기)으로 갈비 자르는 일도 했다. 나이 많은 남자 직원들이 “미스 조는 세 사람 몫을 한다”고 했다. 그 경험이 뒷날 일하는 데 크게 힘이 됐다. 도와주지 않아도 주방에 들어가 고깃덩어리 꺼내 능숙하게 다루는 걸 보더니 조금씩 눈빛이 달라졌다.

하루는 하도 힘들어서 퇴근 시간에 주방 할아버지 차 앞에서 기다렸다. “드릴 말씀이 있다”고 하니 차에 태웠다. 동네 분식집에 마주 앉아 솔직하게 얘기를 했다. “이런 상황인 거 모르고 일할 생각만으로 왔다” 했더니 다음날 주방 직원들에게 “야, 도와줘”라고 소리쳤다. 얼마 후 그는 사표 내고 나갔다. 한식 주방 세대교체의 전위대라는 얘기를 들었다.

죽순채를 바닥에 깔고 차린 통 등심구이. 여러 가지 채소로 꼬치구이로 곁들여 고기와 채소의 조화를 도모했다. [사진=임상진 SL안과 원장]

죽순채를 바닥에 깔고 차린 통 등심구이. 여러 가지 채소로 꼬치구이로 곁들여 고기와 채소의 조화를 도모했다. [사진=임상진 SL안과 원장]

그때는 남자들이 일하는 세계에서 밀리지 않으려고 늘 애를 썼다. 15명 참석하는 호텔 아침회의에 유일한 여자 멤버였다. ‘여자니까’ ‘한식이니까’ 같은 말이 안 나오게 하려고 이를 악물었다. 총주방장은 “조 셰프는 남자”라고 했다. 한식 현장에서 지낸 35년은 남자들 세상에서 살아온 세월이었다.

대학 있다가 호텔신라로…2년 만의 좌절
학교를 떠난 뒤 학교에는 돌아가지 않는다고 결심하고 있었는데 2000년 경남 도립 남해대학 호텔조리학과 교수로 가게 됐다. 2년을 즐겁게 보내고 있을 때 호텔신라에서 불렀다. 삼성이 그룹 전 부문에서 순혈주의를 깨고 글로벌 인재를 영입하기 시작할 때였다. 이부진 사장(당시 부장)이 호텔 경영에 참여한 지 2년째였다. ‘월드 베스트 호텔 비전’을 제시했다. 인사팀에서 사람이 직접 찾아와 “도와 달라”고 했다.

대학으로 갈 때 인터콘티넨탈 호텔 그만둔 날짜를 써놨던 조리모를 다시 꺼냈다. 요리하는 사람이 학교에 갔다가 현장으로 복귀하는 일은 드문데 못다 한 현장의 꿈 펼쳐보겠다며 돌아왔다. 뭔가 하고 싶었다. 한식도 이럴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 하지만 한식에 대한 이해가 부족할 때고, 기존 조직의 저항은 심했다. 한식 주방장은 떠났다. 세대교체의 첨병이라는 말을 또 들었다.

호텔신라 한식당은 2년 만에 문을 닫았다. 꿈을 펼치기에 너무 짧은 시간이었다. 이건희 회장이 만류했지만, 이부진 사장이 단행했다. 수익이 나지 않으니 할 말은 없었다. 이 사장은 대단히 집요했다. 한식에 대해 대화를 시작하면 4시간을 하기도 했다. 음식 시안을 만들고 토론하면 당장 답이 없는 문제까지 즉답을 원했다. 당시 상황에서 최선을 다했는데 궁극의 완성형을 찾았다. 눌러왔던 복합적 울분이 터져 눈물을 쏟았다. 그랬더니 너무 미안해했다.

된장찌개라도 시중의 5000원짜리와 호텔의 1만5000원짜리가 어떻게 다른지 보여주고 싶었다. 그 돈을 지불해도 아깝지 않도록 느끼게 해보고 싶었다. 출발이 다른 음식인데 소비자는 그 돈을 지불할 준비가 안 돼 있다. 양식에 대해서는 가격도 수긍하고 수준이 높아졌는데, 한식은 그렇지 못하다. 세계적 호텔에서 양식을 즐기는 사람도 한식에 대한 안목은 동네 밥집 잣대를 가지고 있다. 긴장해서 외국 음식을 먹던 마음이 한식을 먹을 때는 풀어지는 것 아닌가 생각이 들 정도다. 전반적으로 사회 수준이 같이 올라가야 한다.

