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르포] 명절 앞둔 콜센터 감정노동자의 하루 경험해보니

중앙일보

입력

13일 찾은 SK텔레콤 고객센터. 권유진 기자

13일 찾은 SK텔레콤 고객센터. 권유진 기자

명절 앞두고 분주한 통신사 콜센터

서울 구로동에 있는 SK텔레콤 콜센터에는 제빙기가 놓여있다. 하루 120개 정도 전화를 받는 직원들을 위해서다. 상담사 800명이 있는 이 센터에서 하루 처리하는 전화 민원만 약 9만6000여 건이다.

설 연휴를 이틀 앞둔 13일에도 센터는 분주했다. 직원 손모(33)씨의 책상 위에는 ‘우리 누수없이 탄탄대로 꽃길만 가즈아’란 쪽지가 붙어있었다. 폭언과 욕설, 격무에 시달리다 그만 두는 이들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이 회사에서도 지난해 11월 입사자 13명 가운데 7명이 이미 회사를 떠났다.

9시 정각이 되자 사무실 곳곳에서 “친절히 모시겠습니다”, “행복을 드리는 상담원 OOO입니다” 같은 인사말이 쏟아졌다. 직원 손모(32)씨의 첫 전화는 요금제 변경 상담이다. 그는 “다가오는 설 연휴,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라고 밝게 인사를 건넸다. 고객의 대답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여전히 적지 않은 악성 민원인

“2만(원) 얼마 나오는 요금제를 몰라서 그동안 5만원 씩 냈는데 뭔가 보상 해주어야 하는 것 아니에요? 빨리 조치 해줘요. 아니면 소비자 보호원에 올릴테니까.”

잠시 후 한 고객이 ‘실버 요금제’의 존재에 대해 왜 진작 알려주지 않았냐며 따지기 시작했다. 상담사가 죄송하다고 네 번이나 말 한 뒤에야 전화가 끝났다.

 4개월 차 신입사원도, 경력 상담사도 폭언이나 욕설에 힘들기는 마찬가지다. 오죽하면 '감정노동자'라는 용어가 생겨났을까. 고용노동부 집계에 따르면 국내에선 560만~740만명의 노동자가 감정노동에 종사하고 있다. 전체 임금 노동자의 31~41% 수준이다. 지난해 11월부터 일을 시작했다는 정모(25)씨는 “첫 날 콜 업무를 하고 상처받아 집에 가서 펑펑 울었다”고 말했다.

‘오빠라고 불러봐라’ 같은 성희롱도 잊을만 하면 등장하는 단골 소재라고 한다. 5년 차에 접어든 권모(25)씨는 “욕설전화는 2~3일에 한번 꼴로 온다. 옛날보다는 많이 줄었다”고 말했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악성 민원인만 전담으로 상담하는 부서도 있다. 일반 상담실에서 처리하기 힘든 민원이나 이른바 ‘스마일 고객’의 전화는 ‘고객보호원’으로 간다. 스마일 고객이란 욕설, 성희롱 등으로 여러번 문제를 일으켜 관리대상이 된 사람들을 말한다.

‘전화 끊을 권리’ 보장한다지만 곳곳에 사각지대

고객이 욕설이나 성희롱을 하면 직원들은 즉각 전화를 끊을 수 있도록 돼있다. 하지만 여전히 사각지대는 있다. 회사 관계자는 “현장 상담사들은 어디까지 끊고 어디까지 받아야 할지 기준이 애매해서 잘 끊지 못하고 대부분 다 받고 있다”고 말했다.

악성 민원인도 고객만족 평가를 할 수 있다는 점도 전화 끊기를 주저하게 만든다. 무작위로 만족도 조사를 하는 평가 특성상 악성 민원인에게도 평가를 요청하는 연락이 갈 수 있기 때문이다. 직원 정모(25)씨는 “만족도 조사가 회사 평가와 개인 평가에 모두 들어가 그 생각을 안할 수가 없다”고 말했다.

근무 강도도 높은 편이다. 상담사들이 한 시간당 채워야 하는 ‘콜 수’가 있다. 9개월 이상 근무한 사람들은 시간 당 15개의 상담 전화를 해야 한다. 만일 9~10시 사이 10개의 콜밖에 처리하지 못했다면 10~11시에는 20개를 받아야 평균 15개가 맞춰진다. 콜 수는 고객에게 걸려 오는 전화를 기준으로 추산한다. 고객의 요청에 따라 다시 전화해야하는 경우는 포함되지 않는다. 콜 수를 맞추려면 자연스레 이 업무는 쉬는 시간이나 점심시간으로 밀리기도 한다.

회사 측도 상담사들의 근무 여건이 열악하다는 걸 알고 있다. 최근 몇몇 기업을 중심으로 ‘전화 끊을 권리’를 보장하는 등 상담사 업무환경을 개선하기 위한 노력을 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방송통신위원회는 SK텔레콤·KT·LG유플러스·SK브로드밴드 등 통신 4사와 협의해 오는 4월부터 평일 점심시간(12~1시) 동안 고객센터의 일반 상담 업무를 중단하기로 했다. 감정노동자들의 감정도 조금씩이나마 보호의 대상이 돼 가고 있다.

상담원들의 근무시간이 일정하지 못해 회사에는 작은 간식 코너도 마련돼있다. 권유진 기자

상담원들의 근무시간이 일정하지 못해 회사에는 작은 간식 코너도 마련돼있다. 권유진 기자

권유진 기자 kwen.yujin@joongang.co.kr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