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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절남녀] '딸들의 반란', 차례 내가 지내면 안 되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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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중앙포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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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날이 코 앞입니다. 그리운 고향, 보고 싶은 가족ㆍ친구들…. 매년 설날 ‘귀향 전쟁’을 치르면서도 고향에 가는 이유입니다. 하지만 여기 다가온 명절이 반갑지만은 않은 사람이 있습니다. 이연지(가명) 씨입니다. 연지 씨는 배다른 남동생을 상대로 소송을 진행 중입니다. 연지 씨가 하고 싶은 말은 딱 한 가지라고 합니다.

아버지를 추모할 권리는 왜 아들에게만 있나요?

법원의 판단을 기다리는 '현재 진행형' 사건임에도 연지 씨 얘기를 전하는 건, 올해가 호주제 폐지 10년이 되는 해이기 때문입니다. 호주제는 2000년 성주 이씨 여성들이 "딸들도 종중 구성원으로 인정해 달라"며 낸, 소위 '딸들의 반란' 소송이 시발탄이 돼 2008년 폐지됐습니다(2005년 헌재 헌법불합치 결정). 호주 중심 가족제도가 사라지고 제사를 간소화하거나 지내지 않는 집이 늘고 있는 요즘, “딸은 조상을 추모할 권리도 없냐”는 연지 씨의 소송은 두 번째 ‘딸들의 반란’으로 읽힙니다. 그녀의 이야기를 통해 조상을 추모할 권리, 우리의 오래된 제사 문화에 대해 다시금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으면 합니다. 기사는 연지 씨 가족과 한국가정법률상담소 취재를 바탕으로 재구성했습니다. 김현예 기자 hyki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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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를 추모하고 싶습니다. 아버지를 돌려주세요." 
평범한 직장인인 연지(가명) 씨는 지난해 봄,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하지만 장례식장에는 갈 수 없었습니다. 상주 자리에 설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 자리에는 '아버지의 그녀', 그리고 연지 씨의 배다른 남동생이 있었다고 합니다.

연지 씨는 아버지가 원망스러우면서도 한편으로는 보고 싶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용기를 내 찾아간 납골당에서 다시 한번 눈물을 삼켜야 했습니다. 아버지 납골함 역시 그 여자분과 배다른 남동생 사진으로 장식돼 있었기 때문입니다.

연지 씨 아버지는 그녀가 어린 시절 집에 자주 오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연지 씨는 그저 사업 때문에 바쁜 줄로만 알았다고 합니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이혼한 것도 아니고 집 밖에서 계속 아버지를 만났기 때문에, 특별히 이상하다는 생각도 못 했다고 하네요. 아버지의 외도를 알게 된 것은 중학생 때였습니다. 그리고 고등학생이 되자 아버지는 연지 씨에게 '남동생이 생겼다'고 말해줬다고 합니다.

연지 씨는 '아버지를 추모하고 싶다'고 했습니다. 적어도 ‘아버지가 있는 자식’이 되고 싶었다고요. 하지만 대법원 판례에 따르면 아버지 유해에 대한 권리가 미성년자인 배다른 남동생에게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법으로는 딸보다 아들이 앞서기 때문이랍니다. 납골당에 가볼 수는 있지만, 아버지 납골함 곁에 자신의 사진 한장도 둘 수 없다는 겁니다. 연지 씨는 결국 배다른 남동생을 상대로 아버지 유해를 돌려달라는 소송을 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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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주제 폐지됐지만 여전히 아들 중심 판결

연지 씨는 지난해 12월 1심을 다룬 의정부지방법원 고양지원에서 패소했습니다. 우리 민법은 유해를 모실(승계) 사람에 대해 따로 규정을 두고 있지 않습니다. 민법 제1008조의 3에 '사람의 유체와 유골은 제사용 재산인 분묘와 함께 제사 주재자에게 승계된다'고 돼 있는 것이 전부입니다. 이렇다 보니 10년 전 대법원 판례가 지금껏 판결의 기준이 되어 왔습니다. "망인의 장남(장남이 이미 사망한 경우에는 장남의 아들인 장손자)이 제사 주재자가 되고, 공동상속인 중 아들이 없는 경우에 망인의 장녀가 제사 주재자가 된다"는 판시입니다.

고양지원도 대법원 판례에 따라 "제사와 제사용 재산의 승계제도는 조상숭배를 통한 부계혈족(父系血族) 중심의 가계 계승에 바탕을 두고 있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오늘날 제사의 성격이 많이 바뀌었다고 하지만 협의가 이뤄지지 않은 경우에는 적서(嫡庶)를 불문하고 장남 내지 장손자가, 공동상속인 중 아들이 없는 경우에 장녀가 제사 주재자가 된다”고 판결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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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들의 두 번째 반란'

연지 씨는 소송을 대법원까지 가져갈 생각이라고 합니다. 소송을 맡은 한국가정법률상담소 김민선 변호사는 "단지 딸이라는 이유만으로 조상을 추모할 권리를 빼앗겨야 할 이유가 없지 않느냐"고 반문했습니다. 김 변호사는 “핵가족화가 진행되면서 딸만 자녀로 둔 가정, 전통적인 방식의 제사를 지내지 않는 가정이 늘고 있다"며 “사회 변화와 함께 제사에 대한 사람들의 생각도 변하고 있는 만큼, 대법원도 달라져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여러분 생각은 어떠십니까? 