다른 날 만찬에 나온 고등어죽. [사진=임상진 SL안과 원장]

다른 날 만찬에 나온 고등어죽. [사진=임상진 SL안과 원장]

"다들 안다 하지만 아무도 모르는 게 한식"

다 안다 생각하지만 아무도 모르는 게 한식이다. 일반화되지 않은 자기만의 기준으로 자꾸 비난하고 독촉하고, 잘 만들어 놓으면 값도 안 쳐주는 게 한식의 현실이자 딜레마다. 가치를 인정하는 데 인색하고, 한식은 비싸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우리 것이 좋다는 걸 인정하지 않고 뭐가 좋은지 잘 알지도 못한다. 모르면서 안다고 생각한다.

이 사장이 좀 기다려줬으면 했는데 아쉽게도 한식당은 막을 내리고 말았다. 호텔을 그만두면서 칼을 아예 놓을까 하는 생각을 1년쯤 했다. 2003년 호텔을 그만두고 컨설팅 일을 하다가 BBQ 고문으로 들어가 메뉴 개발과 한식당 론칭 업무를 맡았다.

2005년에는 주미 한국 대사관저 총주방장으로 갔다. 나이에 맞지 않는 자리였는데 대사 부부가 적극 권유해서 가게 됐다. 재외공관에 정식 조리사가 나가기는 처음이었다. 대사관저에서 다른 나라 외교관 부인들을 초청해 한식 요리교실을 열기도 했다. 지금은 여러 공관에 조리사들이 나가 있고, 요리교실도 외교부가 정식 사업으로 진행하는 프로그램이다.

짧은 기간이지만 대사관저 음식 외교의 효용과 중요성을 부각한 계기가 됐다. 주재국 오피니언 리더들이 맛있게 먹으면 호감이 빠르게 퍼진다. 그래서 대사관은 한식 세계화의 전진기지 구실을 해야 한다. 그때 한국대사관의 음식 외교를 다른 나라 공관들도 관심을 가지고 봤다. 일본은 훨씬 앞서 있었다. 한국은 대사관 총주방장이 거의 살림 도우미 수준이라 경력으로 내세우기 어려운데 일본은 대사관 근무 경력을 자랑하는 분위기였다. 요즘 재외공관에는 조리학교를 막 졸업한 젊은이들이 간다. 예산이 적어 초보들을 뽑는 게 우리 현실이다.

'어느 곳에도 없는 맛' 특수 음식 담당 10년
2006년 미국에서 돌아와 대전 우송대학에 부임했다. 미국 가기 5년 전부터 꾸준히 접촉이 있었는데 ‘학교엔 가지 않겠다’는 생각 때문에 가지 않았던 학교다. 3년 동안 학생들을 가르쳤다. 2007부터는 특수한 법인의 손님 음식 준비를 맡고 있다. 세계 각국에서 오는 손님들 식사를 다 준비해야 한다. 조건은 “어느 곳에서도 맛볼 수 없는 요리를 해 달라”는 것이었다. 산이 있어 오른다 하듯, 에베레스트에 등정한다는 기분으로 수락했다.

아름지기 식문화 연구 전문위원으로 있을 때는 ‘온지음’의 주방 설계와 스태프 구성 등 기틀을 잡는 작업을 했다. 아름지기에서 원하는 걸 호텔에서 닦은 안목으로 풀어보고 싶었다. 이 무렵 호텔신라가 한식당을 새로 만든다며 불렀다. 반대를 무릅쓰고 없앴다가 10년 만에 ‘라연’을 다시 만들 때였다. 떠났던 자리에 다시 문을 연다니 감회가 깊었다. 인사담당 상무가 찾아와 “임원회의 결정”이라며 “모시겠다”고 했다. 온지음 설립 준비작업이 한창이어서 갈 수 없었다.

‘한식공방’은 이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선 마음으로 문을 열었다. 정체성과 변화의 딜레마에 빠진 한식의 미래 모색이 당면과업이다. 한식은 한 상에 밥과 반찬을 차리는 반상(飯床) 문화가 특장점이다. 호텔에서 일할 때 어려웠던 건 밥이 주식이고 반찬이 함께 놓이던 반상을 코스로 구성하는 일이었다. 밥 없이 반찬을 차례로 먹는 게 한식 프레임으로는 불가능했다. 밥 없이 발효 음식을 먹을 수는 없다. 장을 활용할 기회가 없게 된다.