호주제 폐지 10년, 딸들의 반란

올해는 호주제가 폐지된 지 10년이 되는 해다. 부계혈통 중심의 호적을 없앤 건 딸들이었다. 남편과 이혼하고 아이를 낳아도 여자라는 이유 때문에 자기 호적에 아이를 올리지 못했던 여성, 여자이기 때문에 종중원으로 인정받지 못했던 성주 이씨 여성들이 소송을 냈다. 헌법재판소는 2005년 2월 호주제에 대해 헌법불합치 결정을 내렸다. 2008년 1월 새 가족관계등록 제도가 시행되며 호주제는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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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들의 두 번째 반란

우리 민법은 조상의 유해를 누가 승계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규정하고 있지 않다. 이 때문에 유해 승계, 제사와 관련된 남자와 여자의 다툼이 여전히 진행 중이다. 출산율(2016년 합계출산율 기준 1.17명)이 떨어지고, 여아 100명 당 남자아이 수를 뜻하는 출생성비( 2005년 107.8명→2015년 105.3명)도 달라졌지만, 법이 바뀌지 않은 탓이다.

우리 법에 제사와 관련된 유일한 조항은 민법 1008조의 3이다. "제사용 제사의 소유권(분묘에 속한 1정보 이내의 금양임야와 600평 이내의 묘토인 농지, 족보와 제구의 소유권)은 제사를 주재하는 자가 이를 승계한다"는 부분이다. 제사와 관련된 재산권이 "제사 주재자"에게 있다는 부분을 명시했지만, 정작 누가 제사 주재자가 될 것인지에 대한 규정이 없다.

헌법재판소 재판관을 지낸 전효숙 이화여자대 명예교수는 '제사주재자의 결정 방법' 이라는 논문(2010년)에서 이 부분을 지적했다. 우리 법이 제사 주재자가 누구인지에 대해서 명확한 규정 없이 제사 재산 소유권을 인정해, 논란의 빌미가 되고 있다는 것이다.

10년 전 대법원 판례 보니 

3남 3녀 중 장남인 A씨는 2006년 소송을 냈다. 배다른 형제를 상대로 아버지를 유체를 돌려달라는 것이었다. 사정은 이랬다. 아버지는 1947년 어머니와 결혼해 A씨를 낳았다. 하지만 결혼 십수년 만에 다른 여자와 살림을 차렸다. 아버지는 다른 여자와 살며 아들 1명과 딸 2명을 낳았다. 44년간 연락이 끊어졌던 아버지는 2006년 사망했다.

뒤늦게 아버지 사망 소식을 접한 A씨는 장례식에도 참석하지 못했다. 배다른 동생들은 "아버지의 유언"이라며 공원묘지에 아버지를 모셨다. A씨는 소송을 냈다. "아버지 제사를 지낼 자격이 내게 있고, 선산에 아버지를 모셔야 한다"는 것이었다. 배다른 동생들은 맞섰다. "40년 넘게 절연했고, 부자지간에 양육이나 부양 의무를 지지 않았으니 제사를 지낼 권리가 없다"는 것이었다. A씨 사건은 대법원까지 갔다. 대법원은 2008년 장남인 A씨의 손을 들어줬다.

장남 vs 다수결 vs 법원

A씨 사건을 다룬 대법원 전원합의체의 다수(대법관 7인) 의견은 이렇다.
"공동상속인이 협의하되, 협의가 이뤄지지 않는 경우 특별한 사정이 없으면 장남·장손이 제사의 주재자가 되어야 한다."
만약 장남이 사망한 경우에는 장손자가 제사를 이어받고, 아들이 없는 경우에는 장녀가 제사 주재자가 되는 셈이다. 이 사건을 다뤘던 다른 대법관들의 판단은 어땠을까.

박시환 전 대법관과 전수안 전 대법관은 "협의가 이뤄지지 않는 경우에는 다수결에 의해 정해야 한다"고 봤다. 김영란 전 대법관과 김지형 전 대법관은 "법원이 여러 사정을 고려해 제사주재자를 결정해야 한다"는 의견을 내놓기도 했다. 실제로 '제사'문화가 있는 이웃나라 일본은 제사를 누가 지내느냐를 놓고 분쟁이 발생할 경우에는 우리 가정법원과 같은 '가정재판소'에서 결정하도록 하고 있다(민법 제897조).

 ※[명절남녀]설날이 또 돌아왔다
이 기사는 스페셜리포트 '설날이 또 돌아왔다, 명절남녀의 속사정' 과 함께 기획되었습니다. 클릭하면 '명절남녀의 속사정' 스페셜 리포트를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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