한식 해물누룽지. [사진=임상진 SL안과 원장]

한식 해물누룽지. [사진=임상진 SL안과 원장]

밥·반찬 한 상 차림 반상, 코스로 풀기 고민

반상은 밥과 발효 음식을 곁들이는 음식문화다. 식사가 한 가지 맛으로 구성되는 게 아니라 간을 하지 않은 밥과 각각의 반찬이 어우러지는 맛의 조화와 변화가 이어진다. 장은 밥이 있어야 먹을 수 있다. 밥은 백지이고, 거기에 반찬으로 여러 가지 그림을 그릴 수 있다. 이게 한국 음식문화의 특장점이기 때문에 장·발효를 어떻게 활용하느냐가 무한대의 숙제다.

한식 세계화 세미나에 가보면 반상 문화가 잘못됐다며 문제점만 늘어놓는다. 개선책은 없다. 있는 것 없애자는 얘기와 바꾸자는 얘기만 무성하다. 문화는 살아온 내력이 쌓인 현상이기 때문에 잘잘못이 없다. 틀린 문화는 없다. 반상 문화가 우리 음식문화의 특징이라는 걸 공론화하고 받아들여야 한다. 코스 형식이 식사를 한 상에 차려내는 한식과 잘 맞지 않지만, 코스가 세계적 추세라면 한식에 맞는 프레임을 개발할 필요가 있다. 와인에 맞춘 서양식 코스 말고 한식의 특징에 맞는 전개 방식이 있어야 한다. 주안상·식사상·후식상 식으로 메지를 짓는 방식도 생각해볼 수 있다. 한식의 공식을 새로 만들어 그들도 우리 공식에 익숙해지도록 해야 한다.

한식 세계화 구호가 나오기 이전, 외국계 호텔에 근무할 때는 한식에 대해 사회적 관심이 없었다. 위기의식을 절감하고 아무리 얘기해도 들어주는 사람이 없었다. 그랬는데 갑자기 국가가 나서더니, 울분에 가깝게 하고 싶은 말들이 많았는데 그때까지 한식 하던 사람들은 다 배제한 채 새로운 프레임을 짜고 있었다. 현장에서 한식 일하는 사람들이 공감하는 문제점이 있는데, 그걸 제기할 길은 없었다. 한식 세계화 구호가 그렇게 나왔으니 잘 되길 기대하기 어려웠다.

한식의 정체성을 제대로 알려고 하지 않았고, 그래서 제대로 알리지도 못했다. 모던 한식 트렌드에 편승해서 눈에 보이는 것만 이용해 성과 위주로 하려다 보니까 단기 이벤트 효과밖에 내지 못했다. 보여주기에 주력하고, 너무 행사 위주로 흘렀다. 꽃이 지고 나서 남는 게 없게 됐다. 뿌리를 내리고 꽃을 피워야 씨앗이 남는데, 기반작업은 안 하고 꽃부터 피우려 한 결과다.

"음식도 표현의 자유 중요…옥죄지 말아야"
사람들이 그림은 아무거나 그려도 뭐라고 말하지 않으면서 음식에는 자꾸 단정의 칼날을 들이댄다. 개인의 음식 상상력을 틀에 가두면 안 된다. 표현의 범위가 넓어지면 거르는 기능도 생기니까 제한하지 말아야 한다. 예술만 표현의 자유가 있는 게 아니다. 한식도 표현의 자유가 중요하다. 말도 안 되게 한식을 바꿔놓으면 시장이 정리한다. 모던 한식이 퍼질 때 그 위세에 눌려 평생 해온 한식의 위기를 잠시 느꼈지만, 정신 차리고 보니 하나의 과정일 뿐이었다. 시장이 다 알아준다. 요즘은 진정한 한식을 찾는 사람이 늘고 있다.

남이 해주는 음식이 제일 맛있고, 스쿨푸드 김떡순(김밥·떡볶이·순대)을 좋아한다는 그는 “한식에 대한 사명감을 가지고 하늘이 준 달란트를 활용해, 한식이 이슈가 되기 전에 남보다 일찍, 남보다 다른 길에서 고민했다”고 격동의 세월을 담담히 회고하면서 “먹고사는 것 중요하지만 거기에 사명감을 더하면 성취가 훨씬 빠르다”고 후진에게 응원의 말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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